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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이러면 평소에도 내가 떠오르겠지 (63/136)


63. 이러면 평소에도 내가 떠오르겠지
2022.06.06.


아드리엔 남작가에는 비상이 떨어졌다. 저택을 찾아온 귀한 손님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남작가를 방문한 귀한 손님은 다섯 손가락 내로 꼽을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응접실에 찾아온 남자는 그보다도 훨씬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바로 제르디아 제국의 황제였으니까.

아드리엔 남작 부부는 가까이서 마주한 황제를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잔뜩 긴장으로 굳은 남작 부부를 보며 키네스가 차를 홀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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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긴장들 하지 말게. 내 그대들의 딸을 데리러 온 거지, 벌을 하러 온 게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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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죄송합니다. 저희 딸아이가 폐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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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니 염려 말도록.”

키네스는 이미 레이나가 외출한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남작가에 보냈던 전령에게 들었던 내용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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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사만 하고 돌아올 거라고 했었지.’

원래 계획은 점심 식사를 함께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선약으로 이미 자리를 비웠다고 하니 일부러 조금 늦은 시간에 방문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외출한 상태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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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돌아와야 할 텐데.’

낭만적인 분위기는 진솔한 대화를 유도하기엔 제격이니까.

오늘 방문한 이유는 아드리엔 영애의 비밀과 능력을 알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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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레이나는 곧 올 겁니다. 차라도 한 잔 더 대접해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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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됐네.”

무료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답한 키네스가 남작 부부를 흘겨보았다.

레이나의 마음을 얻어야 하니 미리 취향 같은 정보를 알아두는 게 좋을 것이다.

제 딸의 능력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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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에게 궁금한 게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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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뭡니까. 뭐든 물어보십시오.”

아드리엔 남작이 간이고 쓸개고 모두 다 내줄 것 같은 얼굴로 키네스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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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나 양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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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다정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다정한 사람인가? 키네스가 지금까지 레이나에게 보였던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던 그때였다.

밖에서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노크소리가 울렸다.

허락이 떨어지고 문이 열리자마자 레이나가 들어와 허리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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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급하게 뛰어온 건지 레이나의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한 남작 부부와 달리 키네스는 속으로 웃었다.

격이 없는 행동과 모습이 그에게 흥미롭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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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바닥까지 파고들겠구나. 고개를 들거라.”

키네스의 명령에 레이나가 몸을 세우고는 쭈뼛거렸다.

어떻게 할지 몰라 쩔쩔매는 레이나를 보며 키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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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외출을 할 계획이었으니 지금 함께 나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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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와 외출을 하신다고요?”

왜 처음 듣는 얘기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거지? 키네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분명 탄신 연회 때 테라스에서 따로 언질을 해두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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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날 테라스에서 얘기하지 않았나. 축제 때 함께 불꽃놀이를 보자고.”

그게 진심으로 한 말이라고는 생각 못 했던 걸까.

레이나가 당황한 듯 허둥지둥 대더니 얼굴을 확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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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기억납니다.”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다고 했으면 꽤 심기가 불편할 뻔했다.

키네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레이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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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마차로 가지.”

레이나와 함께 저택을 나와 마차에 올라탄 키네스는 턱을 괸 채 레이나를 훑었다.

레이나의 어깨가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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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처럼 경계를 하는 건 아니어서 다행인가.’

달래기도, 다루기도 참 힘든 여자였지.

사나운 고양이처럼 털을 바짝 세우고 있던 메이아의 모습을 떠올리자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키네스의 웃음소리에 레이나가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레이나가 잽싸게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화라도 먼저 꺼내봐야겠군. 키네스가 레이나에게 말을 걸려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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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이들은……!”

레이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창문가를 꽉 붙잡았다.

키네스도 덩달아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리고 있는 마차라 빠르게 스쳐지나가긴 했지만, 잘못 본 게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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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티아 공자와 공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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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폐하께서도 보셨죠?”

흥분한 레이나가 예의와 격식도 잊고 키네스를 똑바로 마주 보며 물었다.

하지만 키네스도 이를 따질 정신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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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티아 공자와 공녀가 왜 그곳에 있었던 거지?’

두 아이가 서 있던 곳은 빈민가, 리베르탄으로 이어진 골목이었다. 게다가 보호자도 없어 보였다.

레이나 역시 그 골목과 이어진 곳을 알고 있는지 불안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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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하죠? 위험한 곳인지도 모르고 들어간 건 아니겠죠?”

