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 누가 그대의 속을 썩였어? (94/136)


94. 누가 그대의 속을 썩였어?
2022.09.23.



“와! 정말 아름다우셔요. 원래 시터님의 옷인 것처럼요.”

“……그래요?”

원래 내 옷이라. 거울 속에 보이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내가 낯설었다.

쇄골까지 드러난 어깨와 허리선을 따라 우아하게 떨어지는 얇은 실크로 된 레이스. 기도의 날을 맞아 신전에서 받은 드레스였다.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입은 옷과 비슷하네.’

아닌가? 자수가 좀 더 화려하고 금장식이 돋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물끄러미 드레스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라크하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떠오르며 짧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옷을 입고 라크하의 머리를 쥐어뜯었다니.”

“네? 뭐라고 하셨나요?”

“아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보통 예쁘고 불편한 옷을 입으면 행동도 얌전해진다던데.

그 당시의 나는 프라이팬이나 들고 라크하의 머리를 한 번 더 내리칠 궁리나 하고 있었다니.

다시 생각해 봐도 우스웠다. 내 계획을 알았을 때 라크하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을까.

악연과도 같은, 무서운 흑막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연인 관계가 됐다는 것도 참 신기했다.


“재밌는 일이 생각나서요.”

슬쩍 웃으니 거울 속에 비치는 얼굴에 볼 한쪽이 살짝 파이며 보조개가 생겼다. 내 얼굴에 보조개가 있는 줄은 몰랐다.


‘신전에 지내면서 조금 살이 빠졌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자, 눈이 퀭하고 안색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며칠 고심을 많이 하고 지낸 탓인 듯했다.

뒤에서 내 옷을 만져주던 리타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내게 물었다.


“뭔데요? 시터님! 저도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알면 엄청 놀랄걸요? 그래도 알고 싶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무섭잖아요. 사실…… 더 궁금하기도 하고요! 말해주세요!”

리타가 물러서는 듯하더니 씨익 웃으며 내게 엉겨 붙었다.

내 편 하나 없는 신전에서 리타와 함께 지내면서 부쩍 가까워진 참이었다.

그렇게 리타와 장난을 치던 그때였다.


“메이아 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밖에서 나를 재촉하는 사제의 목소리에 나와 리타는 행동을 우뚝 멈췄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시터님, 얼른 가보셔요.”

리타의 말을 들으니 오늘로 신전 생활이 끝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오늘 이런 거추장스럽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내가 떠나는 날이자, 기도의 날이 밝았으니까!

울컥 가슴이 차오르는 듯한 기분에 나는 리타의 손을 맞잡았다. 험한 곳에서 함께 싸운 동지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공작가로 돌아가는 날이네요. 리타 씨, 참 고생 많았어요.”

“고생이라뇨. 메이아 님을 도와드리려고 온 건데요. 마지막까지 별 탈 없이 마무리할 수 있을 거예요.”

“리타 씨…….”

응원의 말을 건네는 리타의 모습에 괜스레 코끝이 찡했다.

내가 줄곧 키네스와 대신관 때문에 불안해하던 걸 알고 있었던 거겠지.


“또, 공작님께서도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맞아. 라크하가 신전으로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까. 라크하와 만날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렜다.

나는 애써 걱정을 내려놓으며 리타를 따라 활짝 웃었다.


“네, 나중에 뵈어요.”

 

 

***

오전에는 대신관과 고위 사제들, 그리고 키네스와 일반 사제들이 신전 본관의 기도실에서 기도를 드렸다.

그 이후로도 성의를 차려입은 대신관이 성전을 읊고, 성수를 뿌리는 등 정숙한 관례 행사가 이어졌다.

안내받은 내용에 의하면, 본격적인 기도의 날의 의식 절차는 오전 행사가 끝난 뒤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제 막 오전 행사가 끝나고 잠깐의 휴식 시간이 주어진 참이었다.


“후…… 이 장소는 좀 낫네.”

회랑으로 나온 나는 커다란 대리석 기둥 뒤에 서서 긴 한숨을 뱉어냈다.

사제들의 시선 때문에 도무지 안에서는 마음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계속 긴장을 하면서 몸에 힘을 주고 있어서 그런 걸까. 온몸이 뻐근하고 쑤셨다.


‘라크하는 지금쯤 신전에 와 있으려나?’

얼른 라크하를 보고 싶었다. 우리 귀엽고 말괄량이 같은 쌍둥이들도.

세 사람을 생각하자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괜히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마지막까지 별 탈 없이 행사가 마무리되길 바라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때였다.


“메이아 님, 공표식을 거행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알겠어요.”

나를 부르는 사제의 목소리에 나는 서둘러 사제의 뒤를 따라갔다.

다음 관례는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공표식으로, 나와 키네스가 신전 본관의 정문과 이어진 계단을 내려간 뒤 예배당에서 기도의 날을 선언하는 행사였다.

이 행사를 마지막으로 내가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행사가 전부 끝나며,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다는 말씀!

사제를 뒤따라 도착한 곳에는 새하얀 제복을 차려입은 키네스가 있었다.

