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내가 그대를 얼마나 원하는지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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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내가 그대를 얼마나 원하는지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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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내가 그대를 얼마나 원하는지 알잖아
2022.07.11.
낡은 침대 위로 달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방.
“데미안.”
얇은 옷차림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우아하게 걸어오더니 데미안의 앞에 멈춰 섰다.
여인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데미안의 가슴팍을 유혹적으로 짚더니 입술을 부드럽게 끌어올려 웃었다.
“네 몸을 주면 안 돼?”
“장난은 그만 쳐.”
데미안은 눈썹을 찡그리며 여인의 손을 쳐냈다.
짝!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방안에 가득 울렸다.
얼마나 세게 내친 건지 여인의 손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상 하나 찡그리지 않은 채 쯧, 혀를 차고는 털썩 침대에 앉았다.
“재미없다니까.”
데미안은 투덜거리는 여인을 무감하게 쳐다보았다. 데미안의 눈에는 여인의 등 뒤로 일렁이는 검은 기운이 선명하게 보였다.
녹스가 그녀의 몸을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데미안은 삐딱하게 녹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금기의 흑마법을 푸는 방법은 언제 알려줄 거야?”
“알려줬잖아? 내가 힘을 기르면 전부 해결된다고.”
“그게 대체 언제인 건데?”
“음…….”
녹스가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데미안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더니 콧방귀를 뀌며 턱을 괴었다.
“아직은 멀었어. 성급할 필요는 없잖아? 그냥 이 순간의 여유를 즐겨.”
데미안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자신의 속사정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양 구는 모습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대체 내가 언제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데? 애초에 내가 너를 소환한 건 오로지 그분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내가 네 봉인을 풀어서 소환했으니 전적으로 내 말을 따라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순간, 녹스가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너는 날 그곳에 버리고 떠났잖아.”
“그건 네가 움직이지 않으니까…….”
살벌해진 녹스의 기세에 데미안은 주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몇천 년 동안의 봉인이었어. 그 망할 테리투스 때문에 허기지고, 고통스럽고, 움직일 수도 없는 좁디좁은 그곳에서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거기서 풀려나면 뭐 해, 나는 조금도 움직일 힘이 없었어.”
검은 기운이 발밑으로 흐르며 데미안의 발목을 휘감았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은 데미안은 얼어붙었다.
“데미안, 너는 내 모습이 처음에 얼마나 처참했는지 직접 봤으니 알겠지.”
데미안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존재를 소환했던 순간이었으니까.
라크하에게 맞설 힘도, 선대 공작 부부를 구할 힘도 없던 그때.
데미안은 선대 공작 부부를 구할 방법을 알아보다가 녹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몇천 년 전, 신의 힘과도 맞먹었던 마물이라고 적혀 있었지.’
녹스만 있다면 북쪽 숲에 있는 별장 앞을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는 아인티아의 기사들을 무찌르고, 흑마법에 걸려 있는 공작 부부를 구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데미안은 수백 개의 고서를 뒤져보았다.
결국, 데미안은 녹스를 소환하기 위해서 금기의 흑마법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걸 알아냈다.
녹스를 봉인해 둔 보석이 지도에 표기도 되어 있지 않은 동굴에 있다는 것도.
그렇게 데미안은 겨우 녹스가 봉인된 보석을 찾아내어 북쪽 숲에서 녹스를 소환했다.
하지만 손바닥 정도의 검은 덩어리에 불과한 생명체를 보며 얼마나 김이 샜던가.
“……살아 있는 건지, 죽어 있는 건지 분간도 되지 않았어.”
데미안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음,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몰랐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네가 날 두고 간 게 다행이지.”
녹스는 얼어붙은 데미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물러났다.
“덕분에 테리투스의 기운을 지닌 인간을 만나면서 정신이 들었거든.”
녹스는 펠리르의 가게에 있었을 때를 떠올리며 조소했다.
테리투스의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라 소환된 이후로 처음 의지를 갖고 움직였다.
아직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별 볼 일 없는지도 모르고.
녹스는 기지개를 쭉 켜며 등을 돌렸다.
“어쨌든, 날 소환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너를 다시 찾은 거야. 안 그랬으면 진작 떠났지 않겠어?”
“그렇긴 한데…….”
이상하게도 데미안은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늘 자신을 탐색하는 듯한 눈빛, 그리고 처음 만났던 순간,
-그럼 네 몸을 나한테 줄래?
녹스가 자신에게 했던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질문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녹스를 처음 만난 날, 녹스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면 그대로 몸을 넘겨줬을 것이다.
[녹스가 몸을 지배하게 된다면, 의지를 잃고 휘둘리게 된다.]
데미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녹스를 바라보았다. 녹스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긴 하나 아직은 미심쩍었다.
녹스가 자신을 향해 돌아본 순간, 데미안은 의심의 눈빛을 순식간에 지워냈다.
“그래, 조금만 더 믿고 기다려 볼게.”
“좋은 자세야. 어차피 나도 시간을 끌 생각은 없거든. 널 도와주는 일 외에도 죽이고 싶은 인간이 둘이나 있다고 했잖아?”
“알겠어.”
데미안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다시 등을 돌린 녹스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말아 올렸다. 살기가 느껴지는 미소였다.
***
해가 어슴푸레 뜨는 새벽, 무언가가 팔을 압박하는 느낌에 잠에서 깨어난 나는 아직 몽롱한 눈을 떴다.
“우웅.”
