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운명의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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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운명의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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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운명의 상대
2022.09.12.
라크하는 녹스가 레이나의 몸을 차지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드리엔 남작가를 찾아갔다.
그런데 뜻밖의 정보를 얻었다.
-네, 이름이 데미안이라고 했어요. 기회가 된다면 또 보고 싶네요. 보고 있으면 괜히 제 동생이 떠오르더라고요.
지나가는 듯 흘린 말이었지만, 그냥 넘길 일은 아니었다. 짚이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롬, 혹시 데미안의 노예 문서가 어디에 있지?”
“재산이나 소유권 관련 문서는 집무실에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보십시오.”
시롬은 집무실의 금고를 뒤적였다. 라크하는 책상을 검지로 톡톡 가볍게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데미안은 이상하리만큼 '가족'이라는 것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다.
-공작님께서 나를 수양아들로 받아주실 거야. 우리는 가족이라고 하셨거든.
선대 공작이 데미안을 세뇌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긴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대 공작에 대한 데미안의 집착은 이상하리만큼 심해졌으니까.
“어, 어라…… 왜 없지?”
그때, 금고를 뒤적거리던 시롬이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라크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노예를 팔아넘기지 않는 이상 노예 문서는 보관해야만 했다.
“폐기했을 리가 없을 텐데?”
“예, 예. 분명 그럴 텐데…… 데미안의 이름으로 된 노예 문서가 없습니다.”
결국, 라크하가 직접 나서서 시롬이 뒤지던 금고를 살펴보았다. 재산과 소유권에 관련된 문서들이 기간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시롬의 말대로 데미안의 이름으로 된 노예 문서는 없었다. 하지만 데미안이 저택으로 왔던 시기에 체결된 노예 문서가 딱 한 통 있었다.
시롬이 라크하의 손에 있는 서류를 흘긋거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데미안이 아니라 단테라는 녀석의 노예 문서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법 노예 시장에서 데려온 녀석인가 봅니다. 정보가 자세히 기재되어 있진 않군요.”
일반적인 노예 문서와 달리 기재되어 있는 내용이 간단했다. 이름과 성별, 계약을 체결한 날짜 그리고…….
라크하는 뒷장을 넘겨보았다. 그러자 특이 사항이라는 항목이 추가 기재되어 있었다.
<마법에 자질을 보임.>
그 당시 마법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 아이는 데미안뿐이었다.
“이 녀석이 데미안일 확률이 높아.”
“특이 사항을 보면 그럴 것 같습니다만…… 단테라는 이름이 마음에 걸리긴 합니다.”
단테. 그 이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라크하는 레이나에게 들은 말을 읊조렸다.
“오늘 아드리엔 남작 영애가 데미안이 제 동생과 닮았다고 하더군.”
“으음…… 그렇습니까?”
시롬은 무심코 대답했다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쩍 벌렸다.
“헉, 그, 그러고 보니 이름도 같지 않습니까?”
라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데미안은 불법 노예 시장에서 데려왔다. 몇십 년 전에 실종됐던 단테 아드리엔이 납치되어 불법 노예 시장에서 거래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불법 노예 시장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가릴 것 없이, 돈이 될 것 같으면 거래를 하는 곳이니까.
“단테 아드리엔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그래, 아드리엔 남작가 주변에도 기사를 배치하라고 하고.”
이미 데미안은 레이나와 한 번 만난 사이였다.
만에 하나 데미안과 레이나가 친족 관계라면, 그리고 데미안이 그 사실을 눈치챘다면…….
‘반드시 찾아올 거야.’
아드리엔 남작가로. 데미안은 가족에 대해 굉장한 집착을 보이니까.
그 점을 이용하면, 데미안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꽁무니도 잡지 못했던 데미안을.
“음?”
데미안의 노예 문서를 바라보던 라크하의 시선 끝에 편지 두 장이 보였다.
라크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 편지들은 뭐지?”
“공작님께서 외출하신 사이에 도련님과 아가씨께서 메이아 님께 보내달라며 쓴 편지입니다. 사용인을 시켜서 지금 보낼 생각입니다.”
시롬이 편지를 챙기며 인사하고 나가려던 때였다.
“이대로 간다고?”
소름이 오싹 끼치는 살벌한 목소리에 시롬이 천천히 뒤돌았다. 무엇을 실수한 건지 수많은 생각이 시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 편지도 챙겨서 가야지.”
하지만 정작 뒤이어진 말은 단순했다.
***
생각보다 이르게 시작된 티타임이었지만, 순조롭게 찻잎과 따뜻한 물, 그리고 다과가 준비되었다.
원래 레이나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고 둘러대어 레이나까지 자연스럽게 티타임에 함께할 수 있었다.
“향이 무척 진하면서도 좋네요. 이게 무슨 차일까요?”
레이나가 홀짝 차를 마시더니 취향에 맞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찻잔을 들어 맛을 보았다. 향이 진하면서도 씁쓸하지 않고 입안을 부드럽게 감돌았다.
차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때, 키네스가 레이나의 질문에 대신해서 대답을 해주었다.
“라파네 꽃잎을 말려서 만든 차이지.”
“맞아요, 라파네 꽃차네요.”
나는 작게 탄성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인티아 공작가에서 지내면서 한 번 마셔본 차였다.
하지만 레이나는 차 이름이 생소한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마셔보는 차예요. 이름도 참 예쁜 차네요.”
“처음 마셔봤다니 신기하군. 라파네 꽃차는 귀족들 사이에서 흔한 차이거늘.”
“아아, 그렇군요…….”
레이나가 어쩐지 씁쓸하고 시무룩한 얼굴로 눈을 아래로 떨궜다.
키네스 저 남자가 정말. 아직 원작처럼 이어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레이나의 기를 죽일 일이야?
