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이 행복을 온전히 누려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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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이 행복을 온전히 누려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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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이 행복을 온전히 누려도 되는 걸까?
2022.09.19.
비에고는 잠들어 있는 키네스가 낯선 듯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
“황제 폐하는 제가 모실 테니 두 분은 들어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나와 레이나를 보내주었고, 둘이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물론, 티타임을 하고 온 걸 고려해서 리타에게 간단한 샌드위치를 부탁했다.
“발라이 출신의 친구에게 배운 손 마사지를 해드렸는데 많이 피곤하셨는지 금세 잠드시더라고요. 메이아 님도 해드릴까요?”
“아, 전 쌩쌩합니다. 괜찮아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레이나가 능력을 쓴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선 키네스가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레이나에게 진실을 말해 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제법 고민이 되는 일이었으나, 결국 함구하기로 했다. 레이나도 능력을 쓴 사실을 숨기고 싶으니 둘러대고 있는 걸 테니까.
게다가 이대로 원작처럼 다시 두 사람 사이가 이어진다면, 내가 알려주지 않아도 레이나는 자연스럽게 키네스의 비밀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었다.
“걱정했는데 제가 없는 사이에도 두 분이 시간을 잘 보낸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사실 메이아 님께서 자리를 비우시고 폐하와 단둘이서 있으려니 어색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생각보다 좋았어요. 폐하께서는 다정한 분이신 것 같아요.”
레이나는 들뜬 얼굴로 키네스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했다.
도무지 키네스의 어떤 부분이 다정한 건진 알 수 없지만, 원작 여주가 남주를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이겠거니 했다.
어쨌든 즐겁고 설레 보이기도 하는 레이나의 모습에 마음이 놓이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레이나는 키네스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은데…… 키네스는 어떠려나?’
레이나의 능력을 직접 겪었으니 키네스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바뀌지 않았을까?
키네스는 샤키르의 꽃이 개화하지 않으며 불면증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즉, 둘 사이에 진전이 있을 법한 시기였다.
대충 정황을 파악한 나는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그런데 오늘 라크하가 왜 레이나 님을 찾아왔던 거죠?”
바로, 갑작스러운 키네스의 등장으로 레이나에게 대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아, 맞아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아직 대답을 못 해드렸었죠.”
라크하와 관련된 얘기에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거렸다.
“별일 아니었는데 공작님이 찾아오시더니 어제 테오와 만난 일을 물으시더라고요.”
“테오 씨요?”
“네, 데미안이라는 남자에 대해 궁금해하신 것 같았어요. 어제 저랑 테오, 그리고 데미안. 이렇게 셋이서 저녁 식사를 했거든요.”
레이나의 입에서 나온 상상도 못한 인물의 이름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테오와 데미안이랑 함께 있었다고?’
둘은 접점이라곤 조금도 없는 조합이라 연결 짓기가 어려웠다.
단 한 가지 경우만 제외하고.
‘녹스가 테오의 몸을 차지했을 경우.’
테리투스에게 들은 대로라면 녹스를 소환한 사람은 데미안이니까. 녹스와 데미안이 함께 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음에 메이아 님도 함께 테오랑 만나요.”
“그건 안 돼요!”
나는 레이나의 손을 붙들고 고개를 내저었다. 레이나는 내 반응에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테오 씨랑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왜요……?”
‘테오의 몸에 사람을 잡아먹는 녹스라는 마물이 들어가 있을지도 모르거든요’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말해.’
레이나가 테오와 얼마나 친한 사이인지 직접 내 두 눈으로 봤는데.
그 소식을 알게 됐을 때 레이나라면 바로 테오에게 달려가 확인해 보려고 할 것이다.
잃어버린 친구를 보며 레이나가 얼마나 상심이 클지, 슬퍼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조수를 잃고 무너지듯 울던 펠리르의 모습까지 눈앞에 겹치며 더욱 입이 다물어졌다.
‘아니야, 데미안이 테오와 레이나 사이에 우연히 휘말린 걸 수도 있잖아.’
