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기어코 도망치고 말았다
(58/136)
58. 기어코 도망치고 말았다
(58/136)
58. 기어코 도망치고 말았다
2022.05.20.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으로 어떤 가문의 문장인지 유추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재에 있는 책을 몽땅 들고 오고 싶었으나 규정에 막혀 빈손으로 방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른 생각은 쉽게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라크하와 따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많이 바쁜 건가?’
어젯밤에도 잠을 자러 오지 않더니 오늘 점심도 따로 먹는다고 했다.
식사를 하며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문득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고개를 들었다. 유독 아이샤가 얌전했다.
메인 메뉴가 나오면 신나서 다리를 앞뒤로 흔들던 아이샤였는데.
‘오늘은 닭가슴살 스테이크라서 그런가?’
내가 의아한 눈으로 아이샤를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델카인이 포크를 확 내려놓더니 황급히 말을 꺼냈다.
“혀, 형수님! 오늘 요리가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오히려 아이샤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은데…….”
“아니야, 아이샤는 닭가슴살 스테이크를 좋아하는걸.”
델카인이 슬쩍 아이샤에게 눈치를 주는 게 보였다. 하지만 아이샤는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아이였다.
아이샤가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싫어하진 않지.”
뭔가 이상한데.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델카인이 생긋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얼굴을 하면 내가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마음은 약해지긴 하지만…….’
최근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쌍둥이들이 리타를 시켜 미로 정원으로 나를 유인했던 계략을 꾸미기까지 했으니까.
이번에도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지도 몰랐다.
델카인은 어떻게든 숨길 생각인 듯했으나, 아이샤라는 빈틈이 있었다.
“아이샤, 혹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거야?”
내 물음에 아이샤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입을 열었다.
“언니, 혹시 가출할 거야?”
“아이샤!”
델카인이 벌떡 일어나 아이샤를 막으려고 했으나 수습하기엔 이미 늦은 후였다.
‘둘이서 또 이상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구나.’
안 봐도 뻔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 때문에 ‘가출’이라는 말이 나온 걸까.
나는 델카인에게 차분하게 물었다.
“델카인, 무슨 상황인지 말해 볼래?”
“형수님 그게 있잖아…….”
델카인은 더 이상 둘러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사실대로 늘어놓았다.
“형수님이 형 머리채를 잡은 게 책에서 읽었던 부부 싸움 장면이랑 같기도 하고…….”
“쿨럭!”
부, 부부 싸움이라고? 예상치도 못한 말에 사레가 들려 기침이 튀어나왔다.
끝까지 듣지 않아도 대충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나와 라크하가 싸우는 줄 알고 걱정이 되었던 거구나.
그런데 그건 그렇다 쳐도…….
‘애초에 부부 싸움이라는 것부터 말이 안 되잖아!’
나와 라크하는 결혼한 사이가 아니니까.
하지만 쌍둥이들은 경건한 얼굴로 내 기침이 끝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쌍둥이들의 오해를 풀어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겨우 사레들린 걸 가라앉힌 나는 헛기침을 하며 쌍둥이들을 다독였다.
“얘들아, 공작님과 내가 약혼한 사이이긴 하지만…… 그전에 너희들의 시터이니까 절대로 가출할 일은 없을 거야.”
“그렇구나, 다행이다!”
“…….”
원래 컨디션으로 돌아온 아이샤와 달리 델카인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니, 어두운 걸 넘어서서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왜 그런 거지? 곰곰이 내가 한 말을 되짚어 보았지만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은 없었다.
아이샤만 해도 이미 모든 고민이 해결된 사람처럼 해맑은 얼굴로 신나게 식사를 하고 있었으니까.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델카인이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럼 가출 말고 우리를 두고 떠나는 건?”
허를 찌른 질문에 내 입은 절로 닫혔다. 다행히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아이샤가 대신 답했다.
“부부 싸움만 안 하면 걱정 안 해도 돼, 어차피 언니는 오빠랑 결혼할 사이…… 아니지, 그러고 보니 직접 안 물어봤네?”
아이샤가 포크를 문 채 대답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 오빠랑 결혼할 거야?”
아이샤가 한 질문은 그나마 답할 수 있었지만, 쌍둥이들의 눈치를 보아하니 아니라고 했다간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결혼할 거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나는 애매모호하게 답했다.
“……글쎄에?”
달그락.
아이샤가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트렸다.
꽤 놀란 건지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아이샤는 왜 충격을 받은 거야?’
뜻밖의 반응이었다. 내가 결혼 생각이 없다고 하면 오히려 아이샤는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언니…… 우릴 버린다는 거야?”
“아니,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닌데…….”
“결혼을 안 한다는 건 우리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의미잖아! 그치, 델카인?”
