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목숨과 관련된 일
(107/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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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목숨과 관련된 일
2022.11.07.
나는 레이나와 함께 응접실로 들어왔다.
라크하가 데미안과 대화를 하러 간 사이,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냐는 레이나의 부탁 때문이었다.
이참에 나는 레이나를 위해 들고 왔던 꽃을 챙겨 주었다.
그러자 레이나가 응접실에 있는 꽃병에 안개꽃을 꽂으며 내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대로 잃어버린 줄만 알았는데…… 정말 고마워요. 메이아 님께는 고마운 일투성이네요.”
“별말씀을요.”
혹시나 해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잊지 않고 챙겨뒀는데, 그러길 잘한 것 같네.
예쁜 꽃병에 담긴 안개꽃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것도 잠시였다.
문득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했던 레이나의 말이 떠오른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나가 내게 할 말이 있는 얼굴로 뭉그적거리고 있었다.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요?”
먼저 물어봐 주지 않으면 계속 머뭇거리고 있을 것 같았다.
“저…… 메이아 님은 신의 딸이시잖아요.”
“네? 네, 그렇죠.”
“혹시 그 마물을 해결할 다른 대책을 강구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내가 신의 뜻을 받든, 성스러운 능력을 발휘하든 해서 녹스를 해결할 수는 없겠냐는 걸 에둘러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말만 거창하게 신의 딸이지, 녹스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애초에 나는 키네스를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니까.
물론 테리투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이젠 신전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신전에서 테리투스가 제시한 방법도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방법들뿐이었다.
레이나는 내가 희생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레이나에게 알려준 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데미안이 녹스를 회유해 보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도 일이 잘못 틀어질 수도 있으니까…….”
의아해서 묻자니, 레이나가 힐끔 내 눈치를 보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무, 물론 저도 다른 방법을 찾아볼 거예요! 황제 폐하께서도 무언가 알고 계실 수도 있으니 기회가 되면 조심스럽게 여쭤보려고요.”
나는 레이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뜻밖의 인물에 멈칫했다.
“……황제 폐하께 여쭤본다고요?”
“네, 예로부터 제르디아 제국이 번성한 이유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황가의 신력 때문이라고 하잖아요. 녹스의 위치만 폐하께 알려드린다면-.”
“안 돼요.”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레이나의 말허리를 잘랐다.
키네스라면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 신력을 쓸 테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 축복의 의식을 내려야만 한다.
신력을 쓰고 쓰러진 황제를 방관했다간, 자칫 반역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는 문제니까.
제국의 황제의 위치란 그만큼 무시할 수 없었다.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지금까지 어떻게든 그 상황을 피하려고 온갖 고생을 했으니 레이나를 막아야만 했다.
“황제 폐하께서 데미안이 녹스를 소환했다는 걸 알게 되신다면, 데미안을 가만히 둘 것 같나요?”
“그, 그건……!”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는지 레이나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레이나는 망설이는 듯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인 후에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숨기면 되지 않을까요?”
“숨긴다고요?”
레이나가 홧김에 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날 선 말이 튀어나왔다.
내 목숨과 관련된 일인 탓일까. 이번만큼은 레이나를 배려하기 힘들었다.
레이나가 입술을 꾹 깨물더니 탄식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가 이기적이라는 거 알아요!”
레이나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하지만, 하지만! 더는 제 사람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제 사람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다니. 어쩐지 기분이 씁쓸했다.
“저는 레이나 님의 사람에 포함되어 있나요?”
“네……?”
내 물음에 레이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어째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한 건지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물론이죠. 메이아 님은 처음으로 저를 편견 없이 봐주신 분인걸요.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레이나가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나를 바라보는 레이나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렸다.
혹여나 나를 잃진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사실 레이나 님께 말씀드릴 게 있어요.”
***
레이나는 키네스의 신력과 축복의 의식에 대한 설명을 듣고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렸다.
“메이아 님께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요. 세상에,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흐어엉.”
“레이나 님, 저는 괜찮아요.”
내 일을 자기 일처럼 공감해 주면서 눈물을 흘리는 레이나를 보고 있자니, 서운했던 감정은 어디로 가고 가슴이 따뜻해지면서도 찡했다.
콧잔등이 시큰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려던 찰나였다.
“……둘이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라크하가 문가에 서서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와 레이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어…… 음, 사정이 있었어요. 데미안이랑은 어떻게 됐나요?”
나는 언제 울려고 했냐는 듯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손으로는 꾸준히 레이나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그 녀석과 함께 북쪽 숲으로 가기로 했어. 거기까지 가는 데 하루는 족히 걸리니 모레쯤 출발할 거야.”
라크하의 목소리는 일상적인 얘기를 하듯 단조로웠으나, 그 내용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북쪽 숲이라면, 선대 아인티아 공작 부부가 있는 곳이잖아. 그곳을 데미안과 함께 간다고?
“북쪽 숲에는 왜 가는 거예요?”
“녹스와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더군.”
북쪽 숲을 간다는 소식도 경악스러운데, 거기서 녹스를 만나기까지 한다니.
그렇게 위험천만한 곳에 라크하가 간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선득해졌다.
