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이제 위험한 게 없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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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이제 위험한 게 없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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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이제 위험한 게 없는 것 같아?
2022.11.11.
나는 서둘러 다이닝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펠리르와 대화를 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된 참이었다.
그래서 결국,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늦게 다이닝룸에 도착하게 되었다.
“미안해, 얘들아. 내가 조금 늦었지?”
쌍둥이들에게 사과하며 다이닝룸에 들어오던 나는 라크하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라크하도 와 있었네요?”
최근 들어 같이 식사하는 일이 없어서 오늘도 그럴 줄 알았는데.
내일 저녁이면 북쪽 숲으로 떠나야 하니 쌍둥이들과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보내려고 온 걸까?
역시 아닌 척하면서도 쌍둥이들에게 다정하다니까. 나는 라크하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오래간만에 다 같이 식사도 하고 좋네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들 왜 이렇게 반응이 없어? 매번 나와 만날 때마다 열렬하게 반겨주던 쌍둥이들도 조용했다.
‘내가 오기 전까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의아하게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 라크하가 식기를 들더니 무덤덤하게 말했다.
“다들 배가 고플 텐데 우선 식사부터 하지.”
“그래, 얘들아. 배고프지?”
가라앉은 분위기를 풀고자 나는 일부러 더 활짝 웃었다.
하지만 불같은 성격의 아이샤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이샤가 살벌한 얼굴로 쿵, 테이블을 내리치며 일어났다.
“그럼 언제 대답해줄 건데!”
“맞아, 이런 식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델카인 역시 단호한 눈으로 라크하를 바라보았다.
대체 내가 오기 전까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지? 델카인까지 강경하게 나가는 일은 잘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얘들아, 뭐 때문에 그러는 거야?”
“언니랑 오빠가 둘이서만 북쪽 숲에 간다며! 북쪽 숲이라니 듣기만 해도 멋있잖아! 그런 곳을 둘만 간다고?”
아이샤의 물음에 나는 멈칫했다. 북쪽 숲에 간다는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쌍둥이들을 타일러 보겠다고 말했지만, 북쪽 숲에 대해서 언급할 생각은 없었다.
선대 공작 부부와 얽혀 있는 곳이니까.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아직 쌍둥이들에게 며칠간 저택을 비운다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라크하가 먼저 말을 꺼낸 눈치는 아니었다.
“그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방금 델카인한테 들었지!”
“미안, 형이랑 형수님 얘기가 문밖으로 들렸어.”
아이샤와 내기를 한 뒤 우리를 찾으러 왔다더니 그때 들은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마차에서는 왜 대화를 피하려고 했던 거지?
델카인이 아이샤와 상의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면, 굳이 대화를 뒤로 미룰 필요가 없었다.
“역시 나랑 델카인을 두고 둘이서만 놀러 가려고 했던 거지?”
무언가 이상하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이샤의 오해를 푸는 게 우선인 것 같았다.
“그곳에 꼭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며칠간 다녀오려는 거야. 우리 아이샤는 전에도 잘 기다렸으니까, 이번에도 그래 줄 수 있지?”
“으음…… 언니가 그렇게까지 얘기한다면야. 대신 빨리 와야 해!”
아이샤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에게 믿음이 생긴 걸까? 예전이라면 내가 돌아오지 않을까 먼저 걱정했을 텐데.
이제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함께 지내온 시간 속에서 믿음이 생긴 거겠지.’
더불어 아이샤가 한층 성장한 것 같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대로 며칠간 저택을 비우는 일에 관한 얘기는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형, 혹시…… 다시 돌아오는 거야?”
다시 온다니? 델카인이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아이샤도 마찬가지로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설마 언니랑 오빠가 우릴 두고 안 돌아온다고 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북쪽 숲에…….”
“델카인, 그만.”
여태껏 잠자코 있던 라크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괜히 내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는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하고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하지만 델카인은 라크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제 할 말을 이어갔다.
“형, 어젯밤 내내 생각해 봤어. 하지만 역시 그건 싫어. 나도, 아이샤도 이제야 행복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델카인이 어째서 오늘 강경하게 나온 건지, 왜 대화를 미룬 건지 알 수 있었다.
델카인은 선대 아인티아 공작 부부가 북쪽 숲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째서 우리가 선대 공작 부부를 데려온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의아했다.
그때, 드르륵하고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나더니 라크하가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지.”
결국, 라크하와 델카인은 식사도 하지 못한 채 다이닝룸을 나갔다.
아이샤는 그 둘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델카인은 늘 괜한 걱정을 한다니까. 과거로 어떻게 돌아가? 그치, 언니?”
아이샤는 북쪽 숲에 선대 공작 부부가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그러게.”
나는 아이샤의 말에 대답해주면서도 어쩐지 착잡한 마음에 두 사람이 나간 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
다시 돌아온 델카인은 울고 오기라도 한 듯 눈 밑이 붉었지만, 다이닝룸에서 봤던 얼굴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아이샤가 있어서 어떤 얘기를 한 건지 물어보진 못했지만, 라크하와 얘기를 잘 나눈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는 북쪽 숲으로 떠나기 하루 전날, 델카인과 아이샤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산책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요리까지 하고 나니 해는 이미 산등 너머로 넘어가 있었다.
바쁘게 시간을 보낸 탓에 쌍둥이들은 각자 방에 들어가자마자 뻗어 잠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
“으으, 피곤해.”
목욕을 마치고 나온 나는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점심 때 있었던 일만 제외하고는 안온한 일상이 이어진 하루였다.