그냥 자세한 얘기는 하지 말자.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니까. 아니, 추측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레이나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테오 씨는 황궁 기사단이잖아요. 요즘 실종 사건 때문에 바쁘지 않을까요? 잠잠해지면 부르기로 해요.”
“으음…… 그렇긴 하네요. 안 그래도 바빠 보이긴 하더라고요.”
“그나저나 테오 씨는 데미안이라는 분과 어떻게 알게 된 사이래요?”
“글쎄요. 새롭게 사귄 친구라고 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친해 보이더라고요. 사실 기회가 된다면, 저도 그분이랑 친해지고 싶긴 해요.”
“어, 어째서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레이나가 데미안과 친해지고 싶어 할 줄은 몰랐다.
레이나는 엷게 웃으며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보고 있으면 제 동생 단테가 떠올라서요. 괜히 챙겨주고 싶지 뭐예요.”
그러고 보니 데미안은 레이나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눈동자 색깔까지.
“동생과 많이 닮았나요?”
“눈 밑에 점이 있던 것까지 똑같더라고요.”
서늘한 느낌이 심장을 스쳤다. 원작에서는 레이나의 동생에 대해 끝까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니 데미안이 레이나의 동생일 확률이 낮을 텐데…… 어째서 나는 불안한 걸까.
이미 원작 내용이 뒤틀어져서? 혹은 내가 운명을 뒤바꾸고 있어서?
자꾸만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며들던 와중에 두 사람의 관계를 확인할 방법이 떠올랐다.
바로, 아인티아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우연히 서재에서 발견했던 데미안의 일기였다.
“레이나 님. 갑작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가문의 문장을 볼 수 있을까요?”
***
레이나가 떠난 이후에도 나는 초조하게 방을 서성거렸다.
“말도 안 돼.”
아드리엔 남작가의 문장에는 양 날개가 있는 한 필의 말이 그려져 있었다.
이전에 날개 두 짝과 말 한 필이 그려진 가문의 문장을 찾느라 열중했던 탓에 여전히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땐 아이가 그린 그림이라 알아보기 힘들어서 찾다가 포기했었는데…….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맞는다면, 찾아봤던 가문의 문장 중에 가장 비슷했다.
‘게다가 일기에서 데미안의 이름도 선대 공작 부부에게 새롭게 받은 이름이라고 적혀 있었지.’
레이나 동생의 이름은 단테라고 했다. 만약 데미안의 원래 이름이 단테라면?
“그, 그럴 리가 없어. 우연일 거야.”
꽁꽁 이불을 둘러매며 합리화를 해 보려고 했으나, 미처 가시지 않은 불안감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만약 정말 데미안이 레이나의 동생이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테리투스는 녹스를 없애기 위해선 데미안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럼 레이나의 동생을 죽이는 거잖아…….”
하지만 데미안이 죽지 않는다면, 녹스를 없앨 방법은 결국 키네스가 신력을 쓰고 내가 축복을 내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선득해졌다.
“……일단 돌아가면 일기장을 다시 확인해 보자.”
아직은 억측에 불과했다. 일기장을 끝까지 확인하진 않았으니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단서가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리타가 들어왔다.
“메이아 님 앞으로 편지가 세 통이 왔네요.”
“세 통이나요?”
“네, 아인티아에서 왔어요. 어머나, 아가씨와 도련님 그리고 공작님께서 보낸 편지네요.”
“정말요?!”
어둑하고 침침한 공기가 흐르는 내 방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꾸는 소식이었다.
나는 기대에 차서 꽁꽁 싸매고 있던 이불을 집어 던지며 리타에게 다가갔다.
리타의 손에 있는 세 장의 편지를 보고 있자니, 설레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리타에게서 편지 세 통을 받은 나는 순서대로 열어보았다.
[형수님에게. 요즘은 신전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 잘 안 보던 책을 읽게 되는 것 같아. 좀 얌전히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이샤는 옆방에서 형수님이 보고 싶다고 소리쳐. 서로 표출하는 방법이 다른 거겠지? 얼른 형수님이 왔으면 좋겠다. -델카인이.]