데미안이 녹스와 일을 꾸미려고 라크하를 그곳으로 부른 거라면? 그래서 라크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저도 라크하, 당신과 함께 가겠어요.”
상대의 목적과 속셈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라크하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라크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위험한 곳에 그대를 데려갈 순 없어.”
“힘을 무리하게 써서 전처럼 환각이라도 보면 어떡해요. 제 능력이 필요할 수도 있어요.”
“녹스만 날뛰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 말은 결국 라크하도 힘을 무리하게 쓰는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네요.”
이번에는 돌아오는 대꾸가 없었다. 한참 동안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라크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가 신전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택을 비운다면 쌍둥이들이 불안해할 거야.”
“저희가 저택을 비워도 아무 문제가 없도록 제가 쌍둥이들을 잘 타일러 볼게요.”
게다가 데미안과 녹스가 전부 북쪽 숲에 있을 테니 나와 라크하가 저택을 비운다고 해도 쌍둥이들이 위험할 염려도 없었다.
이미 결심을 굳힌 듯한 내 모습에 라크하는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럼, 쌍둥이들을 잘 타이른다면 함께 북쪽 숲으로 가는 걸로 하지.”
라크하와 어느 정도 합의를 봤을 무렵, 내게 안겨 있던 레이나가 천천히 손을 위로 들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저도 함께 가도 되나요?”
“그쪽은 데미안과 얘기하지그래.”
라크하는 레이나가 뭘 하든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지.”
라크하가 나와 레이나 사이를 갈라놓은 뒤 나를 잡아 문가로 이끌었다.
문을 열자, 문 앞에 서 있는 델카인이 보였다.
“어라? 델카인, 언제 왔어?”
델카인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허둥지둥거리며 몇 발자국 물러났다.
“바, 방금 막 왔어. 아이샤랑 가위바위보를 해서 졌는데 형수님이랑 형을 데리러 오라고 하더라고. 얼른 가자. 집에 가고 싶어.”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은 델카인이 내 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쌍둥이들에게 며칠간 저택을 비운다는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내 보았다.
“얘들아, 할 말이 있는데…….”
“아아, 피곤하다. 형수님, 내일 얘기하면 안 될까?”
하지만 델카인이 화제를 돌리며 내 말은 가로막혔다.
“왜, 왜? 뭔데?”
“아이샤, 너도 아까 피곤하다고 했잖아.”
아이샤는 궁금한 듯 되물었으나, 이번에도 델카인이 아이샤의 말을 차단했다.
라크하도 그런 델카인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지만, 델카인은 졸린다며 눈을 감고 내게 기대었다.
“언니 무릎은 내 자리야.”
아이샤가 위기감을 느낀 건지 후다닥 델카인을 따라 내 무릎에 벌러덩 누웠다.
‘미리 얘기를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쌍둥이들은 나와 대화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언제 얘기를 꺼내 보지? 기회를 엿보려고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샤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든 쌍둥이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나도 졸음이 쏟아졌다.
연신 하품을 하는 나를 보며 라크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가에 도착하려면 조금 더 가야하니 그대도 눈을 좀 붙여.”
“……그럼 조금만 잘게요.”
졸렸던 참이기에 나는 라크하에게 양해를 구한 뒤, 쌍둥이들과 함께 잠이 들었다.
그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몸이 살짝 흔들리는 걸 느끼며 몽롱한 눈을 떴다.
“많이 피곤했을 텐데, 푹 자.”
하지만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다시금 눈이 감겼다.
얼핏 라크하의 얼굴을 본 것 같은데, 깨어나 보니 다음 날이 되어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곧 있으면 점심 식사 시간이었다.
다이닝룸에서 기다리고 있을 쌍둥이들을 생각하며 서둘러 문밖을 나선 그때, 의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펠리르 씨?”
요즘 방에서 연구에만 매진한다고 들었는데, 어쩐 일이지?
“조금만 늦었으면 아가씨를 못 볼 뻔했네. 아가씨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온 거거든.”
“저한테요?”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펠리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펠리르의 손바닥 위에는 영롱한 빛을 내는 돌멩이 세 개가 올려져 있었다.
“라크하를 통해서 들었는데, 녹스가 빛에 약하다며? 혹시 녹스가 어느 정도 세기의 빛에 반응을 보였는지 기억나?”
나는 펠리르의 손 위에 있는 돌멩이를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돌멩이마다 광도가 달랐다.
“음…… 밝기는 크게 상관없었던 것 같았어요.”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녹스는 자그마한 빛에도 고통스러워했었다.
펠리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더니 돌멩이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다행이네. 광도가 높은 건 하루 만에 많이 확보할 수 없어서 걱정했거든.”
“내일 쓰려고 준비하는 건가요?”
“응, 라크하가 내일 북쪽 숲으로 출정하는 기사들에게 하나씩 나눠주라고 하더라고.”
녹스가 사람들을 잡아먹거나 몸을 차지하려면 본체를 드러내야 하니 그 점을 노린 듯했다. 녹스의 본체가 빛에 약하긴 하니까.
‘라크하는 이런 것까지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구나.’
나도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뭘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왕이면 내 몸을 확실하고 보호할 수도 있고, 라크하를 도울 수 있기까지 하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번뜩 떠올랐다.
“펠리르 씨, 혹시 저도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