‘북쪽 숲과 관련된 얘기가 나왔을 때 라크하의 표정이 무척 안 좋아 보였는데…….’
어쩐지 조금 슬퍼 보이기도 했었지.
이전에 라크하에게 데미안에 관해 물어보면서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선대 공작 부부가 쌍둥이들을 건드리는 걸 참을 수 없어 금기의 흑마법을 써서 쫓아냈다고.
쌍둥이들에게도, 라크하에게도 선대 공작 부부는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신경 쓰이네.”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아직 방에 오지도 않고. 이러다 오늘 잠을 자러 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잠은 자는 게 좋을 텐데……. 걱정됐던 나는 결국 라크하를 찾아 나섰다.
당연히 라크하가 집무실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찾아갔으나, 그곳에는 뒷정리를 하고 있는 시롬만 있었다.
“공작님께서는 개인 서고로 가셨습니다.”
“개인 서고요? 혹시 어디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본관의 꼭대기 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꼭대기 층은 어두울 테니 초를 들고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나는 곧장 시롬이 알려준 위치로 향했으나, 금세 난관에 봉착했다.
“방이 뭐 이리 많아…….”
시롬에게 더 자세히 물어봤어야 했는데…… 어쩌면 좋지? 수많은 방을 둘러보며 고민하던 때였다.
살짝 열려 있는 방을 발견한 나는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긴가?’
얼핏 여러 개의 책장이 보이며 눅눅한 종이 냄새가 났다.
“……라크하?”
조그맣게 라크하를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방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한 번 둘러보고 없으면 나오면 되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로 옆에 고풍스러운 나무 계단이 보였다. 복층 구조로 되어 있는 방이었다.
나는 계단으로 올라가기 전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내가 이전에 갔던 서재에서 봤던 책과 다른 책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흑마법의 유래], [아인티아의 가계도], [마물의 사냥법], [데인저 숲의 역사]
왠지 라크하의 개인 서고에 있을 것 같은 책들이었다.
“라크하, 여기 있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여긴 아닌 건가?
방에서 돌아 나오려는데 익숙한 책이 눈에 띄었다. 촛불을 가까이 가져가 책 제목을 본 순간, 나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푸훗, 이 책들은 왜 여기 둔 거야?”
[즐거운 소풍], [우리 소풍 갈래요?], [엄마, 아빠. 우리 소풍 가요!]
라크하가 소풍 장소를 조사한다며 들고 왔던 책이었다.
태운 줄 알았는데, 여기에 뒀구나. 쌍둥이들과 소풍을 갔다가 식인 꽃 괴물에게 쫓겼던 때를 떠올리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킥킥 웃으며 책을 꺼내 보려던 때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웃고 있을까?”
“꺅! 어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촛대를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그전에 라크하가 내 촛대를 잡으며 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크, 큰일 날 뻔했네…….”
촛대가 바닥에 떨어졌다면 자칫 불이 붙었을 수도 있었기에 심장이 서늘했다.
라크하가 내 촛대의 불을 끄고 뒤에 있는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라크하의 손에 촛대가 하나 더 있었기에 어둡지는 않았다.
“깜짝 놀랐잖아요. 대체 어디 있었던 거예요?”
“그대가 뭘 하나 지켜보고 있었지.”
라크하가 계단 위를 가리키며 나와는 달리 차분하게 대답했다.
“못됐어요. 제가 라크하를 찾는 줄 알면 바로 나타나면 될걸.”
은근히 짓궂다니까. 내가 부루퉁한 얼굴로 쳐다보자 라크하가 살풋 웃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온 거야?”
“낮에 있었던 일이 신경 쓰여서요.”
내 대답에 라크하가 멈칫하더니 이내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 잘못으로 그대를 불편하게 만들었군.”
“라크하의 잘못이라뇨. 라크하가 뭘 잘못했다고요.”
“쌍둥이들은 선대 공작 부부가 제 발로 저택을 나간 걸로 알고 있거든.”
“아…….”
어째서 델카인이 선대 공작 부부가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오해했는지 이해가 갔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진실을 얘기해 줬다면 델카인이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았겠지.”
“오늘 델카인에게 전부 얘기해 줬나요?”
“……그래. 많이 놀란 것 같더군. 내 선택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역시 그냥 한 말이겠지.”
라크하는 여전히 선대 공작 부부에게 저지른 일에 대해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한 듯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아뇨, 델카인은 라크하를 이해하는 것 같았어요.”
“글쎄, 무슨 일이든 티를 내는 아이가 아니니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델카인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려 깊고 현명한 아이인걸요. 절 믿어 봐요. 제가 나름 온종일 애들 곁에서 붙어 지내는 시터잖아요.”
나는 라크하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일렁이는 촛불의 불빛 때문일까. 라크하의 얼굴이 어쩐지 붉어 보였다.
“……미치겠군.”
나직이 중얼거린 라크하가 힘을 주어 내 손을 꽉 잡더니 나를 끌어당겼다.
“앗!”
엉겁결에 그의 힘에 이끌려간 나는 속절없이 그의 넓은 품에 안겼다. 라크하가 들고 있던 촛불이 흔들렸다.
“위, 위험해요.”
나는 불안한 눈으로 라크하의 손에 들려 있는 촛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라크하가 입꼬리를 휘어 웃었다.
“그렇다면 불을 끄는 걸로 하지.”
후우.
촛불이 꺼졌다. 방은 순식간에 어둠이 깃들었다.
이윽고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한숨처럼 내려앉았다.
“이제 위험한 게 없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