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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참지 않아도 돼 (104/136)


104. 참지 않아도 돼
2022.10.28.


스르륵.

드레스 자락이 그의 손짓을 따라 천천히 조금씩 올라갔다.

맨살에 닿을 듯 말 듯한 손길이 애가 탔다.

이윽고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끝이 연한 살갗을 스쳤을 땐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묘한 신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내 모습을 눈치챈 걸까. 등 뒤로 라크하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참지 않아도 돼.”

“……웃지 마요.”

나는 부루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라크하가 웃을 때마다 목덜미에 닿는 숨결에 몸이 움찔거렸다. 그의 손길, 목소리 하나하나가 뜨겁고 자극적이었다.

이윽고 목덜미 위로 그의 입술이 닿은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려고 했으나 라크하가 내 허리를 꽉 붙들었다.


“어차피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못 들어와.”

“하, 하지만 누구인 줄 알고요.”

“시롬이겠지.”

“시롬이 밖에서 기다리게 둘 순 없잖아요.”

엄연히 지금은 업무시간인데…….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시롬이 신경 쓰여 문을 흘긋거리자 라크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키스해줘. 그럼 놓아줄게.”

당황한 나를 보며 라크하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살짝 풀어 헤쳐진 크라바트. 단정하게 꼭 잠겨 있는 하얀 셔츠. 금욕적인 모습과 달리 느른한 보라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목덜미가 후끈해졌다.

침실에서 보던 모습과 다른 분위기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기묘한 기류가 흐르던 그때였다. 집무실 문 너머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없는 척하지 마! 안에 있는 거 다 알거든!”

저 까랑까랑한 목소리의 주인은 아이샤가 분명했다. 예상치 못한 아이샤의 방문에 라크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런.”

제 허락 없이는 아무도 못 들어온다고 호언장담할 때는 언제고, 곤란해하는 라크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하네요.”

“…….”

“키스는 나중에 해드릴게요.”

찡그린 라크하의 미간에 입을 가볍게 맞추고 일어나려는데, 라크하가 내 턱을 붙들어 입술을 겹쳤다.

부드럽게 맞닿은 입술은 달콤했다. 하지만 그 달콤함을 온전히 누리기도 전에 입술이 떨어졌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방해꾼 때문이었다.


“언니! 오빠!”

나는 차마 아이샤를 바라보지 못하고 허공을 바라보며 얼굴에 손 부채질을 했다.

갑자기 훅 오른 체온 때문에 얼굴을 식힐 필요가 있었다.


“아이샤, 함부로 열고 들어가면 안 돼!”

델카인이 무작정 집무실로 들어온 아이샤를 붙들었다.


“어차피 너도 답답했잖아!”

“답답한 거랑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건 다르지.”

“내가 참다가 병나면 네가 책임질 거야?”

둘이 사이가 좋은 것 같으면서도 눈만 마주치면 서로 아르릉거린다니까.

오자마자 말씨름을 하는 쌍둥이들을 보며 나는 한숨을 작게 내뱉었다.


“그래서 아드리엔 남작가를 들렸다가 언제쯤 돌아오려고?”

라크하는 옥신각신하는 쌍둥이들이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아직 마무리를 짓지 못했던 얘기를 다시 꺼냈다.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출발하면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요.”

“뭐야, 언니 외출해?”

별안간 아이샤가 나를 휙 돌아보며 물었다.


“어, 어? 응. 레이나 님을 뵙고 오려고.”

반짝거리는 아이샤의 커다란 눈망울과 마주하자니 왠지 불안해졌다.


“잘 됐다. 안 그래도 나랑 아이샤도 형수님이랑 외출하고 오면 안 되냐고 물어보러 왔는데.”

델카인도 아이샤와 함께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언니, 나 요즘 수업도 엄청 잘 듣는데!”

“형수님, 안 나간 지 오래됐더니 우울해지는 것 같아.”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걸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우리도 같이 가면 안 돼?”

아이샤와 델카인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동시에 외쳤다.

이걸 어쩌면 좋지? 놀러 가는 거라면 아이샤와 델카인을 데려가겠지만, 지금은 레이나의 상태를 살피러 가는 거였다.

차마 쌍둥이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나는 라크하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라크하는 슬그머니 내 눈을 피했다. 그 순간,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설마 라크하가 일부러 쌍둥이들 앞에서 얘기를 꺼낸 건 아니겠지……?’

 

 

***

데미안은 레이나에게 몰래 선물을 주기 위해 아드리엔 남작가에 숨어 들어갔다.

하지만 데미안은 어느새 제 목적도 잊고 저택을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이야.”

모두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으나,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울렁거렸다.

데미안은 펄펄 끓는 열 때문에 가쁜 숨을 뱉어내면서도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지만, 제 몸 상태는 신경 밖이었다.

데미안은 자신과 관련된 흔적이 남아 있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부모님의 얼굴도 몰래 보고 싶었다.

타지를 방문하고 있는 건지, 저택에 있는 건지 몰라도 잠복해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안색이 안 좋은 얼굴과 달리 호박색 눈동자는 생기를 갖고 반짝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윽.”

데미안은 어지럼증을 느끼고 휘청이며 벽을 붙들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상황에도 무리하게 몸을 움직인 탓이었다.

