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
(66/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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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
2022.06.17.
“뭔가 음침하네요…….”
한번 골목길에서 습격을 당한 일이 있었던 탓일까. 골목길을 걷는 내내 자그마한 소리만 들려도 온 신경이 곤두섰다.
“으으…….”
괜찮아. 옆에 라크하가 있잖아.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이 세계 최고의 흑마법사라고. 괴한이 나타나도 순식간에 라크하가 처리할…….
바스락.
마음을 놓기 무섭게 무언가가 앞에서 튀어나왔다.
“……!”
나는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퍼드득 떨며 라크하의 팔을 껴안았다.
하지만 내가 보인 반응이 무색하게도 우리 앞을 지나간 건 조그만 쥐였다.
하하하…… 정말 나도 참. 내 행동을 자각하자 얼굴이 붉어지고 라크하의 팔을 껴안고 있는 내 양팔이 무안했다.
머리 위로 빤히 나를 쳐다보는 라크하의 시선이 느껴졌다.
“으음…… 쥐, 쥐가 싫어서…….”
이렇게 기겁할 만큼 싫어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나는 쥐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걸로 하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라크하의 팔을 천천히 놓으려고 했다. 라크하가 내 손을 낚아채 가지만 않았더라도.
“그대가 다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긴장하지 않아도 돼.”
손에 따뜻한 온기가 가득 채워지자 불안감이 한결 가라앉는 듯했다.
“……고마워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분명 라크하도 불안하고 마음이 안 좋을 텐데……. 차분하게 나를 달래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스스로가 조금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도 라크하의 불안감을 덜어주고 싶었다. 나는 맞잡고 있는 그의 손을 힘을 주어 꽉 잡았다.
“쌍둥이들도 어디 다친 데 없이 괜찮을 거예요. 강한 아이들이잖아요. 오히려 납치범들을 골려주고 있을지도……요?”
굳어진 라크하의 얼굴을 보며 나는 뒤늦게 내가 했던 말을 후회했다. 나도 참 누굴 위로하는 데 소질은 없는 것 같다.
“어, 음…….”
멍청한 메이아, 1절만 했어도 완벽한 위로였는데! 자책하던 그때였다.
라크하가 내 몸을 홱 뒤로 당기더니 커다란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라크하가 검지로 제 입술을 가볍게 누르며 ‘쉿’ 하고 작게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걸어가려고 했던 길목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헤어졌다는 거니?”
레이나?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오늘 낮에도 들었던 목소리이기에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 레이나가 여기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원작 내용대로라면 키네스와 함께 불꽃놀이를 보러 갔어야 했다.
“으음…… 맞아! 여기인 것 같아!”
저 카랑카랑하고 발랄한 목소리. 분명 아이샤였다.
‘다행이다, 무사했구나!’
아이샤의 곁에 델카인도 당연히 있겠지. 둘은 늘 붙어다니니까.
나는 내 몸을 감싸 안고 있는 라크하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쌍둥이들이 저기에 있는 것 같아요. 나가 봐요.”
입 모양으로 뻥긋거리며 말했으나 라크하는 여전히 경계를 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거지? 의아하던 그때,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샤와 레이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가 한 명 더 있었다.
“그럼 리베르탄을 가로질러서 시계탑으로 갔다는 소리인가?”
“응! 저기 시계탑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저 애매한 존댓말은 뭐람. 아니, 그 전에 잠깐, 아이샤가 존댓말을 쓴다고? 아이샤가 존댓말을 쓸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황제, 키네스 제르디아. 그러고 보니 방금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키네스였다.
‘아니, 애들이 왜 키네스랑 같이 있는 거야?!’
정말 키네스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라크하가 꽉 잡고 있는 탓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저기 시계탑으로 가야 해! 거기에…… 어라? 이 냄새는…….”
“왜 그러니?”
“잠시만, 여기 있어 봐. 확인만 하고 올게.”
자박자박. 어린아이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우리 쪽으로 오는 건가……?
