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이젠 내가 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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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이젠 내가 버릴 거야
2022.05.16.
결국,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나는 간만에 늦잠을 잤다.
‘하필 또 같이 누워 자자고 해선…….’
탄신 연회 다음날이라 쌍둥이들의 수업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도 피로가 덜 풀린 것 같아 나는 계속 침대를 뒹굴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굼벵이처럼 누워서 지내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은 것도 잠시였다.
“……심심해.”
어느덧 쌍둥이들과 시끌벅적하게 지냈던 일상이 익숙해진 탓인지 방 안에만 얼마 있지도 않았는데 금세 무료해졌다.
‘메이아가 되기 전에는 시간이 빌 때 주로 뭘 하고 지냈더라?’
나는 곰곰이 이전 삶을 떠올려보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살기에 급급하느라 늘 정신 없이 바빴었다.
사람을 만나는 건 돈이 많이 드니 주로 소설을 읽으면서 지냈었던 것 같다.
“흐음…….”
그러고 보니 시롬에게 본관에 서재가 있다고 얼핏 들었었다.
‘좋아, 거길 가보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곧장 서재가 있는 본관으로 향했다.
그러다 손에 서류를 한가득 든 채 지나가는 시롬과 마주쳤다.
“시롬?”
“시터님…… 어어?”
내 부름에 시롬이 나를 돌아보다가 들고 있던 서류를 떨어트렸다.
촤르륵. 수많은 서류와 편지봉투가 바닥에 흩어졌다.
몸을 숙여 내 발치에 떨어진 편지봉투를 주워 시롬에게 건네주려던 찰나였다.
“응?”
편지봉투 위에 적힌 내 이름이 보였다.
“이건 제 앞으로 온 편지인가요?”
“네? 아, 그렇네요. 시터님 앞으로 온 편지가 맞습니다.”
나한테 누가 편지를 보낸 거지? 나는 뒤집어서 발신인을 확인해 보았다.
아리시스 후작가의 샤론. 그 이름을 본 순간 내 표정은 걷잡을 수 없이 뒤틀렸다.
그런 나를 보며 시롬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 앞으로 온 편지는 제가 들고 가도 되죠?”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할 줄 알았으나 시롬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탄신 연회 초대장이 온 이후로 공작님께서 시터님께 오는 편지를 먼저 검토하겠다고 하셔서 말입니다.”
처음 안 사실이었다. 라크하가 나를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줄은.
나는 가만히 내 손에 있는 편지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궁금했다.
혹시나 라크하가 내게 보여주기도 전에 없애버리는 건 아닐까 의심이 되기도 했고.
“앞으로 제 앞으로 온 편지는 직접 받겠다고 전해주세요. 황궁에서 온 편지는 공작님께서 먼저 검토해도 된다고 하면 이해하실 거예요.”
“예? 하지만…….”
어차피 라크하가 그 명령을 내린 이유는 키네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황궁에서 어떤 편지가 올지 모르니까.
“그걸로 무어라 하진 않으실 거예요.”
라크하가 신경 쓰는 부분을 양보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지.
나는 편지를 등 뒤로 숨기며 시롬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계단을 올랐다.
“편지를 왜 보냈으려나.”
궁금했던 나는 계단을 오르며 편지봉투를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일주일 뒤에 있을 티파티에 초대한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러면서 사교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는 데 도와주겠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웃기시네.”
모든 내용을 확인한 나는 코웃음을 쳤다.
도와주긴 개뿔, 거기서 나를 엿 먹이려는 거겠지. 안 봐도 뻔했다.
샤론이 나와 라크하를 보며 이를 아득 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다.
‘내가 바보인 줄 아나 봐?’
우습기 그지없었다. 샤론의 초대장을 와그작 구긴 나는 가려던 서재로 마저 발을 옮겼다.
그리고 살며시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탄성을 터트렸다.
“와아.”
줄지어 있는 책장, 빈칸 하나 없이 빼곡히 꽂혀 있는 책들.
책들이 숨 쉬며 나는 종이 냄새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아무나 들락날락할 수 있는 작은 공용 서재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크네.’