아이샤가 델카인을 쓱 보며 물었다.
델카인만이 아이샤를 말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인 걸 알고 있는 나는 서둘러 델카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다.
델카인의 눈빛이 무척 차분하다 못해 서늘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렇지.”
델카인마저 내가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줄이야. 내 입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닫혔다.
“봐, 델카인도 그렇다잖아! 언니, 우리를 두고 어디 가려고?”
아이샤가 내 소맷자락을 꽉 잡았다.
불현듯 싸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제야 쌍둥이들의 속내를 전부 알 것 같다.
‘라크하와 결혼을 하게 만들어서 나를 곁에 둘 셈이구나.’
이 똥강아지들이 마냥 순한 아이가 아니라 흑막의 동생들이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되었다.
“나 수업 안 듣고 언니만 따라다닐 거야.”
“나도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어.”
델카인이 아이샤와 비슷한 방식으로 나올 줄이야. 당황한 나머지 눈을 깜빡이며 델카인을 바라보던 때였다.
아이샤가 내 앞에 있는 포크를 가져가더니 별안간 브로콜리를 하나 쿡 집었다.
“아이샤……?”
“잘 봐, 언니. 내가 이렇게 앞으로 채소를 먹는다고 해도 두고 갈 거야?”
일전에 아이샤는 채소를 먹고 냅킨에 뱉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딱 두 번만 씹고 넘기진 못했었다.
그런 아이샤가 채소를 먹을 리가 없는데…… 그런 건데…….
아이샤가 심호흡을 하더니 입에 브로콜리를 집어넣었다.
우물, 우물. 이미 두 번을 넘기고 브로콜리를 씹고 있는 아이샤의 눈썹이 물결쳤다.
그 와중에도 보라색 눈동자는 집요하게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꿀꺽.
마침내 브로콜리를 삼켰을 때였다.
“이래도 나를 두고…… 우웨엑!”
“아이샤!”
“아가씨!”
아이샤의 갑작스러운 구토에 멀리서 지켜보던 하녀들까지 놀라 달려왔다.
……그냥 지금 당장 도망가 버릴까?
아직 3달 정도 남은 내 시터 생활에 위기가 찾아오자 문득 그런 충동이 들었다.
***
겨우 쌍둥이들을 달래고 모든 일과까지 끝낸 뒤 진이 다 빠진 채 방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공교롭게도 내 방문 앞에 서 있는 리타와 딱 마주쳤다.
핼쑥해진 나와 달리 리타는 밝은 얼굴로 나를 반겼다.
“시터님! 마침 오셨군요!”
“아…… 리타 씨, 지금 시간에는 어쩐 일이에요?”
주로 리타가 내 방을 방문하는 시간은 이른 오전이거나 밤이었다.
“아, 보좌관님께서 시터님께 편지를 전해달라고 하셔서요.”
“편지요?”
“네, 발신인이 ‘레이나 아드리엔’이라고 되어 있네요.”
레이나의 편지라고? 언제 비척거리고 있었냐는 듯 정신이 번뜩 들었다.
편지를 받은 나는 곧장 뜯어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친애하는 메이아 님께.]
이제 내 정체를 알게 돼서 메이아라고 부르는 듯했다.
[탄신 연회 때 돌려드리지 못했던 숄을 돌려줄 겸, 메이아 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연락을 드려요. 제가 비스퇴르 가에 유명한 맛집을 알고 있답니다.]
여기까지는 내가 아는 레이나치고 점잖고 평범한 편지였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문장을 읽고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마시스 식당이라고 있는데, 그 식당의 모든 메뉴가 다 맛있더라고요.]
한 번씩 느끼는 거지만, 원작 작가는 사람이든, 음식이든, 식당이든 자잘한 이름을 짓기 귀찮은 게 분명했다.
나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계속 레이나의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물론 거절하셔도 된답니다. 갑작스러운 약속 제안이기도 하고, 메이아 님은 저처럼 한가한 분이 아니시니까요. 그래도 제게 점심 식사시간을 내주신다면 너무, 무척, 굉장히, 몹시 행복할 것 같아요.
그럼 답신을 기다릴게요.]
비스퇴르 가라면 점심만 후딱 먹고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잠시 고민했다. 레이나와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웬만하면 원작 속 인물과 되도록 얽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다시 편지지를 내려다보았다.
“으음…….”
그래도…… 레이나랑 단둘이 만나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키네스와 달리 레이나는 친해진다면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이후에 일이 꼬여서 키네스가 쌍둥이들을 벌하거나, 아인티아를 건드리는 일이 생겼을 때 황제의 연인이 될 레이나라면 막아줄 수 있을 것이었다.
‘대신 두 사람이 원작대로 이어져야 할 텐데.’
