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좋은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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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좋은 기회
2022.06.20.
빛 한 줌이 겨우 들어올 것 같은 폐가.
촛불 몇 개로 겨우 시야가 트인 어둑한 곳에 덩치가 큰 남자가 들어왔다.
데미안은 무감하게 남자를 쳐다보다가 그의 어깨에 들려 있는 조그만 아이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성공한 거야?”
“일단 남자아이는 잡아왔습니다. 두 아이가 각자 도망친 바람에 다른 쪽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한 번 봐.”
남자가 바닥에 아이를 내려놓자 데미안이 아이의 눈을 가리고 있는 두건을 벗겼다.
보라색 눈동자를 확인한 순간, 데미안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아…… 드디어!”
이렇게 빨리 그날이 올 줄이야.
밖으로 유인하긴 했지만 쌍둥이들을 납치할 수 있을지 확신은 하지 못했다. 보통 아이들과 달리 영리한데다가 신체적인 능력도 남달랐으니까.
데미안은 잔뜩 들뜬 얼굴로 델카인과 눈을 맞추었다.
“안녕, 델카인. 나를 기억해?”
델카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델카인이 데미안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늘 데미안 혼자 쌍둥이들을 몰래 지켜보곤 했으니까. 부러움과 질투를 담은 눈으로.
데미안도 뒤늦게 터무니없는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닫고 말을 바꾸었다.
“음…… 아니지, 역시 모르겠지. 뭐,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널 죽이면 그분들이 속상해할 테니까.”
데미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세워 폐가로 복귀한 이들을 둘러보았다.
“여자아이 쪽은 아직 어떤 소식도 없어?”
“네, 아직 들어온 소식은 없습니다.”
“놓치면 곤란한데…….”
아이샤가 아인티아의 기사들에게 자신이 유인당한 위치를 알린다면, 은신처가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때였다.
쾅!
문이 열리며 데미안이 매수한 남자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데미안 님! 지금 아인티아 공작가에서 리베르탄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아, 아이들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데미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아이샤를 놓쳤다는 건가? 하지만 데미안은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다.
‘예상보다 빨라.’
아이샤가 도망쳤다고 하더라도 저택까지 거리가 꽤 멀었다.
벌써부터 아인티아의 기사가 리베르탄에 도착해 수색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꼬리가 잡혔다는 의미였다. 데미안이 빌렌을 보며 질문했다.
“흔적은 하나도 빠짐없이 지우고 온 거겠지?”
“네, 네! 물론입니다! 아이들이 다른 사용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나가는 것까지 봤습…… 아. 설마…….”
빌렌은 확신하며 말하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고는 허리를 푹 숙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이들을 유인했던 장소가 적혀 있던 쪽지를 회수하지 못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건 도련님께서 챙겨 들고 나갔을 텐데…….”
데미안의 시선이 느릿하게 델카인에게 향했다. 데미안이 턱짓하자 남자들이 델카인의 몸을 뒤졌다.
“아, 아무것도 없습니다.”
“젠장.”
욕을 중얼거린 데미안이 황급히 외쳤다.
“지금 당장 리베르탄에서 벗어난다!”
수색망이 이곳까지 좁혀지기 전에 이 장소를 벗어나야 했다. 그렇게 서둘러 나가려던 때였다.
“……곳……뒤져…….”
문밖으로 말소리와 수많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의 행동이 멈추었다.
이미 수색망이 좁혀 들어온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데미안의 시선이 천천히 델카인에게 향했다.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얌전히 숨어 곱게 협상을 하려던 방법에서, 험한 방법으로.
***
라크하의 품에 안겨 울다가 지친 아이샤는 다른 기사의 품에 안겨 저택으로 돌아갔다.
델카인을 찾기 위해 남은 사람은 메이아와 라크하뿐이었다.
“하아…….”
메이아는 리베르탄의 거리를 걸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기절할 정도로 우는 아이샤는 처음 본 탓이었다.
아이샤가 울던 모습을 떠올리자 마음이 시큰거렸다. 오늘 쌍둥이들에게 외출을 하겠다고 말을 하고 나왔다면 아무런 일도 없었을 거라는 사실이 계속 메이아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대로 풀죽어 있다고 해도 나아지는 건 없었다. 말썽꾸러기 같은 아이샤의 해맑은 미소를 되찾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은 델카인이었으니까.
‘꼭 델카인을 찾아서 돌아가는 거야.’
메이아는 어떻게든 델카인을 찾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리베르탄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그때, 아인티아의 기사가 오른쪽에 있는 길목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공작님, 수상쩍은 움직임을 발견했으나 섣불리 움직일 수 없어서 일단 보고 드립니다. 얼른 와보시는 게 좋을 것-.”
“위치를 말해. 너는 메이아와 함께 천천히 오도록 하고.”
라크하는 곧장 기사의 말을 끊었다. 더 들을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기사는 라크하의 명령에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라크하는 기사에게 한 번 더 메이아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뒤에 기사가 알려준 위치로 빠르게 달렸다. 머지않아 폐가로 추정되는 건물이 나타났다.
라크하는 기척을 죽인 뒤 폐가 주변을 잠복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리고 기사들이 포위망을 좁힌 순간, 라크하의 명령이 떨어졌다.
“열어.”
벌컥.
기사들이 순식간에 폐가로 침입해서 거점을 확보했다.
