113. 아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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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아직이야
2022.11.28.
서둘러 펠리르의 뒤를 쫓아가 그를 다시 붙잡은 그때였다.
녹스와 눈이 마주친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아직 전진 기지를 떠나지 않은 녹스와 데미안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가워라. 아는 얼굴이 둘이나 있네?”
녹스가 해맑게 웃으며 우리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녹스와 거리가 멀다는 점이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도망칠 기회는 없을지도 몰라!
더 늦기 전에 조명탄을 쓰고 도망치려고 했으나, 펠리르가 내 손목을 잡아 붙들었다.
펠리르에게 붙잡혀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나는 작게 외쳤다.
“뭐 하는 거예요, 펠리르 씨!”
“아직이야.”
“아직……이라뇨?”
의아하게 펠리르를 바라보던 나는 이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왜 단도를 꺼내 드는 거야?
펠리르가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마물, 우릴 만만하게 생각해서 방심한 상태야.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
문득 심장에 서늘한 느낌이 스쳤다. 펠리르는 정말로 지금 데미안을 죽일 생각인 거다.
펠리르의 말마따나 녹스가 방심하고 있긴 했다. 단번에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인데도 녹스의 작태는 여유롭기 그지없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저지를 일을 녹스가 눈치챈다면…….
‘나와 펠리르, 둘 다 죽고 말 거야.’
“잠시만요, 펠리르 씨. 아무리 생각해도 정면으로 맞서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날 믿어. 내가 신호를 줄 테니까. 그때, 녹스의 얼굴에 조명탄을 쏴.”
녹스의 얼굴에 조명탄을 쏘라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펠리르는 이미 결심을 굳힌 듯했다.
다시 펠리르를 말려보려는데, 어느새 녹스가 불과 몇 걸음 앞에 다가와 있었다.
“둘 다 내가 사냥을 실패한 인간들이잖아? 그런데 이번엔 알아서 먹잇감이 되어주러 오다니, 이것 참 신기한 일이지.”
녹스가 우리를 번갈아 보며 입꼬리를 비릿하게 끌어당겼다. 궁지에 몰린 사냥감을 훑어보듯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그런 녹스의 곁으로 데미안이 걸어왔다.
“이봐, 녹스. 시간 아까워. 다른 성가신 놈들이 오기 전에 갈 길이나 가자.”
“아아, 넌 저 여자가 누군지 아직 모르는구나.”
“저 여자가 누군지 알 필요가 있어?”
데미안이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흘겨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행동에 위화감이 들었다.
‘분명 오늘 나를 ‘메이아’라고 불렀으면서, 왜 모르는 척을 하는 거지?’
데미안의 행동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여자가 테리투스가 제 딸이라 칭하는 인간이잖아.”
“신의 딸이라면, 메이아를 말하는 거야? 그런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있겠어.”
“데미안, 지금 내 눈을 의심하는 거야?”
녹스의 시선이 데미안에게 돌아가자, 펠리르가 나를 가볍게 툭 쳤다. 내게 보낸다고 했던 신호였다.
정말 펠리르가 말한 대로 하는 게 맞을까? 녹스가 조명탄에 맞은 사이에 정말 펠리르가 데미안을 단숨에 죽일 수 있을까?
찰나의 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조명탄을 꽉 쥐고 있는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한차례 녹스에게 쫓겨본 나로선 확신이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조명탄을 녹스에게 쏜다면, 빛이 금방 소멸해 도망이 쉽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역시 펠리르의 계획을 따르면 안 돼.’
나는 들고 있던 조명탄의 입구를 하늘로 조준했다. 그런 나를 보고 당황한 듯한 펠리르의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조명탄의 바닥을 주먹으로 강하게 올려쳤다.
피유우웅-!
조명탄이 하늘 위로 빛줄기를 그리며 쏘아진 그 순간,
“도망쳐요!”
펠리르를 향해 다급히 외친 나는 몸을 돌려 달렸다.