결국 레이나가 키네스와 춤을 췄는지, 둘 사이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내가 편지를 보며 고뇌에 빠져 있자 리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요.”
키네스의 잠은 내가 아니더라도 레이나가 재워줄 수 있지. 하지만 아직 키네스는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레이나의 비밀은 조금 더 뒤에 밝혀지니까.
‘어쩌면 피하는 것만이 답이 아닐지도 몰라.’
이미 원작은 조금씩 뒤틀려가고 있고, 나는 원작 인물과 엮이게 됐다.
그리고 내가 이곳을 떠나더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달라져야 해.’
나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도록 둘 생각은 없었다.
“리타 씨, 혹시 답장을 어떻게 보내는지 아시나요?”
“아, 지금 당장 답장을 하시려는 거예요?”
“네, 그러려고요.”
“그럼 저한테 주세요. 제가 지금 애니를 대신해서 장을 보러 나가기로 했거든요.”
“고마워요. 제가 지금 당장 써서 드릴게요.”
나는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빈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내일 점심에 만나자는 긍정의 의미를 담은 편지를 쓴 뒤 리타에게 넘겨주었다.
***
레이나와의 약속 장소에 나가기 전.
메이아는 종이를 꺼내 간단한 메모를 남겼다.
[혹시 몰라서 메모를 남기고 가요. 제가 없어졌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괜히 찾아다니지도 말고요. 정말 점심만 먹고 금방 돌아올 거예요.]
갑작스레 그녀의 방에 찾아올 사람은 라크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정확히 그를 겨냥해서 남긴 메모였다.
하지만 메이아가 잊고 있던 게 있었다.
바로, 오늘이 3일에 한 번씩 자신의 방을 청소하는 날이라는 걸.
리타는 메이아의 방을 청소하기 위해 그녀의 방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똑똑.
“시터님.”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우셨나? 자리에 안 계실 때도 들어와서 청소를 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리타는 벌컥 문을 열고 메이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리타.”
뒤에서 부르는 하녀의 목소리에 리타는 화들짝 놀라며 실수로 테이블을 툭 쳤다.
팔랑팔랑, 떨어진 쪽지는 물걸레질을 하려고 들고 왔던 양동이 속에 빠졌다.
“아, 안 돼!”
리타가 황급히 몸을 숙여 양동이 속에서 쪽지를 꺼냈다.
하지만 쪽지는 물에 푹 젖어 찌그러져 있었다.
쪽지를 보고 리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주, 중요한 내용이 담긴 종이는 아니겠지.”
중요한 내용이 담긴 쪽지라면 얼마나 혼이 날지 몰랐다.
리타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에 적힌 내용을 살폈다. 글씨가 번져 알아보기 힘들었다.
“으으…….”
끙, 리타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리타의 곁으로 문 앞에 서 있던 하녀가 다가왔다. 하녀의 얼굴을 확인한 리타가 잔뜩 울상을 지었다.
아인티아 저택에서 가장 연차가 높은 하녀, 빌렌이었다. 리타는 이미 그녀와 안면이 있었다.
“빌렌…… 나 어떡해?”
“어디 한번 줘 봐.”
리타가 빌렌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빌렌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쪽지를 훑어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왜, 왜 그래? 뭔지 알아보겠어?”
창백하게 질린 리타가 허둥지둥거리며 빌렌이 들고 있는 쪽지를 다시 흘겨보았다.
빌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리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제가 없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괜히 찾아다니지도 말고요. 라고 적혀 있는 것 같은데?”
“그, 그럴 리가…….”
“안 그래도 시터님께서 도련님과 아가씨 곁에도 없으시던데……?”
리타는 헛숨을 들이켰다.
지금 시간에 메이아가 있을 만한 곳은 딱 두 곳이었다. 쌍둥이들의 곁이나 본인의 방안.
하지만 그 어디에도 없다니. 별안간 리타의 머릿속에 어제의 메이아가 떠올랐다.
지치고 어딘가 고뇌에 빠진 듯한 얼굴.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듯하던 눈빛.
시터님이 결국 아인티아의 악동들 때문에 지쳐 나가신 게 틀림없었다.
“그럼 정말 시터님께서 가출을……?!”
“얼른 공작님께 보고드려야겠는데?”
“아, 알겠어! 나는 먼저 가볼게!”
“그럼 내가 마저 뒷정리를 하고 따라갈게.”
“으응, 고마워!”
리타는 휙 뒤돌아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얼른 공작님께 보고를 해야 했다.
시터님께서 기어코 도망치고 말았다고.
그리고 리타가 나간 방, 빌렌이 쪽지의 뒷부분을 찢어 구겨 창밖으로 던졌다.
거기엔 ‘정말 점심만 먹고 금방 돌아올 거예요.’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