“항복하라!”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하지만 폐가에 있던 무리는 기사들이 쳐들어올 거라는 걸 예상한 듯 침착했다. 개중 복면을 쓴 남자의 팔에는 겁에 질린 델카인이 붙들려 있었다.
기사들은 델카인을 잡고 있는 남자에게 검을 겨누었다.
“네 이놈! 얼른 도련님을 놓거라!”
금방이라도 공격할 것처럼 위협적인 기세였으나 남자는 여유로웠다.
남자가 코웃음을 치더니 단검을 델카인의 목으로 들이댔다.
“협박을 하는 쪽이 잘못된 것 같은데…… 이쪽 도련님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물러서는 게 좋을 거야.”
남자는 호박색의 눈동자로 자신을 둘러싼 기사들을 한 바퀴 훑었다.
그리고 남자의 눈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었다. 그는 그곳을 바라보며 눈을 접어 웃었다.
“그렇지, 라크하?”
“데미안.”
라크하는 목소리만으로 상대를 알아차렸다. 모를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불과 며칠 전에도 한 번 부딪혔으니까.
게다가 그는 이 사건을 벌인 장본인도 데미안이라고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데미안은 단검을 델카인의 목 밑에 더욱 가까이 가져갔다.
“어때, 라크하? 네가 그때 내 제안을 거절해서 일어난 일이야.”
하지만 라크하는 눈썹만 꿈틀할 뿐,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 봤자 좋을 것 하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데미안의 행동이 한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쇼맨십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크하는 고요한 눈으로 데미안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날 거절을 한 거라고 생각해?”
“……뭐?”
“네가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나는 금기의 흑마법을 풀어달라는 네 제안을 들어줄 수가 없어.”
단호한 라크하의 대답에 단검을 잡고 있는 데미안의 손이 살짝 떨렸다.
“웃기지 마. 지금 네 동생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야? 그딴 헛소리에 내가 넘어갈 것 같아?”
“헛소리가 아니라는 건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입술을 잘근 깨문 데미안이 라크하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라크하는 제 손에 잡힌 델카인을 보자마자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럼…… 왜 내 제안을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한 거지?”
라크하는 일부러 데미안과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겁에 질린 델카인을 마주하는 순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주먹부터 나갈지도 몰랐다.
하지만 라크하는 그게 데미안의 악행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금기의 흑마법을 풀 수 있다는 데미안의 희망을 짓밟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내가 금기의 흑마법을 풀지 못하니까.”
데미안이 헛웃음을 흘리며 빈정거렸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그 서적에는 시전자만이 풀 수 있다고 적혀 있었어.”
라크하는 침착하게 데미안을 관찰했다. 역시 데미안은 아직 시전자만이 풀 수 있다는 말의 제대로 된 의미를 모르는 듯했다.
금기의 흑마법은 시전자만이 풀 수 있다. 그 말은 시전자가 죽어야 금기의 흑마법이 풀린다는 의미였다.
“맞아, 그렇게 적혀 있지만 난 풀지 못해. 아마 너도 그럴 테고.”
“궤변이야. 그러니 빨리 풀어.”
“불가능해.”
“풀라고! 내가 못 죽일 것 같아?”
데미안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목청을 높였다.
데미안의 단검이 델카인의 목을 얕게 베었다. 델카인의 목에 엷게 그어진 실선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흐윽.”
줄곧 입을 꾹 다물고 용감하게 버티고 있던 델카인의 입에서 결국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라크하는 뛰어들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턱에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내 말이 거짓인 것 같으면 네가 금기의 흑마법을 쓰고 풀어보면 되는 일이지.”
“내가 왜 그런 소모적인 일을 해야 해?”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저 말이 거짓인가, 진실인가. 그 사이에서 데미안은 흔들렸다.
라크하는 쌍둥이들을 제 목숨처럼 아끼는 사람이다. 데미안은 어렸을 때부터 그를 봐왔기에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금방이라도 델카인을 깊숙이 찌르려고 하는데도 라크하가 한결같이 거짓말을 칠 리가 없었다.
결국, 풀지 못하겠다는 저 말은 진실일 가능성이 컸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데미안은 패닉에 빠졌다.
“그, 그럴 리가 없어. 그럼 나는…… 절대 그분들을 구할 수가 없다는 거야……?”
데미안이 혼란스러워하자 델카인을 잡고 있는 팔에 힘이 점차 빠졌다.
빈틈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챈 라크하는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델카인을 구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
뚜벅, 뚜벅. 어두운 리베르탄 길목에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음침한 곳에 어울리지 않는 여리여리한 여자가 여유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가자 길거리에 나와 있던 리베르탄의 주민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도망쳤다.
“흐음……. 다른 곳처럼 적당히 사냥을 할 걸 그랬나.”
하지만 그러기엔 이곳이 너무 탐이 났는걸. 여자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낮에도 조금 어둑한 편이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경을 쓰지 않는 곳이라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나 아쉽지만 여기도 이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아니지, 몸을 바꿀까? 여자가 천연덕스럽게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때였다.
“잠시 쉬었다가 갈까요?”
“아뇨, 괘, 괜찮아요.”
이곳과 어울리는 대화가 아니었다. 여자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백금발의 여인이 보였다. 백금발의 여인은 꽤 지친 듯 벽을 잡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순간, 여자의 눈이 번뜩이며 머금고 있던 미소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어쩜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지?”
굳이 찾아다닐 필요도 없이 여기서 테리투스의 잔재를 보게 될 줄이야. 그녀에게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