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내가 단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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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내가 단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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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내가 단테라고
2022.10.03.
불길한 예감은 기우가 아니었다. 데미안의 원래 이름이 단테였다니.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신전에서 레이나가 칭했던 제 동생의 이름이 바로 단테였으니까.
어쩜 운명이 이렇게나 가혹한지.
살고 싶었지만, 누군가의 목숨을 앗거나 불행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아는 사람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애초에 레이나와 가까워지면 안 되는 거였을까.’
그럼 적어도 죄책감은 덜 느껴졌을 텐데. 속이 갑갑하며 체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밤, 라크하가 찾아온다면 진지하게 얘기를 꺼내 볼 생각이었다. 녹스를 없앨 방법은 데미안을 죽이는 거라고.
‘라크하는 일이 쉬워졌다고 생각하겠지.’
어차피 라크하는 데미안을 찾는 데 열중하고 있던 참일 테니까.
그리고 라크하는 데미안이 레이나의 동생이란 걸 알게 되더라도, 가차 없이…….
후두둑.
곰곰이 생각하며 숟가락을 들던 그때, 붉은색의 액체가 하얀 식탁보를 적셨다.
“피……?”
대체 어디서 떨어진 피인 거지? 멀뚱히 피를 바라보는데, 아이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되게 좋은 향이…… 어, 언니?! 의원! 의원을 불러올게!”
아이샤가 기함할 듯이 놀라며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옆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델카인은 황급히 냅킨을 내게 내밀었다.
“혀, 형수님! 우선 이걸로 닦아!”
“아…… 고마워, 델카인.”
그제야 식탁보를 적신 피가 내 코에서 흐른 거라는 걸 알아챈 나는 뒤늦게 냅킨으로 코를 막았다.
‘최근 들어서 너무 무리했나?’
신전에서 지낼 때 바삐 돌아다닌 데다가 걱정거리가 많아 잠까지 설쳐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름 튼튼한 몸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냥 그런 건 아닌 듯했다.
“형수님, 괜찮아?”
“응, 피곤해서 그런가 봐.”
하지만 여전히 델카인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그런 델카인을 달래주며 아이샤가 나간 문을 흘긋거렸다. 의원을 부른다며 나갔던 아이샤가 마음에 걸렸다.
‘의원을 부를 정도는 아니지 않나?’
피로해서 그저 코피가 난 일로 의원을 부르기엔 아무래도 민망했다. 더 늦기 전에 아이샤를 말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였다.
쾅!
다이닝룸 문이 세차게 열리며 라크하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라크하가 어쩐 일이지? 나는 당황해서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오늘 급한 업무가 생겨서 함께 저녁 식사를 못 한다고 하시지 않았…… 꺅!”
단숨에 내 앞으로 다가온 라크하가 나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라크하의 등 너머로 울먹이는 아이샤가 보였다.
‘아이샤가 그새 라크하에게 찾아가서 말했구나.’
쌍둥이들의 앞에서 라크하에게 안겨 있자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고작 코피가 났을 뿐인데, 이런 대접이라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이전에 유리에 베여 피가 났을 때, 라크하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는데!
“자, 잠시만요. 피 냄새가 나면…….”
“참을 만하니 가만히 있어.”
참을 만하다고? 라크하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그의 눈은 또렷했다.
***
데미안은 발로 땅을 툭툭 건드리며 주변을 살폈다. 광장이 보이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기사들의 눈을 피해 잘 찾아오겠지?’
약도를 그려서 보내주며 뒤를 잘 살피라고 했으나,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드리엔 남작가 주변에 아인티아의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니까.
아마 식당에 있을 때 레이나와 만나는 걸 목격한 게 틀림없었다.
“하아.”
데미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로브를 더욱 꾹 눌러썼다.
만나도 되는 걸까? 만나는 게 맞는 걸까? 여기까지 나오기 전에 수없이 고민했다.