아이샤가 내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웅얼거렸다. 아이샤의 옆에는 델카인까지 있었다.
‘애들이 언제 내 방에 들어와서 잠든 거지? 분명 어제…….’
순간, 어제 라크하와 나눴던 낯간지러운 대화와 키스가 떠올랐다.
일어나자마자 물 밀리듯 떠오르는 기억들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미, 미쳤…….”
“쉿.”
무심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나는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돌리자 문 앞에 서 있는 라크하가 보였다. 그와 눈을 마주한 것도 잠시였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라크하의 입술로 향하며 심장이 바쁘게 뛰었다.
‘진정하자, 진정해.’
나는 심장 부근을 꾹 눌러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까치발로 조심조심 걸어 라크하의 앞에 다가간 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애들은 언제 왔어요?”
“자정쯤 잠을 못 자겠다며 찾아왔어.”
“아아…….”
납치를 당할 뻔했던 일이 크게 기억에 남은 듯했다. 나는 곤히 잠들어 있는 쌍둥이들을 살펴보았다.
아직 어린아이들이니 충격이 컸을 것이다.
“애들이 괜찮아질 때까지 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응, 그렇지 않아도 수업을 중단하라고 했어. 그리고…….”
커다란 손이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넘겼다.
“그대도 그날 꽤 충격이 컸을 테니 좀 쉬어야지.”
그의 말에 자연스럽게 녹스에게 쫓기던 순간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정한 손길 덕분일까. 크게 공포스럽지 않고 안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엷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로 조수도, 녹스도 어떻게 됐는지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라크하는 녹스에 대한 보고를 들은 게 있으려나?
라크하에게 물어보려는데, 그가 내 미간을 가볍게 눌렀다.
“쉬라고 했더니 또 머리를 바쁘게 굴리고 있는군.”
“뭐, 크게 힘든 것도 아닌데요.”
“매번 걱정이 많아 보이니 아예 머리를 비우고 쉬라는 의미야.”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요. 그 이후로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나는 내 미간을 누르고 있는 라크하의 손가락을 잡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라크하와 티격태격하던 때였다.
“우웅, 언니…….”
나를 부르는 아이샤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나는 퍼드득 떨며 고개를 돌렸다.
아이샤는 아직 천사 같은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잠꼬대로도 나를 찾는 모습이 귀여워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꿈에서 제가 나오기라도 했나 봐요.”
그리고 다시 라크하를 바라보던 그 순간이었다.
쪽.
라크하가 내 이마 위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당황한 나는 내 이마를 붙잡고 입을 뻐끔거렸다.
“지, 지금 애들도 있는데…….”
라크하가 짓궂게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애들 없는 곳에서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걸까?”
매혹적인 미소에 멍하니 라크하를 바라보던 나는 흐트러지는 정신을 바로잡았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럼 언제 그럴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거야?”
“……!”
라크하가 내 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값비싼 공예품을 만지기라도 하듯 섬세한 손길이었다.
“내가 그대를 얼마나 원하는지 알잖아.”
그가 고개를 내리자 귓가에 입술이 살짝 스쳤다. 나직한 목소리가 꿈결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라크하는 내게 어렴풋이 자신의 마음을 말한 적이 있을 뿐더러,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손짓도, 목소리도 전부 사랑에 빠진 남자의 것이었으니까.
“그대도 나와 같을까?”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맞닿자 입술 위로 열기가 고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약한 열기는 차차 몸집을 키워 얼굴과 내 머릿속까지 데웠다.
이제는 나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말해 보려던 그때였다.
똑, 똑.
노크 소리가 내 말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는 순식간에 라크하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리타였다.
“이것만 두고 나갈게요…… 오?”
쿠키를 들고 들어온 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와 라크하를 번갈아 보았다.
나와 라크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읽은 듯한 눈치였다.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려 침대에 누워 이불을 확 덮었다.
내 거친 움직임에 아이샤와 델카인이 바르작거렸으나 차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귓전에 가득 울리고 있었으니까.
***
아침에는 잠들어 있는 쌍둥이들 때문이라도 진지하게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이번에는 라크하한테 휘말리지 않고 녹스 얘기를 꺼내는 거야.’
나는 고급스러운 집무실 문을 무섭게 노려보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비장하게 노크를 했다.
“들어와.”
안에서 라크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는 펠리르가 보였다.
하지만 라크하와 대화하면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메이아?”
라크하는 내가 집무실을 방문할 줄은 몰랐는지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어쩐 일이야?”
“녹스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는데…… 지금 그 얘기를 하고 계셨던 걸까요?”
내 물음에 라크하는 펠리르를 힐끗거리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긴 하다만-.”
“아가씨!”
줄곧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펠리르가 벌떡 일어나더니 달려와 내 손을 붙잡았다.
“아가씨는 내 조수가 살아 있는 거 못 봤어?”
“아…….”
그 얘기를 하고 있었구나. 라크하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제스처와 펠리르의 행동만으로도 대충 상황 파악이 되었다.
결국은 조수를 발견하지 못했던 거겠지. 그리고 나 역시 녹스에게서 도망치느라 조수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나는 살며시 펠리르의 눈을 피했다.
“죄송해요.”
“…….”
펠리르가 천천히 내 손을 놓더니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털썩 쓰러지듯 소파에 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펠리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제.”
황제? 펠리르의 입에서 터져 나온 뜻밖의 말에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그가 고개를 번뜩 들었다.
펠리르의 눈빛이 범상치 않았다.
“황제를 찾아가서 알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