라크하가 천천히 나를 놓아준 순간 불쑥, 우리가 있는 골목 쪽으로 조그만 머리가 튀어나왔다. 아이샤였다.
아이샤가 나와 라크하를 보고 커다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아이샤?”
내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자, 아이샤의 입가에 천천히 웃음이 번졌다.
“정말 언니잖아!”
아이샤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달려와 덥석 안겼다. 품 안에 따뜻한 체온이 한가득 번졌다.
줄곧 초조하고 불안하던 감정이 단숨에 파도처럼 휩쓸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이샤의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응응, 멀쩡하지! 내가 누구한테 당할 사람이야?”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아이샤는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내가 델카인의 안부까지 물을 새도 없었다.
“누가 막 쫓아와서 원래는 맞서 싸우려고 했거든? 그런데 밖에서 흑마법을 함부로 쓰면 안 되니까 내가 이렇게, 이렇게! 피해서 잘 도망쳤다? 거의 나 혼자 다 했는데 저 두 사람이 쓸데없이…… 오빠?”
모션까지 취해가며 신나고 빠르게 상황을 설명하던 아이샤가 얼음처럼 굳었다. 라크하를 이제야 발견한 듯했다.
아이샤가 조마조마한 듯 내 팔 소매를 꼬옥 잡았다.
‘아, 저택에서 몰래 나와서 혼날까 봐 겁이 나는구나.’
사고를 칠 때마다 라크하에게 혼났던 아이샤로선 라크하가 두려울 법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애들은 나 때문에 몰래 나온 건데, 혼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공작님, 애들이 무사하니…….”
“잘했다, 아이샤.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것도 어쩔 땐 현명한 판단이지.”
어라……? 혼을 내려던 게 아니었어? 나는 말을 하다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라크하의 칭찬에 아이샤 역시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칭찬을 좋아하는 아이샤는 금세 헤헤 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델카인은 아직 키네스와 레이나랑 함께 있는 건가?
때마침 라크하가 주변을 쓱 훑으며 질문했다.
“그런데 델카인은?”
“아이코!”
그 순간, 골목 뒤쪽에서 짧은 비명과 함께 레이나가 휘청거리며 나타났다. 그런 레이나를 키네스가 잡아주었다.
레이나가 볼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아하하, 죄송해요. 분위기를 망칠까 봐 조금 더 기다리려고 했는데 발을 헛디뎌버렸네요.”
“아, 괜찮아요. 그런데 혹시 델카인은 못 보셨나요?”
“델카인은 시계탑에 있어.”
아이샤가 내 물음에 대신 대답했다. 우리를 만나기 전에 셋이서 나누던 시계탑 얘기가 델카인이 있는 곳을 말하던 거였어?
“시계탑?”
“응! 거기에 안전하게 있을 거야!”
“안전한지는 확실하지 않아.”
키네스가 아이샤의 추측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안전한지는 확실하지 않다니……? 아이샤를 만났다고 안심했던 것도 찰나였다. 다시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최근에 귀족이든, 평민이든 가릴 것 없이 실종됐다는 보고가 빗발치면서 시계탑 쪽에 있는 병력들이 그 사건에 투입된 걸로 알고 있다. 게다가 이 길목으로 갔다면 빈민가인 리베르탄을 지나쳤다는 말이지 않나? 그것도 어린아이 혼자서.”
키네스의 말은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괴한들에게 쫓기는 데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았을 리는…… 어어?”
그때 라크하가 나와 아이샤의 팔을 낚아채더니 넓은 보폭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키네스는 인사도 없이 무작정 멀어지는 우리를 잡지 않았다.
만약 내가 키네스였어도 잡지 못했을 것 같았다. 라크하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으니까.
***
빈민가에 위치한 시계탑은 축제가 한창이던 곳과 달리 조용했다.
시계탑에 도착하자 리베르탄을 수색하던 아인티아의 기사가 우리에게 다가와 보고를 했다.
“시계탑을 뒤져봤지만 도련님은 없었습니다. 발견한 거라곤 이 브로치밖에 없습니다.”