레이나를 만나려면 신경 써야 할 게 많았다. 기사들의 감시와 녹스의 시선까지도.
그러니 그저 쪽지로 이유를 알리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왜 위험을 감수하며 레이나와 만나기로 한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데미안?”
불쑥 골목으로 고개를 들이민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데미안을 불렀다.
데미안이 움찔하며 바라보자, 그 사람은 자신의 로브를 살며시 걷으며 미소를 지었다.
“저예요, 레이나. 누가 제 뒤를 밟길래 이리저리 피해 다니면서 따돌리느라 조금 늦었어요.”
“……그렇군요.”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활기찬 레이나를 보며 데미안은 순간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오는 길에 녹스와 만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래도 누군가가 뒤늦게 따라붙을 수도 있으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일단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누가 들으면 조금 곤란한 얘기라서요.”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술집? 인적이 드문 식당? 데미안이 장소를 모색해 보던 그때였다.
레이나가 손을 뻗어 데미안의 팔을 가볍게 톡톡 건드렸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긴 한데, 제가 비밀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장소를 알고 있긴 하거든요. 데미안만 괜찮다면 거기로 가는 게 어떨까요?”
데미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나가 자신만만하게 얘기하는 걸 보면, 보통 장소는 아닌 듯했다.
“어디인가요?”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돼요. 자, 얼른 가요.”
레이나가 활짝 웃으며 데미안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데미안은 레이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울렁이는 듯한 감정이 들었다.
꿈에서는 잡지 못했던 손. 닿고 싶어도 닿을 수 없었던 그 꿈이 떠올랐다.
포근하고 따스했다.
***
“여기예요.”
레이나가 데미안을 데리고 온 곳은 허름한 마구간이었다. 하지만 일반 마구간은 아닌 듯 곳곳에 책이 있기도 하고, 생활의 흔적이 느껴졌다.
의아한 눈으로 마구간을 살펴보던 데미안은 레이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알고 있으신 건가요?”
“어릴 때 테오와 함께 지냈던 아지트예요. 오랜만에 와서 먼지투성이긴 한데…… 그래도 여길 아는 사람은 저랑 테오밖에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테오’라는 이름에 데미안의 어깨가 움찔했다. 아직 녹스가 테오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탓이었다.
데미안이 굳어 있는 사이, 레이나가 지푸라기가 깔린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더니 해맑게 웃으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자, 그렇게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아요.”
일반적인 귀족과 달리 털털한 레이나의 모습에 데미안은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귀족이 아닌 건가? 그렇다는 건 친누나가 아니라는 건데…….
데미안이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머뭇거리고 있자니, 레이나가 그를 채근했다.
“데미안?”
“아, 네.”
데미안은 주춤거리며 앉았다. 지푸라기 덕분에 바닥이 마냥 차갑지는 않았다.
바로 옆에는 나무 상자가 있었는데, 책상처럼 사용한 듯 그 위로 물건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데미안은 호기심이 들어 나무 상자 위를 훑어보았다. 책, 촛대, 줄자 등 여러 가지 물품들이 보였다.
개중 가장 눈에 띈 건 나무 상자 위로 반쯤 펼쳐져 있는 지도였다.
“웬 지도가…….”
“어머, 이게 아직도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테오가 보면 깜짝 놀라겠다.”
레이나는 데미안에게 몸을 기울이며 들뜬 얼굴로 지도를 살펴보았다.
“이거, 어렸을 때 저랑 테오가 함께 만든 지도거든요.”
“지도를 직접 만들었다고요?”
데미안은 의아한 눈으로 지도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제국 수도를 중심으로 자세하게 그려진 지도였는데, 무언가를 기록한 듯 곳곳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뭐라고 적혀 있는 거지?’
표시된 곳에 적힌 글자가 워낙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단테를 잃어버린 곳, 이라고 적어 놨을 거예요.”