그나마 저택에 고용된 사용인들의 눈에 띄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복도에 가만히 서 있다간 발각될 확률이 높았다.

데미안은 아무 방이라도 들어가 숨기 위해 허리를 세우려고 했다. 눈앞이 핑 돌지만 않았더라면.

데미안은 순간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무너져 앉았다.

깜빡, 깜빡. 데미안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이윽고 찾아온 건 암흑이었다.

***

사실상 아이샤의 고집도 꺾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델카인까지 합세하며 쌍둥이들을 두고 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결국, 나는 쌍둥이들을 함께 데리고 가는 대신 주의를 단단히 시켜야 했다.

이미 쌍둥이들에게 수없이 얘기하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마차에서 내리기 전 다시 확인했다.


“얘들아, 내가 뭐라고 했었지?”

“응? 뭘?”

“시끄럽게 하거나 싸우는 건 절대 금지라고 했어.”

곧잘 대답하는 델카인과 달리 아이샤는 불안하단 말이지…….

내가 끙하고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자, 아이샤가 내 눈치를 보더니 꽃다발을 번쩍 들었다.


“나는 이거! 온실 정원에서 따온 꽃을 주면 되지?!”

“으응, 그렇지. 언니 친구한테 정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조심해야 해. 알겠지?”

“응, 우리만 믿어!”

괜찮겠지? 나는 쌍둥이들에게 한 번 더 부탁한 뒤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아드리엔 남작가의 집사가 다가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환영합니다. 아인티아 공자와 공녀님, 그리고…… 메이아 님.”

집사는 나를 보고 멈칫했다가 금세 내가 누군지 눈치채고 빠르게 내 이름을 덧붙였다.


“갑작스러운 방문일 텐데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락하고 방문하려고 했는데, 답신이 없어서요. 혹시 레이나 님께서 저택에 계시나요?”

내 물음에 집사는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나 님께서는 황궁으로 가셔서 지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남작님과 부인께서도 잠시 타지에 방문하신 터라…….”

황궁? 레이나가 황궁에는 왜 간 거지?

의아함도 잠시 나는 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곤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키네스를 재워줬던 일 때문이겠구나.


“레이나 님께서 언제쯤 돌아오시는지 아시나요?”

“보통 황궁에 가시면 서너 시간 내로 돌아오시니 한 시간 정도 뒤에 오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시간이라…… 그 정도면 기다렸다가 레이나를 보고 가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가 레이나 님을 뵙고 갈게요.”

“그럼 응접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나는 기사들과 인사를 나눈 뒤 쌍둥이들을 이끌고 집사의 뒤를 따라갔다.

정문에서 저택까지 오래 걸리는 공작가와 달리 아드리엔 남작가의 저택은 작고 소박했다.

지나가면서 보이는 정원도 이렇게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화단에 가까웠다.

아드리엔 남작 부부가 과거 레이나의 동생을 찾아다니느라 재산을 탕진했다고 듣긴 했는데, 아직 그 돈을 메꾸기 급급한 모양이었다.


“꽃도 없는 정원은 처음 봐. 왜 그럴까?”

“여기 저택 주인이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나랑 언니는 꽃을 들고 왔는걸?”

아이샤의 반박에 델카인은 인생 최고의 난제를 받은 듯한 얼굴로 고뇌에 빠졌다.

쌍둥이들은 아드리엔 남작가의 재정 사정에 대해서 모르니 의아할 법도 했다.

순수한 호기심에 들떠서 수다를 떠는 쌍둥이들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내부로 들어왔을 때였다.

잠자코 저택을 둘러보던 아이샤가 무척이나 솔직한 감상평을 늘어놓았다.


“신기하다. 엄청 썰렁해.”

“새 단장을 하고 있나 봐.”

“얘들아…….”

한술 더 뜨는 델카인을 보며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이번에는 집사가 쌍둥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걷다가 우리를 힐끔거렸다.


“도련님께서 영리하시네요. 어쩌면 새 단장을 위한 준비라고 볼 수 있지요.”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우리를 안내해주던 집사는 델카인의 말을 잘 받아쳐 주었다.

그러고는 솔직담백한 쌍둥이들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훈훈한 분위기는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델카인만 칭찬하는 집사의 모습에 심기가 뒤틀린 아이샤가 눈을 치켜떴다.


“나도 알고 있었거든?”

 

 
살기가 잔뜩 어린 아이샤의 말투와 눈빛에 집사가 기겁하며 시선을 돌렸다.


“……예, 예.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응접실은 2층에 있습니다.”

집사가 도망치듯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런 집사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며 아이샤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이샤, 우리는 손님이니까 여기에 조용히 있다가 가야 하는 거야, 알겠지?”

“언니, 손님이란 건 원래 그렇게 재미없는 거야?”

“재미가 중요해? 형수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아이샤는 델카인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가도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얌전해진 아이샤를 보며 나는 한숨 돌렸다. 뭘 했다고 벌써 피곤한 기분이 든다.

아인티아 공작가로 돌아갈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꿈틀거렸다.


‘지금이라도 다음에 오겠다고 할까?’

진지하게 다시 고민하며 집사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던 때였다.

우리보다 앞서서 2층에 올라간 집사가 별안간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러는 거지? 집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2층 복도에 어떤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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