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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솔직한 사람 (92/136)


92. 솔직한 사람
2022.09.16.



“메이아 님의 생활복은 제 방에 따로 보관하고 있어서요. 금방 챙겨 올게요.”

홀로 방에서 나온 리타는 비에고에게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떴다.

그리고 조금 뒤 리타는 다시 메이아의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의복을 챙겨 온다던 말과 달리 리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의복을 가지고 온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의아해하며 질문한 비에고는 곧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눈가를 찡그렸다.

리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며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괴한, 괴한이…….”

괴한이라는 소식에 비에고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리타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비에고는 리타의 손을 붙들며 차분하게 말했다.


“일단 진정하시고 천천히 얘기해 보십시오. 괴한이 들었다는 겁니까?”

“네, 네. 그런 것 같아요. 갑자기 제 방에서 누가 튀어나오더니…… 흑, 도와주세요!”

“이런, 어딥니까. 안내하십시오.”

“이, 이쪽이에요!”

초조해 보이는 리타의 모습에 비에고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잠시 후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비친 메이아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

키네스는 메이아가 떠난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에고에게 따라가라고 했으니 딴 길로 새지 않고 금방 돌아올 텐데.

워낙 자신을 피하려던 사람이어서 그런 걸까. 키네스는 쉽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비에고의 보고에 따르면 오늘 오전에 대신관과 메이아가 따로 만났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메이아는 대신관까지 구슬린 사람이었다. 비에고라고 메이아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황제 폐하?”

레이나의 부름에 키네스가 고개를 돌렸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느라 레이나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었다.


“……뭐라고 했었지?”

“급한 일이 있으시다면 먼저 가보시겠어요?”

갑자기 먼저 가보지 않겠냐니. 키네스는 의아하게 레이나를 바라본 것도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메이아가 시킨 일인가?’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일부러 자리를 잠시 비우고 그 사이에 레이나를 이용해서 자신을 돌려보낼 작정이었던 걸지도 몰랐다.

의심스러운 마음에 추궁해보려는데, 레이나가 조금 더 빨랐다.


“황제 폐하께서는 바쁘신 분이시잖아요. 그리고.”

레이나가 주먹을 불끈 쥐며 결연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저 혼자 메이아 님을 기다리고 있어도 괜찮아요! 전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내거든요.”

누가 시켜서 하는 말이라기엔 무척이나 진심이 가득 담긴 말투와 눈빛이었다.

키네스는 당황해서 눈을 멍하니 깜빡이다가 피식 웃었다. 예민한 나머지 너무 깊게 생각한 듯했다.


“아직 갈 생각은 없다만.”

“……정말요?”

괜찮다고 할 때는 언제고 레이나가 활짝 웃었다. 환한 레이나의 미소에 키네스는 무심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레이나는 일반적인 귀족 영애와 달리 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키네스는 레이나의 그런 모습이 싫거나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처음에는 흥미로웠고 지금은 편안하게 느껴졌다.

한결 부드럽게 풀린 분위기에 레이나가 긴장이 풀렸는지 술술 말을 이어갔다.


“다행이에요. 실은 줄곧 폐하께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언제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레이나 양이 내게 감사 인사를 할 게 있나?”

“네, 물론이죠. 전에 리베르탄으로 가면 안 되냐는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키네스는 레이나와 대화를 하다가 멈칫했다. 리베르탄에서 폭죽이 터지던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난 탓이었다.

단순히 레이나와 불꽃놀이만 보고 끝날 줄 알았던 하루였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쫓기는 아인티아 쌍둥이들과 만났을 뿐더러, 메이아와 공작은…….

다시 생각해 봐도 유쾌하지 않은 날이었다.

키네스의 표정이 살짝 굳자, 레이나는 그의 눈치를 보았다.


“어…… 음. 그냥 불꽃놀이를 보러 갔으면, 좋았을 텐데요. 제가 괜한 고집을 부렸었죠?”

“이미 지나간 일이니 신경 쓸 필요 없어.”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레이나가 살짝 볼을 붉히며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키네스는 커피 테이블 하나를 두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레이나를 살펴보았다.


‘잠을 재울 수 있는 여인.’

직접 그 능력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한때 메이아를 대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여자였다.

메이아와 공작이 입을 맞추는 걸 본 이후로 조급하고 불쾌한 마음에 레이나는 뒷전이 되어버렸지만.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는데…… 폐하께서는 참 다정한 사람인 것 같아요.”

레이나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리만큼 제 감정에 무척이나 솔직한 사람이다.

키네스는 그런 레이나가 신기했다. 지금껏 키네스가 보지 못했던 유형이었다.

다들 제 앞에서 말을 할 때는 절대 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말이라는 건 상대를 현혹하고, 알게 모르게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이기도 하니까.

선황이 병환으로 서거하고, 11살부터 홀로 황궁에서 자라온 키네스는 모든 걸 숨겨야 했다.

황권을 지키기 위해서 신력이 약해진 걸 숨겨야 했고, 귀족 세력의 수장이었던 선대 아인티아 공작의 술수에 흔들리지 않도록 감정을 감춰야 했다.