오전에 의식을 지내면서 스치듯이 봤었지만, 머리를 옆으로 넘긴 키네스는 가까이서 보니 유독 더 빛이 났다.


“잡도록.”

내가 다가오자 키네스가 팔을 내밀었다. 키네스와의 접촉은 최대한 피하고 싶어 머뭇거리자 키네스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백성들에게 신의 딸을 처음 소개하는 자리이지. 축복의 의식마저 거부한 신의 딸이 황제와 떨어져 이동했다간 자칫 항간에 헛소문이 돌 수도 있는 노릇이야.”

“……잡으려고 했어요.”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말에 나는 얌전히 키네스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키네스는 나를 에스코트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사제들은 예배당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 건가? 그새 신전 본관이 텅 비어 있었다.

걸으면서 신전 본관을 둘러보고 있자니, 옆에서 키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이면 신전을 떠난다지.”

“네, 기도의 날까지만 있을 생각으로 신전을 방문한 거라서요. 제가 신전에서 해야 할 일은 오늘이면 끝나기도 하고…… 제가 있어야 할 곳은 따로 있으니까요.”

라크하, 그리고 쌍둥이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그들의 곁이었다.


“……그렇군. 그대가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난 그대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물론 이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만.”

“!”

심장이 철렁 내려앉자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키네스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나나 그대나 서로 원치 않아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있는 것 같더군.”

“그게…… 무슨 뜻이죠?”

눈이 마주치자 키네스가 입술을 끌어당겨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날 보는군. 날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예배당에서는 지금처럼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도록 해. 자, 더 늦다간 일정에 차질이 생길 테니 얼른 가지.”

키네스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나를 재촉할 뿐이었다. 전혀 대답해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여기서 가만히 서서 얘기할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

나는 가까스로 불안한 기분을 떨쳐내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계속해서 키네스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원치 않아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대체 뭐지?’

생각에 잠겨서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신전 본관의 정문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밖으로 발을 한 발자국 내디딘 그 순간이었다.


“와아아!”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예배당으로 가는 길까지 수많은 사람이 줄지어 서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인파와 함성에 나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제르디아 제국에 영원한 안녕을!”

“성녀님! 제국에 축복을 내려주십시오!”

당황한 나와 달리 키네스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있었다.

나도 뒤늦게 키네스처럼 사람들에게 눈인사와 손을 흔들어주는데,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뚝 솟은 남자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라크하……?”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며 두근두근, 심장이 떨렸다.

로브로 정체를 가리고 있었지만, 누군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널찍하고 단단한 어깨. 풍기는 기세만으로도 라크하가 분명했다.

정말 라크하가 나를 데리러 왔구나.

그 사실만으로도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

공표식이 끝나고 곧바로 기도식이 이어졌다.

기도식은 내가 의무로 참여할 필요가 없는 행사였기에 나는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예배당에서 빠져나왔다.

계속해서 예배당으로 가는 길에 봤던 라크하가 눈에 밟힌 탓이었다.


“어디에 있는 거지?”

라크하가 예배당에 없었으니 외부에 있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돌아보아도 라크하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예배당에 모여 기도를 드리느라 주변이 한적해서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봤던 건가? 그냥 마차가 대기되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나으려나.’

조금 뒤면 기도식이 끝나 사람들이 몰리면 라크하를 찾기 더 어려워질 것이었다.

보는 눈이 많아 돌아다니는 게 어려워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여기쯤이었던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라크하를 봤던 곳을 한 번만 더 둘러봐야지.

다시 처음 둘러봤던 곳으로 돌아가려는데,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돌아보려던 그때, 누군가가 내 등을 껴안더니 머리 위로 새하얀 로브가 덮였다.


 
등 뒤로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과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그대는 너무 눈에 띄어서 모습을 감추는 편이 좋겠어.”

살랑, 바람이 기분 좋게 불며 잔디의 싱그러운 향과 함께 깔끔하고 시원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익숙한 체향에 모든 긴장이 녹아내리며 바보처럼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라크하,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 그대.”

“저도요.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나는 내 어깨를 감싸 안은 라크하의 손을 거머쥐며 고개를 숙여 이마를 묻었다.

고작 며칠 신전에 다녀오기로 한 것뿐인데, 왜 이렇게나 애틋한 걸까.

어쩌면 나도, 이 남자도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서로를 정말 그리워했던 것 같다.


“그 사이에 야윈 것 같아.”

“아직 제 얼굴을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걸 단번에 어떻게 알아요?”

“꼭 봐야만 아는 건 아니지.”

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쓸고 내려왔다.

은근한 손길에 몸을 흠칫 떨자, 그가 내 허리를 꽉 끌어안더니 낮게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확실히 야위었어. 누가 그대의 속을 썩였어?”

나는 내 허리를 안은 라크하의 손을 살며시 떼어내며 뒤돌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해를 등지고 선 라크하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듬직하게 느껴졌다.


“원래 타지에서 지내면 적응하느라 살이 빠진다고 하잖아요.”

누구 한 명이라도 걸리면 가만두지 않을 기세에 라크하를 달래보려던 그때, 멀리서 익숙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봤죠?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여자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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