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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책임질게 (110/136)


110. 책임질게
2022.11.18.


꿩은 궁지에 몰리면 몸은 내놓고 머리만 숨긴다고 했던가.

어쩐지 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랬으니까.

지금 일어난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라도 물속에 눈을 질끈 감고 내 머리를 콱 집어넣고 싶었다.


“뭘 가만히 서 있는 거예요! 나가! 나가라고요!”

양팔로 몸을 가리며 욕조에 주저앉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버럭 외쳤다.


“……!”

라크하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허둥지둥거리며 문을 닫고 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탄식을 흘렸다.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게 뭐야아…….”

괜히 수치사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이대로 얼굴이 익어버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울적하게 옷을 입는데, 계속해서 머릿속에 방금 있었던 일이 재생되며 암담해졌다.


“이걸 어쩌면 좋아…….”

속상하고, 착잡한 마음에 눈에 눈물인지 수증기인지 모를 습기가 찼다.

나는 글렀어. 이제 공작가에서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냐고. 아니, 그 전에 당장 라크하랑 파트라슈의 얼굴을 어떻게 봐.

자괴감에 빠져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니, 문 너머로 라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 내 불찰이야. 그대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길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곧장 뛰어왔는데. 목욕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라크하의 사과를 들어도 마음이 달래지지 않았다.

목욕을 하고 있는 동안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라크하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라크하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대를 책임질 테니 염려 말고.”

“……파트라슈 씨도 봤단 말이에요.”

“뭐?”

지금까지 말했던 목소리와 정반대로 험악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처리하고 오지.”

내가 뭘 들은 거지? 설마 파트라슈를 처리한다고? 순간 정신이 번뜩 든 나는 떨궜던 고개를 황급히 들었다.


“라크하, 잠시만요!”

다급히 라크하를 부르며 일어나 문을 열었으나,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라크하를 말리는 듯한 기사들의 괴성이 들려왔다.

***

그날 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뒤척이다 까무룩 잠든 것 같은데, 눈을 뜨니 해가 뜨고 있었다.

라크하는 늦은 새벽에 와서 잠깐 잠을 자고 나간 걸까. 이불에 라크하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이불을 끌어안으며 눈을 살며시 감았다.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다행인 것 같으면서도 어쩐지 조금 아쉽다.

요즘 들어서 라크하는 내가 잠들 때 왔다가 눈뜨면 이미 일어나서 없곤 했으니까.

대충 나갈 준비를 하고 방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간 순간이었다.


“시터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헉!”

뒤에서 들려오는 파트라슈의 목소리에 나는 기겁하며 돌아섰다. 파트라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어제 술 때문에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제가 시터님께 실수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네……?”

“어우, 그렇게 센 술인 줄 알았다면, 안 마셨을 텐데…… 덕분에 선발대로 출발도 못 했습니다.”

실수로 내 방을 들어왔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보아하니 정말 어제 있었던 일이 기억이 나지 않는 눈치이긴 했다.


“단장님, 후발대 인원들이 전부 모였습니다.”

“아아, 그래. 공작님께서는 선발대로 가셨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나?”

기사와 대화를 나누던 파트라슈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래, 어제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묻지 말자. 괜히 물었다가 파트라슈가 어제 있었던 일을 기억해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어제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단 한 명뿐이었다.


“공작님! 좋은 아침입니다!”

때마침 파트라슈가 내 등 너머를 보며 팔을 크게 흔들었다. 뚜벅뚜벅, 묵직한 부츠굽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긴장으로 몸이 굳었다.


“메이아, 저런 파렴치한 놈과 말을 섞지 않는 게-.”

라크하가 내 어깨를 잡는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하며 그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

라크하는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멍해 보였다.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기에 나는 서둘러 라크하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놀라서 그만…….”

어떠한 반응도 없는 라크하를 보며 초조하게 그를 불러보았으나,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며 라크하를 살피려는데, 펠리르가 우리 곁으로 반갑게 뛰어왔다.


“아가씨, 라크하! 다들 좋은 아침! 그런데 둘이 분위기가 왜 그래? 싸웠어? 그럼 오늘 아가씨는 나랑 같이 짐마차를 타고 가는 거야?”

“꺼져.”

내가 무어라 말하든 대답이 없던 라크하가 별안간 내 손목을 덥석 잡고 이끌었다.

그런 나를 향해 펠리르는 눈을 찡긋하더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걸 펠리르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사히 어색해질 뻔한 상황은 넘겼다. 아니, 넘겼다고 생각했다.

말 앞에 멈춰선 라크하가 나를 올려주려는 듯 내 허리를 향해 손 뻗으려다 멈칫했다. 무언가 망설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라크하의 손을 피했던 일 때문인가?’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더니. 아무래도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가 과한 반응을 보인 건 사실이니까.

나는 라크하의 양손을 잡아끌어 직접 내 허리에 갖다 댔다.


“올려주세요.”

 

 
라크하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입가에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러지.”

그러고는 능숙하게 내 허리를 감싸 안아 말 위로 올려주었다. 올라타자마자 말이 발굽을 구르며 투레질을 했다.