아인티아는 흑마법의 시대를 호시탐탐 노리던 가문이었으니까.

어린 황제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방심을 하면 안 됐다. 약간의 실수를 하는 순간, 귀족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제 의지를 잃게 되니 말이다.


“……어떤 말을 할 때 해도 되는 말인지 판단이 안 선다면 주로 안 하는 게 좋은 법이지.”

“헉, 그, 그런가요? 죄송해요.”

레이나가 당황한 듯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런 레이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키네스는 작게 읊조렸다.


“그리고 나는 레이나 양이 생각하는 것만큼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서.”

“네?”

“아무것도. 그나저나 메이아 양이 늦는군.”

“곧 오실 거예요. 아직 시간이 많이 흐르지도 않은걸요.”

“글쎄.”

키네스는 레이나와 생각이 달랐다. 메이아가 나간 지 30분이 훌쩍 넘었다.

여기서 메이아의 방까지는 거리가 그렇게 멀지도 않았을 뿐더러, 연회 드레스를 입는 것도 아니니 환복하는 데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리가 없었다.

이대로 비에고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지. 혹은 티타임 자리를 파하고 메이아의 방을 찾아갈지.

이런저런 수를 생각하던 키네스는 머리가 지끈거려 눈가를 꾹 눌렀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피곤하군.”

그 말을 들은 레이나가 고개를 번뜩 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도 레이나 아드리엔, 이 여자는 대화에 빈틈이 생기는 걸 견디지 못하는 듯했다.


“혹시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휴식을 취해도 피로가 풀리지 않으시나요?”

마치 의원이라도 되는 양 묻는 모습에 키네스는 피식 웃었다.


“그대가 피로를 풀 방법이라도 알고 있는 건가?”

“네, 발라이 출신의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가 피로를 푸는 마사지를 알려줬었거든요. 그런데 효과가 참 좋더라고요.”

발라이는 사시사철 덥고, 특이한 전통과 문화를 지닌 나라였다. 하지만 제르디아 제국과 거리가 제법 멀어 수도에 지내는 사람 중에 발라이 출신의 사람은 드물었다.

키네스는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어떤 마사지인지 궁금하긴 하군.”

“손 마사지인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옆에 앉아서 해드릴까요?”

키네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나는 기뻐하며 그의 옆에 앉았다. 레이나에게서 풍기는 상큼한 향기가 코끝을 감돌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레이나가 키네스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더니 손바닥 안쪽부터 손가락 끝까지 천천히 주물렀다.

무언가를 배우긴 한 건지, 제법 열중하며 주무르고 있긴 했다.


 
애석하게도 피로가 풀리는 느낌은 전혀 없지만.


“저는 그 친구에게 받아 보니 몸이 노곤해지면서 졸리더라고요. 황제 폐하께도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어떠신가요?”

레이나가 기대를 가득 품은 눈으로 키네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차마 그 눈을 보고 아무렇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던 키네스는 그럴듯하게 둘러댔다.


“……난 불면증이 있어서 잘 모르겠군.”

“아…… 언제부터 불면증이 있으셨어요?”

“오래전부터. 최근 들어서 불면증이 심해져서 잠을 못 잔 지 꽤 됐어.”

그래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효과는 있는 걸까. 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레이나의 물음에 편하게 답하고 있었다.


“눈이라도 감고 계시는 게 어떨까요? 그럼 잠시라도 주무신 듯한 기분이 나실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군.”

키네스는 살며시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고작 마사지로 불면증을 해결할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키네스가 딱 거기까지 생각을 한 그 순간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그 이후로 어떠한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

비에고가 감쪽같이 리타의 연기에 속으면서 비에고는 한참 후에야 리타와 함께 내 방으로 돌아왔다.


“리타 씨의 방에 괴한이 들었다고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나는 모르는 척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물었다. 비에고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신전의 호위를 불러 주변을 수색하라 명령을 해두었습니다.”

신전의 호위를 부르느라 시간이 꽤 지체된 모양이었다. 비에고의 곁에 있던 리타가 일이 커질까 걱정이 되었는지 허겁지겁 말을 꺼냈다.


“그래도 다행히 사라진 물건은 없었어요! 어쩌면 다른 사람이 방을 착각한 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도의 날을 앞두고 외부인이 많아지니 이런 일도 생기는군요. 무섭네요.”

나는 리타와 함께 짠 괴한 소동에 조금 더 살을 붙이며 마무리했다.

그렇게 나름 1시간 넘게 시간을 끈 것만으로 만족하며 의복을 갈아입고 티타임 장소로 돌아갔다.

끼이익.

노크를 하려던 그때, 문이 천천히 열렸다.

방에서 나오던 레이나가 나와 비에고를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쉿, 하고 검지를 제 입가 근처에 가져다 댔다.


‘왜 그러는 거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하자 레이나가 방안을 가리켰다.

레이나가 가리킨 방을 바라보자, 소파에 앉아 잠들어 있는 키네스가 보였다.

그 모습에 나와 비에고는 깜짝 놀랐다.

샤키르의 꽃 없이는 키네스가 잠들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방금 막 잠드셨어요.”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레이나는 홀로 어색하게 웃으며 서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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