기사가 라크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보라색 보석이 박혀 있는 작은 브로치였다.
“이건…….”
오늘 델카인이 차고 있던 브로치잖아. 비명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올 것 같아 나는 두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브로치가 떨어질 정도라면 몸싸움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아, 델카인이…….”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델카인이 납치당했다는 걸 확신하게 되자, 그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아직 멀리 못 갔을 거다. 축제 기간이니 대놓고 움직이지도 못할 테고, 분명 아직 리베르탄에 있을 테니 주변을 더욱 샅샅이 뒤져 봐.”
“네, 알겠습니다!”
라크하의 명령에 모여 있던 기사들이 짧게 대답한 뒤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브로치를 건네준 기사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떠나려던 그 순간이었다.
“아니야! 네가 제대로 수색을 못 했겠지!”
갑자기 아이샤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시선을 돌리자 아이샤가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시계탑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도련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이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내젓더니 기사에게 달려가 시계탑을 가리켰다.
“그럴 리가 없어! 델카인이 여기 있겠다고 했단 말이야!”
그 모습에 마음이 저리다 못해 아렸다. 나도, 라크하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어린 아이샤에게는 얼마나 충격으로 다가올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가씨…….”
“네가 대충 둘러본 거야! 그리고 델카인은 숨바꼭질을 잘하니까…….”
기사의 다리를 내리치던 아이샤의 주먹질이 점점 느려졌다.
“그래서 네가 발견 못 한 걸 수도…… 흐으.”
결국, 아이샤는 기사의 옷자락을 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좋아. 아이샤에게 다가간 나는 몸을 낮춰 아이샤를 끌어안았다.
“아이샤, 델카인은 괜찮을…….”
아이샤를 달래주려던 나는 일순 눈물이 핑 돌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만약 이대로 델카인을 못 찾으면 어떡하지?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시간에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달래줘야 하는 건데.
목이 메여 어떠한 말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때, 라크하가 내 품에 있는 아이샤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아이샤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내가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이어서 해주었다.
“델카인은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 뒤로도 다정하게 아이샤를 달래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가만히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
마차 창틀에 턱을 괸 채 밖을 지켜보던 키네스는 레이나를 흘겨보았다.
레이나가 어두운 낯빛으로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골목길에서 세 사람과 헤어진 이후로 레이나는 줄곧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제 동생이 없어진 줄 알겠군.’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해지는 듯했다.
결국, 보다 못한 키네스가 입을 열었다.
“레이나 양.”
“…….”
제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짧게 한숨을 푹 내쉰 키네스는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레이나의 손을 붙들었다.
그러자 레이나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제야 초점 없이 멍하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렇게 신경이 쓰이나?”
“……아, 아니에요.”
“솔직하게 말해 봐.”
레이나가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시선을 푹 떨구며 말했다.
“저희도 따라가 보면 안 될까요……?”
키네스는 단번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레이나가 하소연만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대뜸 따라가자는 말을 먼저 꺼낼 줄이야.
아인티아 공녀를 구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앞으로 메이아를 불러낼 때 공작이 무어라 하지 못할 꼬투리를 잡은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게다가 레이나와 불꽃놀이를 보러가던 길이었다.
물론 무슨 사건인지, 어떤 겁 없는 놈이 아인티아 가문에 수작을 부렸는지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황제인 그가 직접 나설 필요 없이 사람을 시켜 알아보면 될 일이다.
“역시…… 안 되겠죠?”
레이나가 키네스의 눈치를 보며 한 번 더 물었다.
키네스는 천천히 레이나의 얼굴을 훑었다. 여기서 그녀의 부탁을 거절한다면, 호감을 얻지 못할 게 뻔했다.
그렇다면 원래 그가 세웠던 계획대로 레이나의 비밀을 캐내는 일도 어려워질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된 이상 키네스는 환심이라도 사는 게 좋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리베르탄으로 가지.”
어차피 그곳에는 메이아도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