레이나가 데미안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짚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단테……?”
쿵.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과 함께 데미안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네, 단테는 제 동생이에요. 단테 아드리엔. 제가 어렸을 때 동생을 잃어버렸거든요.”
데미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제 머리색과 같은 붉은 머리카락. 익숙하다고 느껴졌던 레이나라는 이름. 가문의 문장.
계속해서 레이나가 신경 쓰이던 이 감정은 착각이 아니었다. 레이나, 그녀가 자신의 누나였으니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울렁였다.
문득 데미안의 머릿속에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꿈이라고 생각했던 게 과거의 일이었던 걸까?
데미안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그래서 동생을 찾아다녔나요?”
“네, 몇 년간은 제 동생만 찾아다니는 데 매진했었죠.”
지도에 어지럽게 그려진 펜 자국들이 레이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찾아다닌 거예요?”
“부모님께서 더 이상 단테를 찾지 않는 것 같길래 나라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선대 공작 부부의 말과 동일했다. 부모님은 저를 그리워하지도 않고, 돌아오지도 않길 바랐다던 그 말이 사실이었다.
데미안은 속으로 조소했다.
그래서 돌아갈 곳 없는 자신을 거둬준 선대 공작 부부의 가족으로 인정받으려고 했다.
그분들은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제 혈육이 아닌데도.
하지만 이어진 레이나의 말은 데미안의 생각을 단번에 뒤흔들어 놓았다.
“그런데 어린 저에게는 비밀로 하고 계속 단테를 찾고 있던 거였더라고요.”
데미안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머릿속에 선대 공작 부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데미안, 네 부모님은 네가 필요 없다고 하는구나.
-가여운 것. 이리 와. 네게 최고의 힘을 안겨줄게.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선대 공작 부부의 미소가 눈앞에 일렁였다가 흐려졌다.
그분들이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레이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데…….
레이나가 제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지?
데미안은 혼란스러운 나머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몸을 웅크렸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물들었다.
그때였다. 레이나가 데미안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데미안, 데미안?”
레이나의 부름에 정신이 번뜩 들며 물속에서 건져진 것처럼 숨이 탁 트였다.
레이나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가식처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데미안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레이나가 한 말이 전부 진실인지.
데미안은 멍하니 레이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에…… 동생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면, 어떨 것 같아요?”
레이나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분명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것이다. 동생을 찾아다녔다고 하니까.
레이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으음……. 사실 안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데미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울컥,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역시 전부 거짓말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레이나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게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단번에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데미안은 의아한 눈으로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레이나가 지도에 남은 흔적들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오히려 단테가 찾아오지 않는 것이 우릴 잊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레이나가 손을 뻗어 지도 위에 적혀 있는 단테라는 이름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진심으로 행복을 기원하는 것 같은 모습에 데미안은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게도 조건 없이 아껴주고 행복을 바라는 진짜 가족이 있었다니.
지금이라도 내가 단테라고 말할까? 데미안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고민하던 때였다.
“그래도 한 번쯤은 단테의 얼굴을 보고 싶긴 해요. 서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데미안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 말을 듣자니 동생이라는 사실도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 제 모습은 레이나가 말한 것과 정반대였으니까.
군데군데 해어진 허름한 옷과 푸석한 얼굴. 이런 불쌍한 꼴로 동생이라고 말한다면, 레이나는 분명 슬퍼하리라.
하지만 데미안은 슬퍼하는 레이나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도무지 이런 꼴로 레이나를 볼 자신이 없었던 데미안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가볼게요.”
데미안은 아무렇게나 둘러대고는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레이나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곧 제 실수를 깨닫고 멈춰 섰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당신을 노리고 있으니 숨어야 한다는 걸 말해줬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가서 말을 해주면 되는 일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되돌아간다고 한들 말할 수 있을까?
레이나에게 제대로 말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당신이 행복하게 지내길 바라는 동생이 저지른 악행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