녹스가 본체를 드러낼 수 없는 시간은 5분에서 길어 봤자 10분. 그 짧은 시간 안에 도망쳐야 했다.
펠리르도 마지못한 듯 결국 나를 따라 달렸다. 이미 조명탄을 하늘로 쓴 이상 펠리르의 계획은 무산된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아가씨! 동쪽이야! 동쪽이 북쪽 숲 경계와 가장 가까워!”
“네! 알겠어요!”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던 나는 펠리르가 가리킨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등 뒤로 데미안에게 무어라 외치는 녹스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다만, 달리기 직전에 봤던 장면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바로 내가 조명탄을 사용하는 순간, 녹스를 감싸 안고 뒤로 당긴 데미안의 모습이었다.
‘녹스를 감싸주려고 한 행동일까. 혹은 우리를 위한 행동이었던 걸까.’
데미안의 의중은 마지막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지금은 온 힘을 다해 달려도 부족할 때였다.
그렇게 펠리르와 함께 얼마나 달렸을까.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
제4 기사단은 라크하가 도착한 이후에도 북쪽 숲을 수색해야 한다고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명령을 최우선시하는 게 저희 기사단입니다. 공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제4 기사단의 단장, 렌타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정작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제4 기사단의 수색 임무는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했다. 이번에도 몰래 북쪽 숲에 잠입하여 수색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인티아의 기사들은 빈틈없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심지어 보초를 서지 않는다고 알려진 구역에서도.
그 탓에 아인티아의 기사들에게 포획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아인티아 공작까지 이곳에 있을 줄이야……!’
모든 게 예상 밖이었다. 그렇다고 하루를 꼬박 달려 도착한 곳인데,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요즘 실종 사건 때문에 제국이 흉흉한 걸 아시지 않습니까. 부디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협조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미간을 찌푸린 라크하가 낮게 한숨을 뱉으며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경의 이름이 뭐지?”
“……렌타 르케리드입니다.”
“르케리드 경, 그대는 실종 사건의 범인이 내 사유지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렌타는 잠시 움찔했다가 뒤이은 라크하의 말에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예! 그게 바로 제가 하려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작님께서도 북쪽 숲에 오신 거 아닙니까?”
어쩌면 실종 사건을 이유로 아인티아 공작이 북쪽 숲 수색에 협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라크하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어졌다.
“내가 북쪽 숲에 온 건 주기적으로 사유지를 점검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겨울처럼 시린 라크하의 눈빛이 렌타에게 향했다.
렌타는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순전히 기세만으로도 압도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방금 경의 발언은 아인티아 기사들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알고 있나?”
“아, 아닙니다! 실종 사건이 보통 사안이 아니다 보니 그렇습니다.”
“북쪽 숲에 잠입한 자네들을 포획한 게 아인티아의 기사들이다. 그깟 실종 사건의 범인의 출입 하나를 통제하지 못했을 것 같나?”
“……죄송합니다. 저희가 실수했습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 된 렌타는 결국 꼬리를 내렸다.
‘아인티아 공작이 저택으로 귀환할 때를 다시 노려야겠어.’
그때쯤이라면, 아인티아 기사단들의 철두철미한 경계도 한층 풀릴 것이었다.
보통 총 책임자가 있을 때 기사단의 군기가 가장 바짝 들어 있으니까.
지금 물러나면 수색이 늦어지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렌타는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우선 한발 물러났다.
제4 기사단이 철수하는 걸 확인한 후에야 라크하는 등을 돌렸다.
하늘이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생각보다 기사단이 쉽게 물러나지 않아 시간이 지체된 탓이었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으니 경비를 더욱 강화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라크하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기사단이 별안간 우뚝 멈춰섰다.
“저 빛은 뭐지?”
“전진 기지 쪽인 것 같은데…….”
기사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라크하는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섬광 같은 빛이 그새 더 어두운 색으로 물든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빛을 보는 순간, 라크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작게 욕을 읊조린 라크하는 단숨에 말 위로 올라타 기사들을 향해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최소 인원을 제외한 모두 당장 기지로 돌아간다!”
