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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그대가 원한다면, 전부 가져 (95/136)


95. 그대가 원한다면, 전부 가져
2022.09.26.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맞는다면 키레타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는 걸 보아하니 나와 라크하가 있는 곳으로 오는 듯했다.

내 표정이 굳어지자, 라크하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의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메이아?”

‘아무래도 숨는 게 좋겠지?’

키레타라면 나와 마주쳤을 때 시비를 걸 게 뻔했다. 주변을 다급히 둘러보니, 몇 걸음 옆에 큰 나무가 보였다.


“이쪽으로 와요!”

나는 라크하의 팔을 잡아당겨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나는 라크하에게 내 몸을 바짝 붙여 그를 나무 쪽으로 눌렀다.

그의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으나 내 정신은 온통 키레타에게 쏠려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

“쉿.”

나는 라크하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슬쩍 방금 전까지 나와 라크하가 있던 곳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레타와 두 명의 고위 사제들의 모습이 얼핏 보이며 말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키레타, 너무 상심하지 마시지요. 아마 대신관님께서도 속으로는 메이아, 그 여자를 싫어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붙잡지 않고 보내주는 거겠지요.”

“맞아요, 키레타. 대신관님께서 조금만 더 엄하신 분이었다면, 그 여자는 신전에 발도 못 디뎠을 거예요.”

“하긴, 두 분의 말씀이 전부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며칠 전에 대신관님과 따로 대화를 나눴는데, 저한테 그러시더군요. 그저 불쌍해서 친절을 베푼 것뿐이라고.”

대신관이 할 법한 말이 아니었다. 내가 테리투스와 소통할 줄 안다는 걸 들은 이후라면 더더욱.

아마 또 멋대로 생각하는 거겠지. 한결같은 키레타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데 그때, 맞닿아 있던 라크하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들어 라크하를 올려다본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라크하가 모양 좋은 입술을 끌어올려 살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대의 속을 썩인 게 저놈들이구나.”

라크하의 입술을 누르고 있던 검지 위로 부드러운 살갗이 스치며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고위 사제들이라 부딪혀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금방이라도 보복할 것 같은 기세에 나는 황급히 라크하를 말렸다. 라크하가 나서는 순간 일이 커질 게 분명했다.

그러면서 얼른 고위 사제들이 지나가길 비는데, 키레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심지어 신의 딸이나 되는 사람이 이단이나 다름없는 공작가의 시터라니요. 고약하기로 유명한 아이들이라면서요? 사서 고생을 하면서 이단에 속하려고 한다니……. 늘 그랬지만, 참 한심한 여자예요.”

“신벌을 안 받은 게 용하죠. 저는 그 악독한 아인티아 공작과 약혼을 한다고 할 때부터 할 말을 잃었습니다.”

“솔직히 전혀 어울리지 않는걸요. 안 그래요?”

저 자식들이 지금 라크하와 쌍둥이들까지 욕하는 거야?

라크하와 쌍둥이들의 얘기가 나오자, 속이 부글부글 끓으며 눈앞이 핑글 돌았다.

내 욕을 하는 건 참아도 내가 아끼는 주변 사람들을 욕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울컥한 나는 숨어 있을 때는 언제고 나무 뒤에서 걸어 나갔다.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으나, 분노가 들끓어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이봐요, 사제님들.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에요?”

“삶에 크게 미련이 없는 모양이군.”

뒤따라 나온 라크하가 내가 한 말에 동조하며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누구…… 아, 아인티아 공작?”

고위 사제들이 당황한 얼굴로 나와 라크하를 번갈아 보았다.

라크하가 내 어깨를 슬쩍 끌어당기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어때, 실제로 봐도 그렇나? 나름 이단자 커플인데.”

이단자 커플이라니. 예상치 못한 단어 선택에 들끓던 분노가 팍 식으며 얼떨떨해졌다.

아니, 나는 그걸로 화내려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는 사이에도 라크하의 말은 이어졌다.


“방금 했던 말들 어디 한 번 더 해봐. 내 친히 그대들이 원하는 테리투스의 곁으로 당장이라도 보내줄 수 있으니.”

“…….”

진심이 가득 느껴지는 말에 고위 사제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듣는 라크하의 험악하고 살 떨리는 입담이었다.

하지만 내가 고위 사제들에게 나쁜 감정이 많이 쌓여서 그런 걸까.

창백하게 질린 고위 사제들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얼빠져 있는 고위 사제들 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키레타가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눈을 치켜떴다.


“이단자인 걸 아신다면 축하받을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읍.”

“키, 키레타, 상대는 심기를 건들면 자기 보좌관도 두들겨 팬다는 아인티아 공작입니다. 그만하고 공작님께 사과를 드립시다.”

다른 사제가 황급히 키레타의 입을 급히 막으며 속닥거렸으나, 내 귀에도 아주 잘 들려왔다.

가여운 시롬. 라크하와 함께 저런 소문에 휩싸여 있다니.