이미 쌍둥이들과 꽤 멀어졌지만, 레이나는 초조하게 창문 밖을 흘깃거렸다. 아인티아 공자와 공녀가 꽤 신경 쓰이는 듯했다.

이대로 아인티아 공녀와 공자를 못 본 척하고 가는 게 맞을까?

키네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뎅-.

생각을 재촉하는 것처럼 마차 밖에선 시계탑의 종소리가 가득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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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곧 앞장서서 호기롭게 걸어가던 아이샤가 별안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따라가던 델카인은 생각에 빠져 있느라 한 박자 늦게 뒤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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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 아이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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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뭔가 기분 나빠.”

델카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끝에 있는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리베르탄이었다.

얼른 가자고 소리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기분이 나쁘다고?

아이샤의 변심이 갈대 같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런 상황이 올 때마다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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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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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탄에 거의 다 왔는데도 언니 냄새가 하나도 안 나잖아.”

역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처구니없는 이유에 델카인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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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님이 주변에 없으니까 당연히 안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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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언니가 다녀간 자리는 늘 좋은 향이 남아 있단 말이야. 그리고…….”

아이샤가 말끝을 흐리더니 델카인에게 뚜벅뚜벅 걸어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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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골목에 들어온 이후로 누가 쫓아오는 거 같지 않아?”

쫓아오는 것 같다고? 이 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아이샤는 자신보다는 감각이 뛰어난 편이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말은 아니기에 델카인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아이샤가 말했던 대로 미약하지만, 인기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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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네. 누가 쫓아오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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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인들일까?”

물론 아인티아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뒤가 밟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리베르탄으로 들어가는 골목길까지 미행을 했을까?

델카인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아마 위험하다고 진작에 자신들을 말렸을 것이다.

자신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형의 명령을 따르는 이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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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인들은 아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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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가 다 쓸어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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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명이 따라오는 건지도 모르면서 뭘 쓸어버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어쩜 저렇게 대책 없이 힘으로만 승부를 보려고 하는 건지.

아마 자신이 없었으면 아이샤는 진작에 뒤를 밟는 사람들을 덮치고도 남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선득했다. 델카인은 잡생각을 떨쳐내고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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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아무렇지 않게 걷자.”

시간을 더 지체했다간 미행당하는 걸 눈치챈 사실을 들킬 수도 있었다.

델카인은 아이샤의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누군가가 미행을 하고 있다는 건 함정일 확률이 크다는 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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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너는 형수님이 이곳에 없을 것 같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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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가 안 나긴 해…… 하지만 언니가 정말 있으면 어떡해?”

꺼림칙하고 메이아가 없는 것 같지만 확인은 해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게 누군가가 일부러 꾸민 일이라면 영락없이 당하는 꼴이 될 것이다.

하필 골목길이어서 습격에 당하기도 쉬운 상황이었다. 만약 골목길 곳곳에 숨어 있다면 도망치지 못할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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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좋지?’

점점 쪽지에 적혀 있던 위치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생각해, 생각해야 한다고! 델카인은 불안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뎅-.

종소리가 골목길을 가득 메웠다. 리베르탄의 끄트머리에 있는 시계탑에서 울리는 종소리였다.

자연스럽게 시계탑을 바라본 델카인이 한 깨달음을 얻곤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시계탑은 황실 경비병이 지키고 있는 거로 알고 있었다.

따라오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황실 경비병 앞에서는 어떠한 짓도 못 할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델카인은 아이샤를 슬쩍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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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샤, 저기 시계탑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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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시계탑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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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쪽지에 적혀 있던 곳이거든? 그런데 만약 형수님이 없으면, 우리 둘이 갈라져서 저기 시계탑에서 만나는 거야.”

아이샤와 따로 움직이려고 결심한 이유는 뒤따라오는 정체 모를 괴한에게 혼란을 주기 위함이었다.

델카인의 계획을 집중해서 들은 아이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골목만 돌면…….

델카인은 심호흡을 한 뒤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쪽지에 적힌 대로라면 메이아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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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이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델카인은 크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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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

 

***

보석, 모자, 액세서리, 음식 등 비스퇴르가에는 다양한 물건과 음식을 파는 가판대가 줄지어 있었다.