***
라크하는 밤하늘을 가득 메운 환한 빛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저 빛이 무엇인지 라크하는 알고 있었다. 펠리르가 메이아의 부탁으로 ‘조명탄’이란 것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이미 들었으니까.
메이아가 조명탄을 쓸 일은 단 두 가지 경우였다.
실수이거나, 위험한 상황에 놓였거나. 하지만 이미 해가 졌으니 전자일 경우는 드물었다.
“제길!”
낮게 욕설을 읊조린 라크하가 말고삐를 꽉 쥐었다. 최대한 전진 기지를 향해 빠르게 말을 몰고 있으나, 그거로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전진 기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1분 1초가 시급했다.
황실 기사단에게 조금의 트집도 잡히지 않으려다 일어난 사달이었다.
과격한 방법을 써서라도 진즉 황실 기사단을 쫓아냈어야 했는데.
불안하게 뛰는 심장박동이 시계의 시침 소리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자신을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만약 메이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짓이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금방 수습하고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자만이 라크하를 숨 막히게 했다.
“제발……!”
무사하길. 그저 오발이었다고 하며 평소처럼 환하게 웃고 있길.
어느덧 밤하늘을 밝게 비추던 조명탄의 빛이 점차 사그라들 때 즈음.
말을 탄 아인티아의 기사 여럿과 마주친 라크하는 황급히 말고삐를 당기며 멈춰 섰다.
“어딜 가려는 거지? 말을 전진 기지로 돌려라!”
“그쪽으로 가면 안 된다고 합니다.”
“지금 누구의 명령이 우선인지 모르는 건가.”
끝까지 버티고 서 있는 기사들을 보며 라크하가 으르렁거리듯 말하던 그때였다.
“잠시만요!”
라크하의 앞을 막고 있는 기사들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뒤 라크하는 기사들 틈으로 나타난 사람을 발견하고 맥이 탁 풀리는 느낌에 숨을 내뱉었다.
“……메이아.”
***
메이아와 펠리르가 떠난 전진 기지에는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데미안이 당기는 바람에 뒤로 넘어진 녹스는 이를 까득 깨물었다.
“데미안,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이미 메이아와 펠리르는 숲속으로 도망쳐 시야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본체로 쫓아간다면 붙잡을 수 있겠지만, 하늘을 가득 메운 빛 때문에 그것마저도 불가능했다.
코앞에서 사냥감을 놓친 녹스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오싹. 소름 끼치는 기운이 데미안의 주변을 휘감았다.
하지만 데미안은 가까스로 그 기운을 견디며 태연한 얼굴로 녹스가 제게 했던 말을 돌려줬다.
“구해줘서 고맙다고 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화났어?”
“구해줬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믿을 것 같아?”
“저 여자가 너한테 이상한 물건을 쓰려고 했잖아. 그래서 감쌌던 것뿐이야.”
데미안은 메이아가 조명탄을 하늘로 쏘려고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뻔뻔하게 나가야 했다.
데미안은 최대한 제 속내를 감추고 녹스와 마주했다. 녹스와 함께하기로 한 이후부터 어떤 일이 있든 의연하게 대처할 각오는 했다.
녹스가 그런 데미안을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긴 한숨을 뱉으며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흐트러트렸다.
“이번에는 넘어가지만, 앞으로는 나를 막을 생각하지 마.”
“물론이지. 나도 처음 보는 물건만 아니었어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어.”
“명심해, 누가 어떤 술수를 부리든 난 죽지 않아.”
“알겠어.”
이로써 메이아에게 받았던 은혜는 갚았다. 황실에서 쓰러졌을 때도, 그리고 아드리엔 저택에서 쓰러졌을 때도 자신을 구해준 사람은 메이아였으니까.
데미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녹스를 일으켜 세웠다.
“얼른 저 빛을 보고 다른 기사들이 오기 전에 벗어나자.”
녹스를 회유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오늘 북쪽 숲을 휘젓는 걸 막아야 했다.
그리고, 녹스를 통해 알아내야 할 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