나는 신기해하며 책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을 둘러보았다.
관리를 까다롭게 하는 편은 아닌지 종류별로 책이 분류되어 있지 않았다.
천천히 내가 읽을 만한 책을 찾아보려던 때였다.
책장에서 살짝 튀어나온 책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왜 제목이 따로 없는 거지?’
나는 그 책을 뽑아 펼쳐보았다. 그러자 삐뚤삐뚤한 글씨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냥 책이 아닌가……?”
언뜻 보니 일기장 같기도 했다. 그것도 어린아이가 적은.
알아보기 힘든 글씨체여서 한참을 들여다본 후에야 대충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칭찬을 받았다.”
아이샤가 쓴 일기장인가? 그렇다기엔 저번에 봤던 아이샤의 글씨와 묘하게 달랐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쭉 읽어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기장의 주인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데미안. 너무 마음에 들어. 버림받은 내게 새로운 이름까지 지어주시다니 이분들만큼 좋은 사람이 있을까?]
데미안이라고? 라크하의 입에서 들은 이름과 같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마음 놓고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분들의 아이를 만났다. 라크하, 그 아이와 친해지고 싶어.]
분명 라크하는 서로 사이가 안 좋다고 말했었는데…….
하지만 뒷내용을 읽은 순간 라크하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라크하는 그분들을 싫어해. 왜 나보고 도망가라고 하지? 나는 여기가 좋고 그분들도 좋은걸. 나를 구해준 사람을 내가 어떻게 싫어하겠어.
물론 한 번씩 무섭긴 하지만 그건 모두 나를 위한 행동이니까. 그리고 말을 잘 들으면 그분들은 절대 나를 버리지 않는다니까.]
애정 결핍이라도 있었던 건가? 버림받는 일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한 듯했다.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리며 다음 장을 넘겼다.
[이젠 내가 버릴 거야.]
대체 무엇을 버린다는 거지? 그 말이 적혀 있는 페이지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두 개의 날개 속에 그려진 말 한 마리.
‘어느 가문의 문장 같은데…….’
아무 생각 없이 그린 그림처럼 보이진 않았다. 물끄러미 그림을 지켜보고 있던 때였다.
“시터님 여기 계세요?”
입구 쪽에서 리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나는 일기장을 아무데나 꽂은 뒤 벌떡 일어났다.
“네네! 여기 있어요.”
“아, 역시 여기 계셨군요.”
리타가 내가 있는 책장 쪽으로 걸어왔다.
“오늘 점심은 어떻게 하실 건지 여쭤보려고 왔어요.”
“쌍둥이들이랑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매번 식사는 쌍둥이들과 함께했었다. 수업이 없는 날에도.
“공작님께서 앞으로 시터님의 휴식과 업무 시간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하셔서요. 업무가 없는 날에는 따로 식사를 하게끔 명하셨어요.”
리타가 호호호, 하고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공작의 약혼자로서 극진한 대우를 아끼지 말라는 명령이 있으셨답니다.”
그 순간 어제 있었던 일이 스쳤다. 귀중한 예술품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손등에 입을 맞추던 라크하. 그리고 다정하게 웃던…….
‘멍청한 메이아! 그만 생각하기로 했잖아!’
어젯밤에도 온종일 내 머릿속을 괴롭혔던 모습들인데, 어쩜 질리지도 않는지. 귀 끝이 달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원래의 주제로 말을 돌렸다.
“그럼 여기서 간단히 먹을 만한 걸로 준비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리타는 언제 음흉한 미소를 지었냐는 듯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샌드위치로 준비해 드려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리타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꽤 신나 보이는 걸음으로 서재를 빠져나갔다.
다시 서재에 혼자 남은 나는 다시 책장을 기웃거렸다.
방금 전에 데미안의 일기장에서 봤던 그림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서적은 없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장을 기웃거리며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가문의 역사, 라는 두꺼운 책을 발견했다.
“여기 있구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나는 창가자리에 앉은 뒤 책을 펼쳤다.