그나저나 몰래 말할 거면 좀 더 작게 말하지.

라크하 역시 고위 사제의 속삭임을 들었는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대들이 겁내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닐 텐데.”

이번엔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혹시나 일을 더 크게 키울까 불안해서 라크하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로 해요. 이제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지만 라크하는 제 옷자락을 잡고 있는 내 손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메이아는 고작 이 손으로 날 단번에 제압한 사람이거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당황할 새도 없이 고위 사제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우선 장단에 맞춰야겠다 싶어서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꽤 무서운 표정이었던 걸까, 혹은 라크하의 말에 놀아나 주는 걸까.

눈이 마주친 고위 사제들이 흠칫하더니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 아니 사죄드립니다!”

단, 키레타만 제외하고. 어차피 키레타에게 사과를 받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라크하의 시선이 매섭게 변하며 키레타에게 향했다. 이러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쏠릴 것 같았다.

나는 상황을 마무리 짓기 위해 작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조심하도록 해요.”

그리고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키레타를 바라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계속 남을 헐뜯으면 신벌을 받는 건 오히려 그쪽일 것 같으니까요.”

내 말에 키레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키레타는 차마 무어라 하지 못하고 씩씩거릴 뿐이었다.


“이만 가요.”

나는 그걸로 만족하며 라크하의 손을 맞잡고 이끌었다.

매번 서슴없이 내게 독설을 하던 사람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꼴이란.

발걸음을 옮길수록 마지막에 봤던 키레타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나와 달리 라크하는 마차를 대기해 둔 장소에 도착한 뒤에도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왜요, 속 시원하지 않아요?”

“그 가지 머리는 끝까지 사과를 안 하더군.”

가지 머리라니. 키레타의 보라색 머리카락을 보고 하는 소리라는 걸 알아챈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크하의 표정은 여전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라크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더니 긴 한숨을 뱉어냈다.


“역시 그대를 신전으로 보내는 게 아니었어. 그런 놈들이 고위 사제랍시고 있다니. 윗물부터 썩어 문드러졌군.”

“오랜만에 만났는데, 계속 그렇게 안 좋은 기분으로 있으실 거예요?”

가차 없는 평가에 속이 시원했지만, 지금은 라크하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키레타와 고위 사제들이 나타나면서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도 못했으니까.


“서로 좋은 모습을 보기에도 부족하잖아요. 이렇게요.”

응? 나는 라크하를 바라보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던 라크하가 내 로브를 더욱 꽁꽁 여미더니 나를 끌어안듯 감쌌다.


“여기서 보일 모습은 아닌 것 같아.”

“그럼요?”

“그대가 웃는 얼굴은 나에게만 보여줘야지. 나만 보고 싶어.”

가슴이 간질거려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어쩜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을까.


“그럼 얼른 마차에 타야겠네요. 그래야 둘만 있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 당장.”

“어어?”

라크하가 날 위로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들쳐 메더니 성큼성큼 마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와 나란히 걸을 때와 달리 라크하의 걸음은 빨랐다.

나는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오히려 움직였다가 다칠 것 같기도 했고, 꽤…… 안정감이 있다고 해야 할까나.

순식간에 마차 앞에 도착하고 라크하가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해.”

탕. 라크하가 마차 벽을 가볍게 치자, 마차가 움직였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푹신한 마차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상황에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둘만 있게 됐네요.”

“그래, 둘밖에 없지. 보는 시선 하나 없이.”

라크하가 느른하게 웃으며 내가 기대고 있는 의자에 손을 짚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집요하고 뜨거운 시선에 얼굴이 절로 달아오르며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고개를 숙이면 둘만 있어도 그대를 볼 수가 없잖아.”

라크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내 팔목을 부드럽게 거머쥐었다.

덜커덩. 마차가 크게 흔들리는 순간,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휘어 감았다.

몸이 앞으로 쏠리며 자세는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엉겁결에 라크하의 허벅지 위에 앉은 나는 흔들리는 마차에서 중심을 잃을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이제야 그대의 표정이 잘 보이네.”

“이, 이러면 다쳐요.”

“내가 그대를 다치게 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

라크하가 듣기 좋은 목소리로 웃으며 내 뒷머리를 감쌌다. 사르르 눈을 고혹적으로 접어 웃는 모습에 후끈 열기가 올랐다.

왜 라크하가 내가 웃는 걸 보며 자기만 보고 싶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라크하의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저만 보고 싶어요.”

라크하의 미소가, 나를 담고 있는 저 눈빛이 나에게만 향했으면 좋겠다. 전부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

내 속을 읽기라도 한 걸까. 혹은 처음부터 같은 마음이었던 걸까.

라크하가 손을 움직여 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대가 원한다면, 전부 가져. 난 언제든 그대의 것이 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가슴이 터질 것처럼 울렁거리는 기분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몸을 숙여 유혹적인 말을 뱉어내는 그의 입술을 삼켜버렸다.

라크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 아래를 부드럽게 쓸며 젖은 숨결과 함께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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