델카인의 성격처럼 깔끔하고 단정한 글씨체로 적힌 편지였다. 긴 편지는 아니지만 델카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 미소는 아이샤의 편지를 펼친 순간 순식간에 걷혔다.
[언니에게, ……! ……어. ……나만!! 이상……! ……. -아이샤가.]
꼬부랑 글씨체로 적힌 아이샤의 글씨는 전에도 그랬지만, 알아보기 힘들었다.
느낌표가 많은 걸 보니 화나는 일이나 강조하고 싶은 게 있었던 것 같고…….
한참을 들여다본 결과 마지막 인사는 ‘보고 싶다’는 말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라크하의 편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사랑하는 나의 메이아에게. 다들 그대를 그리워하지만, 그중에 내가 가장 그리워해. 기도의 날에 데리러 갈게.]
급하게 썼는지 짧은 편지였지만 꾸밈없는 내용에 봄바람이 불 듯 마음이 간질거렸다.
편지에 얼굴을 파묻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행복하고, 따스하다.
하지만 내가 이 행복을 온전히 누려도 되는 걸까? 남의 불행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계획을 세우고서.
괜히 레이나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
키네스는 해가 지고 늦은 밤이 되고 나서야 눈을 떴다.
“아드리엔 영애는?”
“저녁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키네스는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따스한 온기를 머금고 있던 손이었다.
-눈이라도 감고 계시는 게 어떨까요? 그럼 잠시라도 주무신 듯한 기분이 나실 거예요.
그 이후로 매번 복잡한 생각으로 얽혀 있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비워졌다.
‘아드리엔 영애가 능력을 쓴 거겠지.’
잠을 못 잔 지 꽤 됐다는 말에 동정심이라도 느낀 걸까. 키네스는 레이나를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상한 여자.”
레이나의 어수룩한 행동에 경계심이 무너져서일까. 레이나가 능력을 써서 잠을 재우는 것까지 허하게 되었다.
레이나는 꾸밈없고 솔직한 사람이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늘 머릿속으로 무슨 일을 꾸미면서 벗어나고 밀어낼 궁리만 하던 메이아와는 정반대였지.’
거기까지 생각한 키네스는 멈칫했다.
메이아만 가질 수 있다면 부질없다고 생각했던 여자였는데. 고작 몇 시간 대화한 것만으로 생각이 바뀔 줄이야.
전에는 레이나를 이렇게까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메이아를 우선시했다.
메이아는 자신만을 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무엇보다 공작과 떨어트리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레이나를 더 자세히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그때, 키네스를 흘긋대던 비에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샤키르의 꽃 포션이 얼마 남지 않은 데다가 대신관 역시 성녀의 편에 선 것 같아 우선 아드리엔 영애의 능력을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비에고의 언질에 키네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내가 잠든 사이에 대신관이 찾아왔나?”
“예.”
“무어라 하던가?”
“유감스럽게도 축복의 의식은 진행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축복의 의식은 어떻게든 대신관이 강경하게 밀고 나갈 줄 알았는데.
메이아가 어떻게 대신관을 구슬렸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역시 보통 여자는 아니야.’
이렇게 된다면, 비에고의 충고대로 하는 게 지금 가장 적절한 조치였다.
하지만 꺼림칙한 기분이 떠나지 않았다. 이 역시 메이아가 바라고 꾸민 일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키네스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메이아를 놓아주는 게 맞을까.”
하지만 그랬다간 아인티아 공작의 입지가 커질 테니 잃는 게 많은 선택지였다.
신력의 제약이 생긴 상황에서 흑마법을 쓰는 아인티아 가문의 힘이 더 세지도록 두는 건 제국의 힘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기분 나쁜 일이었다.
“성녀를 완전히 놓아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오늘 저녁에 황궁에서 온 전보입니다.”
비에고가 곱게 말린 종이를 하나 내밀었다.
그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키네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검은 생명체의 정체가 녹스……라고?”
신학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녹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결 방법이 신력이라는 것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