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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나에게만 집중해 (96/136)


96. 나에게만 집중해
2022.09.30.


덜커덩. 마차가 흔들리며 입술이 살짝 떨어지자 붙어 있던 몸도 함께 멀어졌다.


“내게서 떨어질 생각하지 마.”

나지막이 중얼거린 라크하가 나를 더욱 바짝 끌어당겼다. 나 역시 떨어지려고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차가 너무 흔들리는걸요.”

그의 어깨를 살짝 짚은 나는 창문 밖을 흘긋거렸다.

마차가 산속 비탈길을 내려가는 듯 창문 밖으로 빼곡한 나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물끄러미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라크하가 창문의 커튼을 홱 쳤다.

갑작스러운 라크하의 행동에 당황해서 다시 그를 바라본 나는 멈칫했다.

라크하의 눈동자가 아직 해소하지 못한 욕망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그대는 나에게만 집중하면 돼.”

속삭이는 라크하의 입술이 내 목덜미 위를 닿을 듯 말 듯 스쳤다.

뜨거운 숨결이 어깨까지 훤히 드러난 살갗에 흩어지자, 몸이 흠칫 떨렸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라크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쪽, 쪽. 젖은 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점차 아래로 내려왔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열꽃이 피어나듯 기묘한 화끈거림이 피부 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라크하에게 매달려 녹아 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몸을 살짝 뒤틀었다.


“……혹은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걸까?”

입술을 쇄골까지 미끄러뜨린 라크하가 이를 세워 살짝 베어 물었다.


“읏…….”

등골을 찌릿하게 관통하는 낯선 감각에 기어코 입 밖으로 참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통보다는 미약한 흥분으로 내뱉은 신음에 가까웠다.

몸을 한가득 덮은 묵직한 쾌락에 그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저 라크하에게 매달리듯 붙어 있었는데도 전력 질주라도 한 사람처럼 숨이 가빴다.


“그래서 대답은?”

라크하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렸다. 대답을 요구하면서도 라크하의 손은 얇은 드레스 자락 위의 잘록한 허리를 배회했다.

자극적이고 야릇한 손길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또다시 이상한 신음 소리가 나오진 않을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스르륵.

라크하의 손이 내려가며 허벅지 위를 덮고 있던 드레스 자락이 말려 올라갔다.

맨살에 서늘한 공기가 닿으며 그의 손이 스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 잠깐…….”

화들짝 놀란 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라크하의 행동은 단번에 뚝 멈추었다.

한껏 달아오르던 분위기가 잠시 얼어붙었으나 열락을 담은 숨소리는 여전했다.

달뜬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싫어?”

싫을 리가 없었다. 싫으면 진작에 뿌리쳤을 테니까.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달아오른 얼굴을 푹 떨궜다.


“여기서는 조금 부끄러워서…….”

“다른 장소는 괜찮다는 걸까?”

라크하는 제 손을 쥐고 있는 내 손에 깍지를 끼더니 눈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내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훑었다. 쪽, 입술이 맞닿는 젖은 소리가 울렸다.

나를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는 농밀한 애정이 담겨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짓궂었다.

라크하에게 이리저리 휘말리는 기분에 어쩐지 심술이 나 나는 일부러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어쨌든 안 돼요.”

“그럼 처음에 하던 걸 할 수밖에 없겠군. 이번엔 꽉 붙들어.”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라크하가 내 손을 제 어깨 위로 올리더니 내 턱을 살며시 잡아끌며 다시 입술을 점령한 탓이었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나는 더 깊숙이 라크하를 끌어안았다. 맞붙어 있는 뜨거운 체온도, 젖은 숨결도 더욱 짙어지고 선명해졌다.


 

***



“언니!”

마차에서 내리고 저택으로 들어가자마자, 우다다 요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먼저 뛰어온 아이샤가 펄쩍 뛰어오르더니 내게 안겼다.


“아, 아이샤?”

엄청난 힘에 몸이 뒤로 쏠렸다. 아마 라크하가 받쳐주지 않았다면 뒤로 넘어졌을 정도였다.


