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손끝에 뭉개진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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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손끝에 뭉개진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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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손끝에 뭉개진 입술
2022.11.14.
시야가 차단되자 모든 신경 세포가 깨어나듯 감각이 예민해졌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리고, 그의 체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 정도로 위험한 향이었다.
이제 촛대가 떨어져 위험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이 남자가 위험한 것 같다.
“……이러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걸요.”
허리에 닿은 그의 손이 유독 의식되었다. 더없이 뜨겁고, 큼직하게 느껴져서 기분이 자꾸만 이상해졌다.
“따로 봐야하는 거라도 있는 걸까?”
라크하가 의식된다고 말하기엔 혹시 나만 의식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부끄러웠다.
“라크하의 얼굴을 못 보잖아요.”
“음…… 얼굴은 꼭 눈으로 봐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라크하가 내 손목을 잡더니 위로 올렸다. 손끝에 그의 이마 위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이 닿았다.
이어서 라크하가 내 손을 아래로 내리자 남자다운 눈썹과 시원하게 뻗은 눈매가 만져졌다.
여기에는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가 있겠지.
라크하의 얼굴 윤곽을 만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얼굴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정말…… 그렇네요. 신기해요.”
어쩐지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손을 아래로 내리자, 시원하게 뻗은 오뚝한 콧날이 만져졌다.
그리고 조금 더 손을 아래로 내리는 순간, 살짝 거칠고 말랑한 입술이 손끝에 닿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굶주린 듯한 라크하의 시선이 얼굴에 닿는 기분이 들었다.
꿀꺽, 목에서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까지 크게 소리가 날 줄은 몰랐던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 라크하 있잖아요.”
“응.”
어색하고 민망해서 무작정 입을 열긴 했는데, 머릿속이 새하얬다.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시야가 어둠 속에 적응되며, 어렴풋이 라크하의 얼굴이 보였다.
손끝에 뭉개진 입술. 그리고 뇌쇄적인 눈동자. 묘한 기류가 흐르는 어둠 속에서 보는 그의 얼굴은 유독 낯설었다.
쿵쿵,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귀를 메웠다.
홀린 것처럼 멍하니 라크하를 바라보는데, 그가 내 손가락을 지그시 깨물었다.
“……읏.”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감각에 전율이 일었다.
내 손가락을 가볍게 문 채 바라보는 라크하의 눈빛이 몹시 선정적이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이었다.
고개를 내린 라크하가 입술을 겹쳐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입속을 파고드는 달콤함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파도에 휩쓸리는 듯한 키스는 위험하고 아찔할 정도로 오래 이어졌다.
***
북쪽 숲으로 떠나는 날, 나는 쌍둥이들과 인사를 나눈 뒤 저택의 입구로 향했다.
그곳엔 단장인 파트라슈를 중심으로 몇 안 되는 기사들이 북쪽 숲으로 출발하기 전 채비를 하고 있었다.
북쪽 숲을 지키고 있는 기사가 있으니 소수의 정예부대만 데리고 간다고 듣긴 했는데.
‘데미안이 없었으면, 데려가지도 않았을 것 같네.’
기사들의 대부분은 데미안의 곁에서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주변에 레이나는 없는 걸 보아하니, 데미안이 따라오지 말라고 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라크하는 어디 있지?’
라크하가 보이지 않아 저택의 입구를 쓱 둘러보던 나는 짐마차 쪽에 있는 펠리르를 발견했다.
펠리르는 짐마차를 들여다보며 물품들을 확인해 보고 있었다.
‘내가 부탁한 물품도 준비했으려나?’
펠리르가 내가 부탁한 물품을 챙겨 주겠다고 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바쁠 테니 깜빡 잊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도 무척 바빠 보여서 선뜻 말을 걸기가 꺼려졌다. 말을 걸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그때였다.
내 시선이 느껴졌던 걸까. 펠리르가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아가씨! 아가씨가 부탁한 물품도 짐마차에 실어놨어. 도착하고 나서 줄게.”
“다른 업무 때문에 바빴을 텐데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뭘 그 정도로. 별것도 아닌 일인걸.”
“시터님!”
펠리르와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시롬이 나를 부르며 허겁지겁 달려왔다.
“시롬?”
급하게 뛰어온 건지 시롬이 숨을 고르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내게 살짝 몸을 숙여 작게 속삭였다.