‘어쩌면 데미안은 노예가 아닌 귀족일지도 몰라.’
정말 버려진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데미안의 정체를 안다면,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약간의 희망에 걸고 싶었다.
“여기 있어요, 시터님.”
때마침 리타가 샌드위치를 가져다주었다. 리타에게 샌드위치를 받은 나는 대충 허기를 채웠다.
그러고는 본격적으로 내가 봤던 그림과 비슷한 문장을 추려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보다 많네…….”
날개와 말이 그려진 가문의 문장은 무척이나 많았다. 심지어 이제 백작위를 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때 로피리테 백작가의 문장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탄신 연회에서 봤던 츤데레 악녀 미레스타의 가문이었다.
‘로피리테 백작가도 두 개의 날개와 말 한 마리가 있네.’
시큰둥하게 로피리테 백작가의 문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불현듯 원작 내용이 떠올랐다.
'곧 로피리테 백작가에서 마석 광산을 발견한 걸로 축하식을 열 텐데.'
장소가 리오스 산맥이었던가?
여기서 지내면서 원작 내용을 많이 잊어버렸는데도 그 내용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 친히 그대들이 광산까지 들어가는 길을 편하게끔 해주지.
미레스타가 레이나를 건드리자 심사가 뒤틀린 라크하가 그대로 산맥에 불을 질렀으니까.
그 와중에 흑막답게 웃고 있었다고 했지. 매우 충격적인 에피소드 중 하나였다.
그때 독자들은 라크하를 ‘앞뒤 없는 미친개’라고 불렀다.
심지어 소설 속에서도 그를 그렇게 부르기도 했고.
'지금은 원작과 달리 레이나에게 관심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계기로 분노가 표출되어 원작처럼 흘러갈 수도 있었다.
탄신 연회 때 라크하가 파티장에서 사라진 설정은 그대로였으니까.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하진 않겠지?'
제발 그런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
달칵. 조심스러운 문소리와 함께 라크하가 서재로 들어왔다.
시롬에게 메이아가 서재로 향하는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탄신 연회로 밀렸던 업무와 데미안을 조사하는 일로 무척 바빠 겨우 시간을 내서 온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오늘 밤에도 보지 못할 게 뻔했다.
그러니 시간이 날 때 잠시라도 얼굴을 보고 싶었다.
슬그머니 서재 안을 둘러보던 라크하는 창가 자리에서 메이아를 발견했다.
“메이…….”
라크하는 메이아를 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슴푸레 들어오는 노을에 황금빛으로 물든 공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곳에서 메이아는 잠들어 있었다.
라크하는 조심스레 메이아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숙여 메이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노을빛에 녹아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손이 메이아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가렸다.
눈이 은근히 부시긴 했던 걸까. 메이아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새근새근, 잠깐의 낮잠이라기엔 깊이 잠든 것 같았다.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더니.
“그대도 내가 신경 쓰이는 거겠지?”
자신이 한 말이 그녀를 뒤흔들어서 잠을 이루지 못한 거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지금 졸고 있는 거라고.
사실 어젯밤, 마음을 밝혀도 될지 아주 잠깐 고민했었다.
‘내 곁에 있으면 위험할 테니까.’
하지만 라크하는 그 고민을 빠르게 접어 치웠다.
메이아는 위험을 피하고자 제 곁에 오지 않았던가.
어느 쪽이든 위험하다면 자신의 옆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그는 그런 위험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욕심을 내서 제 마음을 말했다.
제 존재를 각인시키고 메이아를 흔들기 위한 고백이었다.
라크하가 메이아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하지만 그 손길이 금세 뚝 멈췄다.
“?”
메이아가 읽고 있는 책이 라크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 책이었다.
라크하는 의아하게 책을 내려다보았다. 마침 펼쳐진 페이지에 로피리테 백작가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로피리테 백작가에서 마석 광산 건으로 축하 파티를 연다고 했었지.’
날짜가 2주 뒤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값어치가 큰 광산이어서 크게 축하 파티가 열릴 것이었다.
라크하는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메이아도 함께 데려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