“엄청 보고 싶었어! 언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아무래도 언니는 내가 가장 보고 싶었을 거야. 그렇지? 아, 그러고 보니 악랄한 사제들은? 언니 안 괴롭혔어? 응응?”

아이샤가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마구잡이로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어떤 질문부터 대답해야 할지 생각하면서도, 아이샤가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아이샤가 가장 보고 싶었지.”

“그럴 줄 알았어!”

“아이샤, 형수님한테 강요하지 마. 형수님은 형이 가장 보고 싶었을걸?”

그때, 아이샤의 등 뒤로 나타난 델카인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이샤가 휘릭 뒤돌더니 델카인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이를 시작으로 쌍둥이들은 서로 붙들고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헤어질 때 우는 얼굴이라 걱정했는데, 힘이 넘치고 활기찬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건강하게 잘 지낸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시끄러운 일상이 따스하게 느껴져서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싸움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뒤늦게 말리려던 때였다.

라크하가 나를 붙잡더니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옷부터 먼저 갈아입고 오는 게 어때?”

“제 옷은 왜요?”

나는 의아해하며 내 옷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신전에서 입던 옷 위로 로브를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있어, 그런 게.”

얼렁뚱땅 대답한 라크하가 리타에게 눈짓했다.

그렇게 나는 쌍둥이들이 다투는 사이에 리타와 함께 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드레스에 뭐라도 묻은 걸까? 굳이 나를 방으로 돌려보낸 라크하가 이상해서 나는 곧장 거울을 확인했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잖아!”

이리저리 살펴보던 나는 로브를 벗은 순간, 나는 꽥 비명을 질렀다.

목과 쇄골에 얼룩덜룩한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가 남긴 자국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라크하! 이, 이 망할 놈! 이게 뭐야!”

경악하며 목을 더듬던 나는 거울 속에 비치는 리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리타가 “어머나!” 하고 탄성을 터트리더니 얼굴을 붉혔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민망한 나머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서 숨고 싶었다.

***

오후 시간은 나를 찾아온 쌍둥이들과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니까……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지?’

이를테면, 산책이라든가, 숨바꼭질이라든가. 쌍둥이들과 활동적인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저택을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시터님께서 돌아오셔서 너무 기뻐요……!”

지나가는 길에 마주친 사용인들은 감격에 벅찬 얼굴로 나를 반기기 바빴다.


“시터님께서 오셨으니 드디어 새벽에 쉴 수 있겠습니다. 아아…… 저는 자유예요.”

특히나 시롬은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기도 해서 받아주었으나, 뭐든 지나치면 독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누구와 마주칠 때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니 피곤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아이샤와 델카인의 표정도 점차 안 좋아지고 있었다.

결국, 사용인들의 눈을 피할 겸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던 나는 쌍둥이들과 본관에 있는 서재에 들렸다.


‘역시 여기에는 아무도 없네.’

텅 빈 서재를 둘러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는데, 울적한 아이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랑 밖에서 놀고 싶었는데…….”

“다음에 밖에서 놀자. 아이샤. 재밌는 동화책을 읽어줄게.”

“형수님, 나는 괜찮아. 난 형수님이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거든.”

“델카인, 요 귀여운 녀석! 이리 와.”

정말 매번 어디서 이런 예쁜 말을 배워 와서 하는 건지!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델카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도 그래! 동화책 안 읽어줘도 돼! 나 혼자서도 책 엄청 잘 읽거든!”

델카인에게 위기감이라도 느낀 걸까. 아이샤가 버럭 외치며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뽑아오더니 자리에 앉았다.


‘아이샤, 책 거꾸로 들었는데…….’

애석하게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띈 건 책을 읽는 아이샤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혼자서 책도 읽고 아이샤, 정말 착하네.”

나는 애써 못 본 척하며 아이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적했다간 아이샤와 델카인이 또 다툴지도 몰랐다.

델카인 덕분에 자유롭게 책을 읽는 분위기가 되자, 나는 이 틈을 타 책장을 뒤져보았다.


“분명히 여기쯤 꽂아뒀던 것 같은데…… 아, 여기 있다.”