“저, 정말 시터님께서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네, 라크하한테 못 들었나요?”
“오늘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도 모르는 곳에 정말 따라가시렵니까?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미 가기로 했는걸요. 제가 직접 가겠다고 한 거기도 하고요.”
내가 대답할 때마다 시롬의 얼굴이 조금씩 핼쑥해지는 듯한 기분이다.
“주위 눈을 피해서 가야하니 마차도 못 타고 가실 텐데, 말은 탈 줄 아십니까?”
“정말요? 말은 타본 적이 없는데…….”
살면서 말을 타본 적이 없기에 곤란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이 고민하고 있으니 시롬의 눈이 번뜩였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저택으로 돌아갑시다! 아가씨와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제야 나를 말리는 시롬의 목적을 알 것 같다. 내가 없으면 쌍둥이들에 대한 책임은 시롬에게 위임되니까.
시롬은 쌍둥이 중에서도 특히 아이샤를 다루기 힘들어하는 것 같긴 했지.
조금 안타깝긴 하지만, 나는 라크하를 위해서라도 가는 방향 쪽으로 마음을 굳힌 참이었다.
“저기에 있는 짐마차를 타고 가면 되겠네요.”
“짐마차를 타게? 그럼 나랑 같이 타면 되겠네. 덕분에 가는 길이 지루하지는 않겠다!”
나와 펠리르의 대화에 시롬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시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그런데 왜 시롬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지는 것 같지?
의아한 것도 잠시였다.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아 당기자 몸이 뒤로 끌려갔다.
뒤에서 나를 안은 라크하가 경계 가득한 눈으로 시롬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이서 어떤 대화를 그렇게 살갑게 하고 있는 거지?”
라크하의 물음에 시롬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게 보였다.
무슨 용건으로 날 찾아왔는지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지금껏 시롬과 쌓은 친분을 생각해서 대변해 주었다.
“제가 말을 탈 줄 몰라서 어떻게 할지 시롬과 의논하고 있었어요.”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라크하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시롬의 어깨를 두드려줬던 내 손을 얽어맸다.
라크하의 눈빛에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지만, 나는 모른 척하며 하던 말을 이어갔다.
“정말이에요. 그래서 펠리르 씨와 함께 짐마차를 타고 가기로 했는걸요?”
라크하의 시선이 펠리르에게 향했다.
펠리르가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라크하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대는 나와 함께 말을 타고 갈 거야. 자, 가자.”
“네? 말이요?”
라크하랑 같이 말을 타고 간다고? 괜찮을까? 라크하와 말을 타는 장면을 상상해 보니 은근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음, 좋아요. 그렇게 할까요?”
하지만 나는 금세 그 결정을 후회했다. 라크하와 함께 말 앞에 도착한 나는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말이…… 이렇게나 컸던가?’
그러고 보니 나, 가까이에서 말을 보는 건 처음이었지?
내 덩치의 3배 정도는 되어 보이는 말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레 겁이 났다.
만약 탔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최소 사망이다!
라크하를 따라가겠다고 할 때도 살아나지 않았던 위기의식은 이상한 곳에서 피어올랐다.
“라크하, 아무래도 저는 짐마차를 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말이 제가 싫대요.”
“그게 무슨 소리지?”
“저기 커다랗게 부릅뜬 눈을 봐요. 제가 마음에 안 드는 게 틀림없어요.”
나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등 뒤로 라크하의 몸이 닿아오며, 도망치려는 내 시도는 단번에 무산되었다.
“미안하지만, 그 꼴은 내가 못 보겠어서.”
라크하가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순식간에 말안장 위에 앉혀주었다. 땅에 달라붙어 있던 두 발은 어느새 공중에 떠 있었다.
“허, 허억!”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춰 말의 목을 끌어안았다. 까마득한 발밑을 보니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곧이어 내 뒤에 올라탄 라크하가 목을 끌어안고 있는 내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힘 빼고, 자연스럽게 상체를 세워.”
입술이 귀에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부드러운 어조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떠, 떨어지면 어떡해요……!”
“내가 잡아줄 테니 걱정 마.”
차분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에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그러자 안정적으로 내 팔을 붙들고 있는 커다란 손이 보였다.
그래, 라크하가 있으니 괜찮을 거야. 나는 그제야 천천히 심호흡하며 라크하가 말한 대로 움직였다.