“어어?”

가, 갑자기 왜 그래? 당황해서 허우적대는데, 라크하가 재빠르게 뒤에 올라타 말을 진정시켰다.

나는 서둘러 라크하의 품에 파고들었다.

라크하의 몸이 살짝 굳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의 나에겐 낙마에 대한 공포가 더 컸기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

라크하와 함께 북쪽 숲의 전진 기지로 출발했다. 하지만 저택에서 출발할 때와는 다르게 어찌나 어색한지.

저택에서 여관까지 올 때는 데미안에 대한 설명이라도 들으면서 오긴 했는데, 지금은 무슨 일인지 라크하가 아무런 말도 없다.

물론, 어제와 오늘 라크하와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만…….

서로 오가는 대화가 없어 더 그런 것 같아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보았다.


“……어제 말이에요.”

“어제 일은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고 넘겨.”

“그, 그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버럭 외치며 라크하를 돌아보니, 당황한 듯 라크하가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그럼?”

내가 미쳤다고 직접 어젯밤의 목욕 사건을 꺼내겠어?

내가 꺼내려고 했던 화제는 따로 있었다.


“그…… 펠리르 씨가 타고 온 짐마차는 왜 늦게 도착했던 건가요?”

짐마차로 지나가기 험한 길은 산맥을 둘러서 온다고 듣긴 했다.

하지만 뒤따라오던 짐마차가 늦은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아침에 펠리르를 보니 큰일은 없었던 것 같았으나, 그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다.


“산맥을 둘러 오는 길에 제4 기사단을 발견해서 그들이 자리를 뜰 때까지 기다리느라 늦었다고 하더군.”

“제4 기사단이요?”

“황제 직속의 기사단이야. 주로 수색을 담당하는 기사단으로 알려져 있는데…….”

라크하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는지 하던 말을 멈추곤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는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입을 열었다.


“그대, 혹시 아드리엔 영애를 통해 들은 얘기가 없어?”

“네? 무슨 얘기요?”

“아드리엔 영애가 황제에게 녹스나 데미안에 관한 걸 물어봤다든가…… 하는 그런 것들.”

“레이나 님이 녹스에 대해 말했을 거라는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데미안이 쓰러졌던 날, 레이나가 황제를 만나서 물어봐야겠다고 한 걸 내가 말리긴 했으니까.


“그 여자 때문에 꼬리가 밟힌 건 아닐까 싶었는데, 그건 아니라는 건가.”

하지만 라크하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제4 기사단을 북쪽 숲으로 가는 경로에서 마주쳤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다른 임무 때문에 우연히 마주친 걸 수도 있겠지만, 나 역시 찜찜했다.

혹시나 제4 기사단이 녹스와 관련된 소식을 듣고 북쪽 숲으로 가는 건 아닐까 싶어서.


‘라크하도 그런 마음인 거겠지.’

나는 멀리 보이는 울창한 숲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

해가 중천을 넘어갔을 때 즈음, 북쪽 숲 전진 기지에 도착했다.

북쪽 숲은 제법 나무가 울창한 곳이라 낮인데도 그늘이 져서 조금 어둑한 편이었다.

밖보다는 서늘하긴 하지만, 아직 낮이라 덥고 습해서인지 다들 지쳐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녹스와 데미안을 해가 넘어가고 만난다고 했기에 아직 시간상 여유가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라크하는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녹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잠시 쉴 법도 할 텐데 능숙하게 기사를 다루며 쉴 틈 없이 돌아다니는 라크하가 대단했다.


“멋있다…….”

나도 뭐 도와줄 일이 없으려나? 가능하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애초에 라크하를 위해서 여기에 온 거니까.

사실 이전부터 도와주고 싶긴 했으나, 라크하가 말려서 못 도와줬던 참이었다.

무엇보다 녹스는 엄연히 나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뭐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기 위해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잠시 휴식하는 듯 나무 아래에 늘어져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배고프다. 이제 점심시간인데, 식량은 언제 배급되는 거야.”

옳거니. 식량을 나눠주는 걸 도와주면 되겠구나.

때마침 짐마차도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후다닥 펠리르가 타고 있을 짐마차로 다가갔다.


“펠리르 씨!”

“어어, 아가씨 무슨 일이야?”

“지금 식량을 나눠줄 준비하실 거죠? 제가 도와드릴게요.”

“괜찮은데…… 뭐, 도와준다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지.”

펠리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식량을 배급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나는 펠리르와 함께 식량을 분배해서 기사들에게 배급해 주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나를 보고 당황한 듯하면서도 이내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내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뇨, 힘든 일도 아닌데요. 기사님이야말로 늘 고생이 많으셔요.”

“메이아 님께서 저희를 위해 이런 일도 마다하지 않으시다니, 역시 다정하신 분입니다.”

별거 아닌 일인데도 쏟아지는 기사들의 칭찬에 낯뜨겁던 때였다.

누가 내 이름을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이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구속구에 손이 묶인 채 기사들에게 잡혀 있는 데미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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