찬찬히 책장을 쓸며 둘러보자니 제목이 없는 책이 눈에 띄었다.

바로, 이전에 읽다가 만 데미안의 일기였다.

나는 데미안의 일기를 펼치기 전에 쌍둥이들을 살펴보았다.

쌍둥이들에게 일기장을 들키지 않는 게 좋았다. 델카인은 데미안에게 안 좋은 기억이 있으니까.

다행히 델카인은 열중해서 책을 읽고 있었고, 아이샤는 책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한쪽 구석에 가서 앉아 데미안의 일기를 펼쳤다.

그리고 내가 읽지 못했던 뒷부분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분들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손에서 이상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무서웠는데 그분들은 무척이나 기뻐하며 상으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분들이 좋아하면 좋은 거겠지? 어쨌든 맛있는 것도 실컷 먹고, 정말 행복한 하루였다.]

데미안이 처음 흑마법을 썼던 날인가? 주변에 그려진 하트들을 보니 데미안에게 얼마나 기뻤던 날이었는지 와닿았다.

그 이후로도 일기장에는 선대 공작에 대한 칭찬이 즐비했다. 유독 꾸깃꾸깃하게 접혀 있는 장을 제외하고는.

[어제 혼난 탓일까. 이상한 꿈을 꿨다. 꿈에서 누나가 나를 찾아다닌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잊자, 잊어. 모두 잊는 거야. 공작님과 함께 있으니 좋잖아. 아니, 행복하잖아.]

누나가 찾아다니는 꿈을 꿨다니. 불안해진 나는 빠르게 데미안의 일기장을 넘겼으나, 그 뒤로 데미안의 일기장은 텅 비어 있었다.


“……이게 끝이라고?”

나는 다시 데미안의 일기를 처음부터 확인했다. 어쩌면 내가 놓친 게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역시나 가문의 문장을 그린 그림과 꿈 얘기 외에 어떠한 단서는 없었다.


“하아.”

데미안의 일기를 덮은 나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뭐라도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됐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괜히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겠어.’

포기하고 일기장을 집어 다시 책장에 꽂아 넣으려던 때였다. 일기장 뒷면 하단에 적힌 조그만 글씨가 눈에 띄었다.


“뭐지……?”

눈을 가늘게 뜬 나는 하단에 흐릿하게 적힌 글씨를 확인하고는 숨을 삼켰다.

[단테 거.]

***

최근 들어 아드리엔 남작가는 좋은 소식과 명예로운 일투성이였다.

황제가 하사하는 선물들과 레이나가 신전에서 선보인 발라이 식 손 마사지의 효과가 좋았으니 주기적으로 입궁해 달라는 황제의 친필 편지까지.


“요즘 저택에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아. 어머니도, 아버지도 기뻐 보이시고.”

레이나가 물끄러미 창문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이불을 챙기던 하녀가 살갑게 대답했다.


“전부 아가씨 덕인걸요. 그리고 아가씨도 무척 행복해 보이셔요.”

“음…… 맞아, 행복해. 요즘 좋은 일밖에 없거든. 메이아 님께서 내게 축복을 내려주시기라도 한 걸까 싶을 정도로.”

메이아를 떠올린 레이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모두 신전에서 돌아온 이후로 생긴 꿈같은 일들이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바람을 만끽하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던 때였다.

퍼드득.

검은 깃털의 새가 날갯짓하더니 창문 앞에 앉았다. 레이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조용히 새를 살펴보았다.

새의 다리에 작은 종이가 묶여 있었다.

레이나가 새에게 다가가 종이를 풀자 짤막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한동안 숨어 지낼 생각은 없나요? –데미안.]

동생 같기도 해서 친해지고 싶었던 테오의 친구가 보낸 쪽지였다. 내용을 확인한 레이나는 놀란 눈으로 새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아, 아니야!”

레이나는 황급히 데미안의 쪽지를 등 뒤로 숨기며 펜과 종이를 챙기고는 짧은 답신을 썼다.

[그전에 나랑 만나서 설명부터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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