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너랑 함께하는 건 여기까지야
(10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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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너랑 함께하는 건 여기까지야
2022.10.17.
“테오 네리스가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공교로운 타이밍에 쿠르릉, 천둥이 치더니 조금씩 내리던 비가 거세게 퍼붓기 시작했다.
창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빗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창밖의 소음에 관심을 기울일 새가 없었다.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온몸을 타고 이제는 내 귀까지 울리는 기분이었다.
“……말도 안 돼.”
시체로 발견됐다는 건…… 테오가 죽었다는 거야?
테오가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죽어도 시체로 발견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테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건 녹스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녹스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시체’라는 흔적을 남긴 적이 없었다.
‘혹시 다른 사람을 테오로 착각한 게 아닐까?’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아직 테오를 구할 희망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기사의 보고는 상세했다.
“목격담에 따르면, 테오 네리스가 스스로 제 목을 졸라 죽었다고 합니다.”
“테오 네리스의 몸에는 녹스가 들어 있던 게 아니었나?”
“지금까지 해온 패턴과 다르긴 합니다만, 녹스의 소행은 맞는 것 같습니다. 검은 생명체가 그림자 속으로 숨어드는 걸 봤다는 증언도 있으니 말입니다.”
순간 발밑이 꺼지는 느낌이 들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림자 속으로 숨어드는 검은 생명체라면 분명 녹스였다.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적이 있으니까.
결국, 테오가 녹스와 관련되어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금세 또 다른 의문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녹스는 어째서 테오를 지금껏 해온 방법과 다르게 죽인 거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메이아 님, 왜 그러세요?”
그때, 등 뒤로 들려오는 레이나의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뒤돌았다.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레이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가 있는 데다가 천둥소리까지 겹쳐서 못 들은 걸까?
레이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살짝 열려 있는 문을 흘긋거렸다.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아, 그게…….”
선뜻 대답해주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라크하와 기사의 대화가 들려왔다.
“테오 네리스의 시체가 발견된 위치는?”
“비스퇴르가 광장을 중심으로 남동쪽에 위치한 골목입니다.”
때마침 거론된 테오의 이름에 레이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메이아 님, 제가 잘못 들은 거겠죠?”
레이나가 입꼬리를 힘겹게 끌어올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충격으로 물든 레이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졌다.
나조차도 믿기지 않는,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인데, 레이나의 심정은 어떨까.
“…….”
나는 착잡한 마음에 입을 다물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긍정이나 다름없는 대답이었다.
레이나가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레이나 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레이나를 잡을 새도 없었다.
늦게나마 서둘러 레이나의 앞을 막아서려는데, 기사들이 먼저 레이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 됩니다, 아드리엔 영애.”
“비켜주세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요!”
잔뜩 흥분한 채 기사와 대치하고 있는 레이나의 모습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친한 친구가 시체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이성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내가 똑같은 상황에 놓였어도 레이나처럼 행동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레이나를 보낼 수는 없었다.
녹스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였다간 위험했다.
“아직 사건 현장이 정리되지 않아 위험하니 지금은 가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쪽이 사람을 착각한 걸 수도 있잖아요! 테오가 아닐 수도 있어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레이나의 모습에 기사들은 꽤 당황한 눈치였다.
레이나와 친분이 있는 내가 나서려던 그때였다.
“비켜 달라니까요!”
비명과도 같은 레이나의 외침과 함께 그녀와 대치하고 있던 기사의 몸이 기우뚱 기울더니.
털썩.
레이나보다 한참이나 덩치가 커 보이던 남자가 순식간에 쓰러졌다.
거센 돌풍이 몰아치고 나간 것처럼 고요함이 감돌았다.
창문 밖으로 내리는 요란한 빗소리가 고요해진 공간을 가득 메웠다.
“……이 사람 꼴이 나고 싶지 않으면, 당신들도 비켜요.”
잔뜩 가라앉은 레이나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레이나의 앞을 막고 있던 기사들이 머뭇거리자,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라크하가 입을 열었다.
“아드리엔 영애.”
나는 잽싸게 라크하의 앞을 막아서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제가 레이나 님과 대화를 해볼게요.’
라크하가 나선다면 일이 커질 게 뻔했다. 그는 어떤 일이든 평범하게 넘어가진 않으니까.
후, 길게 숨을 내뱉은 나는 레이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레이나 님.”
내 부름에 레이나가 흠칫하더니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봤을 땐 몰랐는데, 레이나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레이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울먹거렸다.
“……메이아 님, 저 좀 도와주세요. 저, 테오한테 가봐야 한단 말이에요.”
애절한 레이나의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바늘로 콕콕 쑤신 듯이 찌르르 아파왔다.
“미안해요, 레이나 님.”
나를 바라보던 레이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어떻게든 다잡았다.
“정말 위험할 수 있어서 이렇게 보내드릴 수가 없어요.”
“……거죠?”
뭐라고 한 거지? 레이나의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레이나의 말을 들어주고 싶긴 하나 보는 시선이 많았다.
“제가 어떤 말을 해도 마음이 추슬러지진 않겠지만, 일단 진정하시고 저랑 잠깐만 얘기해요.”
자리라도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아 레이나를 이끌고 다시 응접실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탁!
레이나가 고개를 번뜩 들더니 거세게 내 손을 쳐냈다. 손등이 얼얼했다.
생각지 못한 레이나의 반응에 나는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레이나의 눈동자가 배신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메이아 님은…… 알고 계셨던 거죠?”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테오의 몸에 사람을 잡아먹는 마물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요.”