개중 내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건 책을 쌓아둔 가판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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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카인은 책을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책을 받고 기뻐할 델카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무척 좋아하겠지. 괜히 내가 더 들뜨는 기분에 나는 책을 진열해둔 가판대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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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저희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사는 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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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생각이군.”

아이샤 선물은 어떤 걸로 해주지?

여유롭게 가판대를 둘러보고 싶었으나 사람이 너무 많았다.

불꽃놀이를 할 시간이 다가와서 그런 건가. 살인적인 인파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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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엄청 많네요. 이러다 깔려도…….”

말하기 무섭게 골목 안쪽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무리가 우르르 쏟아졌다.

잠깐,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데…… 이러다 부딪히겠어!

다급히 파도처럼 덮치는 무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발이 꼬이며 몸이 휘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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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

그때 라크하가 내 어깨를 잡아당겨서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라크하의 품에 가둬졌다.

은은하고 부드러운 화이트 머스크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며,

쿵, 쿵, 쿵.

라크하의 단단한 가슴팍으로 세찬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시끌벅적한 골목길에서도 두근거리는 라크하의 심장 박동 소리만 귀를 가득 메웠다.

라크하와 닿은 어깨가 살갗이 맞닿은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얼굴이 달아오르며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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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쳤나 봐……!’

나는 서둘러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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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해요.”

짧게 감사의 말을 전한 뒤 붉어진 얼굴이 들킬까 봐 휙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 라크하에게 휘말리고 싶지도, 술렁이는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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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얼른 아이샤 선물을 골라 볼까요?”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말을 돌리며 앞장서서 걸었다.

멍청한 메이아, 라크하가 뭘 했다고 설레는 거야. 흑막과 함께 있어 봤자 목숨에 위협이 될 일만 가득하다고!

심장 부근을 꾹 누르며 가까스로 널뛰는 마음을 달래며 걷던 때였다.

몇 걸음 앞에 있는 가판대 위에 놓인 매듭 팔찌가 눈에 띄었다.

색색의 끈으로 매듭이 지어진 팔찌의 중앙에는 손톱만 한 유리구슬 속에 생화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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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아이샤가 좋아하겠는데요?”

꽃을 좋아하는 아이샤라면 생화가 들어 있는 팔찌를 무척 좋아할 게 뻔했다.

내가 생화 팔찌에 관심을 보이자 상인이 넉살 좋게 웃으며 하나를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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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손님께서 안목이 좋으시네요. 이건 소원 팔찌입니다. 차고 있다가 끊어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답니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팔찌라니, 아이샤가 더 좋아할 게 분명했다. 아이샤를 위한 선물로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나랑 커플로 맞추기까지 한다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방방 뛸 아이샤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이거다! 더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상인에게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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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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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습니다.”

상인이 팔찌를 종이봉투에 정성스레 담아서 내게 건넸다.

옆에서 값을 치를 줄 알았던 라크하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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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걸로 하나 더 줬으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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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물론입니다요.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왜 하나 더 사는 거지? 내가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자 라크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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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이런 팔찌를 좋아해.”

라크하가 이런 팔찌에 관심을 보일 줄이야.

상인에게 팔찌를 하나 더 받은 라크하가 내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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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묶어줘.”

이 남자는 내 시선이, 내 관심이 다른 곳으로 빠질 법하면 훅 치고 들어온다.

라크하가 건네준 팔찌를 받은 나는 뼈대가 굵은 그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머리 위로 나를 빤히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져서 그런 걸까.

그냥 팔찌를 묶는 것뿐인데, 심장이 떨렸다.

나는 라크하 몰래 숨을 짧게 내뱉은 뒤 매듭 팔찌를 묶었다.

손끝으로 그의 살결이 스칠 때마다 근육이 빳빳이 굳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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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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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라크하가 목을 울리며 내가 묶은 매듭 팔찌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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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애들 소꿉장난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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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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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대와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는 것보다 낫겠지.”

라크하가 내 가방에서 종이봉투를 채가더니 팔찌 하나를 더 꺼냈다.

내 손목 언저리를 부드럽게 움켜쥔 그는 순식간에 팔찌를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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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손목에 닿아 있던 손이 살결을 타고 올라와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내 눈앞에 잡은 손을 들어 올렸다. 라크하와 내 손목 위로 패턴만 살짝 다른 매듭 팔찌가 보였다.

라크하가 만족스러운 듯 느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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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평소에도 내가 떠오르겠지.”

내가 이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애써 다잡은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그때,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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