“그렇지. 손은 이렇게 고삐를 잡으면 돼. 몸은 나한테 편히 기대고.”
라크하가 내가 고삐를 쥘 수 있도록 도와주며 다른 손으로는 내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등 뒤로 빈틈없이 포개진 그의 단단한 몸이 느껴지며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어쩜 이 남자와 하는 스킨십은 도통 적응이 되지 않는 건지.
내 후드를 씌워준 라크하는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찬 뒤 저택 주변으로 천천히 몰았다. 내가 말에 적응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영 힘들면 말해. 그때는 짐마차로 가도 말리지 않을 테니까.”
“……네, 알겠어요.”
나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고 고개를 떨군 채 작게 대답했다.
대답은 알겠다고 했지만, 짐마차로 갈 일은 아마 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 라크하와 함께 바짝 붙어 있는 게 좋아서.
***
반나절 동안 달리고, 휴식하고 또 달려 해가 저문 늦은 밤이 되어서야 우리는 마을의 여관에 도착했다.
규모는 작지만 깔끔한 여관이라 하룻밤 머물기에는 적절했다.
여관에 도착해서 짐을 풀자마자 다들 굶주린 배를 채우기 급급했다.
반면, 라크하는 생각보다 짐마차가 늦어진다며 무슨 일이 생겼는지 직접 확인해보고 오겠다며 떠났다.
‘기사들을 배려해서 그런 거겠지만, 식사라도 하고 가면 좋았을 텐데.’
라크하가 떠나자 나는 파트라슈와 기사들 사이에 둘러싸여 불편한 식사를 하게 되었다.
“하하하! 줄곧 시터님과 대화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시터님께서는 공작가의 전설! 아니십니까.”
“네……? 제가요?”
“우리 아가씨와 도련님은 순한 양으로! 공작님은 희대의 사랑꾼으로 만드신 공작가의 전설……!”
“단장님, 이러다 큰일 나십니다. 말조심 좀 하십시오.”
파트라슈가 무어라 할 때마다 주변에 있는 기사들이 사색이 된 채 그를 말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술에 취한 파트라슈를 말리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여관 주인이 서비스로 준 샷 두 잔 정도만 먹었던 것 같은데…… 도수가 생각보다 셌던 모양이었다.
‘저기에 휘말리기 전에 일어나는 게 좋겠지?’
가만히 있다간 파트라슈에게 붙잡혀 라크하가 올 때까지 옴짝달싹 못 할 게 뻔했다.
밖에서 오랫동안 말을 타고 다닌 탓에 피곤했던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다들 편히 식사하시면서 쉬세요.”
기사들에게 인사를 한 나는 방으로 올라가기 전, 여관 주인에게 목욕물을 부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관 주인은 목욕물을 준비해주었다.
사람 한 명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은 나무 욕조였지만, 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아아…… 좋다.”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 들어가자 몸이 나른해지며 뭉쳐 있던 근육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말을 타고 오느라 한 자세로 오래 있었더니 몸이 뻐근하긴 했다.
‘그래도 이제 조금만 더 달리면 북쪽 숲 전진 기지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했었지?’
출발 시각은 7시라고 했었고…….
내일이면, 녹스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긴장되었다. 리베르탄에서 녹스에게 잡아먹힐 뻔한 이후로 처음 보는 거긴 하니까.
“……아무런 일도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짐마차의 상황을 살피러 간 라크하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눈을 감고 있던 때였다.
문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의아해서 고개를 든 그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며 커다란 덩치의 파트라슈가 들어왔다.
“어우, 여기가 내 방이라고 했었던가아……? 으응?”
“…….”
너무 놀라면 사람이 아무 생각도 안 난다더니. 정말이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멍하니 파트라슈를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 소리를 질렀다.
“꺄악!”
“으, 으아악! 죄, 죄송합니다아악!”
내 비명에 깜짝 놀란 파트라슈가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미, 미쳤어! 어쩌면 좋아! 수치심에 그대로 물에 코를 박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니지, 일단 옷을 입는 게 먼저야.’
비명 소리를 듣고 누가 올지도 몰랐다.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하지만, 수치심은 한 번으로 족했다.
옷을 입기 위해 허둥지둥 욕조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벌컥.
또다시 문이 열리며 누가 뛰쳐 들어왔다.
“메이아! 무슨……?”
“…….”
언제 돌아온 건지 모를 라크하가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