“……!”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레이나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당황한 표정을 차마 숨길 수가 없었다. 내 표정을 본 레이나가 제 입술을 짓이겨 씹었다.
“왜 미리 말씀해주시지 않으셨던 거예요?”
“……일부러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레이나가 슬퍼할까 봐, 모두 내 추측에 불과한 걸 수도 있으니까. 그랬던 거였다.
“진작 말씀해주셨다면, 테오가 죽는 걸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쿠르릉. 다시 천둥이 치며 창문으로 번쩍, 빛이 들어왔다. 나에 대한 원망을 담은 레이나의 눈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째서 전부 내 탓이라는 듯이 쳐다보는 거야?
그 눈과 마주하고 있자니 속이 뒤틀렸다. 억울함과 분노로 뒤엉킨 감정이 속을 마구잡이로 할퀴어대는 것만 같았다.
“그럼 테오가 죽는 일도 없었을 거라고요!”
레이나가 핏줄이 불거진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하, 하고 입 밖으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어떻게 보면 내가 원작을 뒤튼 탓에 벌어진 일이니 내 탓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제가 미리 말했다면 바뀌었을 것 같나요?”
“메이아 님께서 숨기지만 않으셨다면, 적어도 이런 식으로 아무것도 못 하고 무력하게 테오가 죽었다는 소식은 듣진 않았겠죠!”
레이나는 아무것도 모르니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거다.
그러니 감정적으로 동요할 필요가 없다는 걸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더니.
녹스와 데미안의 일로 마음고생을 했던 일이 떠오르자 울컥했다.
“전에 레이나 님께서 테오와 데미안과 만났다고 하셨죠?”
“그게 지금 얘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상관 있죠. 무척이나. 그때 레이나 님이 만났던 테오는 이미 마물한테 지배당한 상태였을 테니까요.”
“……!”
레이나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잘게 떨렸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그때 만났던 테오는…….”
고개를 내젓던 레이나가 멈칫하더니 숨을 삼키며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평소의 테오와 달랐던 점이 떠오른 듯했다.
“녹스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면서 사람을 잡아먹는 마물이에요. 그런 마물을 상대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녹스가 누구의 몸에 들어 있는지 알아내기도 힘든 게 현실이었다.
그 절망적인 상황을 레이나도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아…… 아아! 테오!”
레이나는 기어코 다시 눈물을 왈칵 흘리며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나는 차마 그 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쏴아아. 레이나의 마음을 대변하듯 비는 꽤 오랫동안 세차게 내렸다.
***
데미안은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센 비 때문에 흠뻑 젖은 옷이 무거웠다. 확 벗어버리고 달리고 싶었으나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었다.
“헉,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비스퇴르가를 지나가며 스치듯 들었던 대화 내용이 머릿속에 반복해서 울렸다.
-자네, 기억나나? 이름이…… 테오였던가? 어쨌든 그 싹싹하던 청년 말이야. 자살했다지 뭔가!
데미안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레비탄이라는 식당에서 여자를 봤다고 둘러댄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
녹스가 언젠가 제 거짓말을 눈치챌 거라고는 생각했으나, 시기가 너무 빨랐다.
“젠장!”
데미안은 손을 들어 눈앞을 가리는 빗물을 닦아냈다.
‘제발 뜬소문이길. 녹스가 아직 테오를 죽이지 않았길.’
레이나에게 테오를 만나지 말라고 경고한 뒤 다시 녹스를 회유해 보려고 했다. 녹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도록.
테오는 레이나에게 소중한 사람일 테니까.
비스퇴르가를 전부 둘러보고 온 뒤에야 여관 앞에 도착한 데미안은 몸을 숙여 숨을 골랐다.
그러자 안개꽃이 아래로 떨어졌다. 레이나가 귀에 꽂아주었던 안개꽃이었다.
데미안이 안개꽃을 주우려던 때였다. 누군가가 데미안이 주우려던 안개꽃을 밟았다.
“이제 왔네?”
머리 위로 들려오는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에 데미안의 몸은 충격으로 굳었다.
데미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녹스가 다른 여자의 몸에 들어가 있었다. 데미안의 심장이 쿵 내려앉더니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나직하게 물었다.
“전에 쓰던 몸은……?”
“아, 바꿨어. 그 몸은 마음에 안 든다고 했잖아.”
녹스의 목소리는 기괴할 정도로 밝고 가벼웠다.
결국, 테오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아니, 막을 수 있긴 했던가?
“얼른 레이나, 그 여자의 몸만 차지하고 다른 곳으로 가야지.”
녹스가 즐겁게 흥얼거리듯 말하며 제 발밑에 있는 안개꽃을 꾹 짓눌러 밟았다.
데미안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리저리 밟히는 안개꽃이 녹스에게 옴짝달싹못하고 힘없이 휘둘리는 제 모습처럼 보였다.
그분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녹스에게 휘둘려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외로우니까. 가족을 갖고 싶으니까.
문득 저를 보며 환하게 웃던 레이나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사실 안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그게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가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선대 공작 부부였는데.
어째서 레이나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까.
그 이유를 생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레이나야말로 조건 없이 저를 아껴주고 행복을 바라는 진짜 가족이니까.
데미안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아니, 다른 곳으로는 안 가.”
“언제는 비스퇴르가를 뜨고 싶다면서?”
“이제 생각이 바뀌었어.”
데미안은 숙이고 있던 몸을 세운 뒤 녹스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녹스, 너랑 함께하는 건 여기까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