그나마 다행인 건 레이나는 나보다 어색한 분위기를 못 견디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침묵도 잠시,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레이나가 입을 열었다.
“찻물도 푸른빛이 도니 예쁘네요. 전 푸른색을 좋아하는데, 두 분은 무슨 색을 좋아하세요?”
원작에서도 이런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고로 드디어 레이나와 키네스의 공감대를 만들 기회가 찾아왔다는 말씀!
“어머! 레이나 님은 푸른색을 좋아하세요? 저는 보라색을 좋아해요.”
나는 일부러 ‘푸른색’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키네스가 좋아하는 색깔도 푸른색이니 분명 레이나와 공감대가 맞을 것이었다.
“그대는 레이나 양 앞에서는 활발한 편이군.”
하지만 키네스는 흥미로운 눈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무슨 색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왜 내 평가를 하고 있는 건데?
당황한 나는 황급히 키네스를 향해 다시 물었다.
“폐, 폐하께서는 어떤 색을 좋아하세요?”
“푸른색을 좋아한다만.”
“레이나 님과 같은 색을 좋아하시는군요! 두 분께서 좋아하는 색상이 같다니 신기하네요.”
나는 레이나와 키네스를 번갈아 보며 활짝 웃었다. 이전에 레이나에게 키네스와 관련된 얘기를 꺼냈을 때 마음이 아예 없는 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 레이나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레이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풀고 슬쩍 미소 짓긴 했으나, 그것도 찰나였다.
결국, 레이나마저도 입을 다물며 티타임 자리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어쩐지 더 분위기가 더 가라앉은 것 같다. 홀로 웃고 있는 내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티타임 자리가 이대로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잽싸게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그, 그러고 보니! 축제 때 두 분께서 함께 불꽃놀이를 보러 가셨죠?”
원작 속에서 축제 때 레이나와 키네스 사이에서 낭만적인 분위기가 연출된 걸 생각하고 꺼낸 말이었다.
나름 괜찮은 대화 주제라고 생각했는데, 레이나와 키네스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그러려고 했었지. 불꽃놀이는 제대로 못 봤지만.”
“맞아요, 폐하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시느라…… 아쉽게도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두 사람 사이가 저렇게 서먹한 거구나. 나는 그제야 왜 두 사람의 관계가 원작과 다르게 흘러가는지 알게 되었다.
불꽃놀이야말로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이어지기 시작한 계기였다. 그런데 그 계기가 사라졌을 줄이야.
‘역시 둘은 사랑에 빠질 기회가 없었던 게 맞았어.’
내 추측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불안이 한층 걷히고 의욕이 샘솟았다.
여기서 내가 원작의 기억을 잘 살린다면 두 사람의 사이를 순탄하게 이어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레이나의 접시에 놓인 레몬 타르트를 바라보며 은근슬쩍 물었다.
“레이나 님, 혹시 레몬 타르트를 좋아하세요?”
“무척이요. 제가 새콤한 디저트를 참 좋아하거든요.”
키네스도 새콤한 디저트를 좋아하니 그 점을 노린 것이었다. 나는 레이나에게 레몬 타르트를 내밀면서 키네스의 눈치를 살폈다.
‘어때? 레이나가 운명의 상대라는 느낌이 들지 않니?’
키네스는 시큰둥하게 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관심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급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두 사람이 나에게만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내 존재가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 듯했다.
눈을 데굴 굴리며 고민하던 그때, 내 앞에 놓인 찻잔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을 이으려고 입을 바쁘게 움직이느라 처음에 한 입 마신 이후로 마시지 않은 차였다.
‘그래, 이걸 활용하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식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삐끗. 차를 마시려던 나는 실수인 척 찻물을 내가 입고 있는 옷에 흘렸다.
“앗!”
“괘, 괜찮으세요, 메이아 님?”
“이런……! 괜찮나?”
“네, 괜찮아요. 찻물이 뜨겁지는 않아서요.”
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냅킨으로 쏟아진 차를 닦았다. 하지만 옷은 이미 푸른색의 찻물로 물들어 있었다.
하필 오늘 입은 드레스가 하얀색이어서 더욱 적나라하게 티가 났다.
“안 지워지네요. 이대로 티타임 자리를 마무리하긴 아쉬운데 옷을 갈아입고 와도 될까요?”
“아, 네! 물론이죠. 메이아 님. 얼른 갈아입고 오세요.”
나보다 더 놀란 레이나가 키네스가 허락하기도 전에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래, 다녀오는 게 좋겠군. 비에고와 함께 다녀오도록 해.”
아니, 그건 조금 곤란한데.
레이나와 키네스가 오랫동안 대화하도록 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에고가 나를 따라붙는다면, 시간을 오래 끌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거절한다면, 키네스의 의심을 사겠지.’
결국, 지금은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네, 금방 다녀올게요.”
***
비에고는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제, 제가 얼른 갈아입을 의복을 준비할게요.”
찻물에 젖은 내 옷을 보고 경악한 리타가 허둥지둥거리며 옷장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런 리타를 말렸다.
“아뇨, 리타 씨. 급할 필요 없어요. 천천히 준비하셔도 돼요.”
“네? 그게 무슨…….”
나는 리타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내 말을 전부 들은 리타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끌어야 하신다는 거죠? 그럼 메이아 님의 생활복이 제 방에 있다고 하는 건 어떨까요? 한 번 착용하신 옷이시긴 하지만 두어 벌 정도는 있으니까요.”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긴 한데…… 음.”
리타가 제시한 방법도 시간을 끌기에 좋긴 했다. 다만, 그걸로 시간을 끄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은 레이나와 키네스의 대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게 관건이었으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작게 탄성을 터트리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리타 씨가 생각해낸 방법을 응용하면 더 좋은 작전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