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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만져 봐도 될까요? (56/136)


56. 만져 봐도 될까요?
2022.05.13.


탄신 연회가 막을 내리고 키네스가 본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비에고가 빠르게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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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아드리엔 영애에게 잠을 재우는 능력이 있는지 알아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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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직.”

키네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드리엔 남작가의 레이나. 그녀에게 두 번째로 춤을 청해 보았으나 접촉만으로는 무언가가 느껴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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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누구처럼 날 경계하는 것 같진 않아서.”

키네스는 춤을 추는 내내 잔뜩 긴장하고 있던 메이아를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비에고는 짚이는 사람이 없는지 의아해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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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폐하를 경계한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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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키네스의 대답에 비에고는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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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오늘 무슨 생각으로 성녀와 첫 춤을 추셨던 겁니까? 엄연히 약혼자가 있는 몸이신데, 분명 귀족들 사이에서 큰 가십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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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길 바라면서 춘 거지.”

키네스가 비에고의 말을 끊으며 짤막하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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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있을 때 노려야 하는 법이지 않겠나.”

원래 첫 춤의 상대로 레이나 아드리엔을 생각하고 있었다.

메이아는 아인티아 공작의 약혼자로 참석할 테니, 아인티아 공작 핑계를 대며 당연하게 거절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공작은 무도회가 시작했을 때 메이아의 곁에 없었다. 그래서 키네스는 계획을 바꾸었다.

메이아를 첫 춤 상대로 지정한다면 성녀가 공작의 약혼자라는 이미지가 확고해지는 걸 막을 수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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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겠지.’

어쩌면 공작과의 약혼이 파기될 수도 있겠다고.

만에 하나 공작이 성녀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밝혀서 입지를 굳히려고 했다면, 크게 타격을 입을 것이었다.

분명 공작의 계획을 망쳤으니 기분이 좋아야 마땅한 일인데.

이상하게도 아리시스 후작가의 샤론과 함께 있는 공작을 보고 굳어버린 메이아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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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신 연회부터 시작해서 뭐 하나 제대로 되지 않는 날이다. 라크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만큼 메이아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해도 부족할 상황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흉한 모습은 감춰야 마땅한데, 라크하는 메이아의 부탁 앞에서 약해졌다.

자신의 가시처럼 새겨진 흉측한 문양까지 보여주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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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라크하는 가만히 메이아의 표정을 살폈다.

크게 떠진 푸른색 눈동자. 벌어진 입. 꽤나 놀란 얼굴이었다.

충분히 예상은 했다. 누가 보아도 징그럽고 흉측한 모습이었으니까.

아마 접촉하기도 꺼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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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생각처럼 단순히 손만 대는 거로 끝날 일이 아니라고 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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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파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라크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메이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메이아의 눈빛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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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흉측한 모습이었다. 징그러우니 얼른 다시 가려달라고 해도 납득이 될 정도로.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세차게 들끓고 휘몰아쳤다. 라크하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살을 왈칵 구겼다.

그게 아프다는 의미로 생각했는지 메이아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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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팠을 텐데, 왜 참고 있으셨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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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크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까지 그에게 고통을 참지 말라고 말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공작이 되려면, 쌍둥이들을 지키려면, 약점을 드러내선 안 됐으니까.

역시 이상하다. 저 여자는. 그리고 나도.

그녀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건 자신인데, 이번에도 제 마음이 술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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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메이아를 마음에 두고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간 스치듯 지나갔던 생각이 불쑥, 뇌리에 떠올랐다.

대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대답하지 않으려고 했던, 대답할 수 없었던 질문이었는지도 몰랐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사람이 한없이 약해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미 한 번 겪었지 않았던가. 쌍둥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선대 공작부부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을.

그래서 앞으로 누군가를 마음 깊이 두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젠 메이아가 자신의 마음속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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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좋아하고 있구나.’

메이아, 내가 바로 이 여자를.

그녀를 새장에 가둬 옭매려고 했지만 결국 가둬진 건 자신이었다.

그때 연신 주춤대던 메이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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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제가 한번 만져 봐도 될까요?”

만져 봐도 되냐니. 남녀 관계에서는 굉장히 묘한 말이었다. 심지어 이곳은 침대 위였다.

물론 제 앞에 있는 이 여자는 단순히 치유를 해주려는 의미로 한 말이겠지만.

라크하는 다른 쪽으로 튀는 생각을 지우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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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만 괜찮다면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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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만져도 되죠?”

허락을 받고도 머뭇거리고 있는 메이아를 보며 라크하는 한숨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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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애준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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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려고 했거든요!”

배짱 있게 외친 메이아가 심호흡을 하더니 라크하의 심장 언저리에 손을 올렸다.

탄탄한 가슴팍 위로 부드러운 손이 닿는 순간, 라크하는 흠칫 놀랐다.

조심스럽고 세심한 저 손길이 무척이나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이건 그저 치유 행위의 일종이다. 절대 다른 목적 같은 건 없다.

라크하는 짐승처럼 날뛰는 제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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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샤처럼 빠르게 사라지진 않네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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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할 필요는 없으니 천천히 해.”

태연하게 말했지만 라크하의 속은 어지럽게 헤집어지고 있었다.

큰일이었다. 과연 문양을 모두 지울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라크하는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라크하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러자 메이아가 손을 살짝 거두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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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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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라크하는 차라리 아픈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겐 오히려 고통이 지독한 갈증처럼 느껴지는 이 욕구를 견디는 것보다 익숙하니까.

흘깃 제 눈치를 보는 메이아의 시선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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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프지 않으니 마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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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다시 메이아의 손은 남자다운 굴곡을 따라 서서히 아래로 움직였다.

메이아의 손이 지나간 자리마다 가시 같은 문양이 옅어지고 있었다.

반면 라크하는 짙어지는 욕구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기 위해 이를 강하게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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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됐어요. 조금만 참아요.”

메이아는 그런 줄도 모르고 다른 손으로 그의 허벅지를 토닥였다. 라크하를 달래주기 위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에겐 더욱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치유 행위의 일종이었던 스킨십도 충분히 자극적이어서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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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라크하는 허벅지를 토닥이는 메이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삼켜버릴 뻔한 충동을 억눌렀다.

그제야 메이아는 욕정으로 들끓는 라크하의 눈을 발견했다. 메이아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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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정신이시죠?”

메이아의 물음에 라크하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제 행동을 고작 ‘능력에 취해서’라고 생각하는 게 속이 뒤틀렸다.

라크하의 입술 사이로 픽 바람 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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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이냐고?”

예전에는 메이아의 능력 때문에 덮칠 뻔한 상황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온전히 순수하게 메이아를 원하는 마음뿐이었다.

메이아의 손목을 휘어잡은 라크하는 그대로 그녀를 침대 위로 쓰러트렸다.

라크하는 입매를 사납게 말아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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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멀쩡해.”

아무래도 순진한 이 여자에게 제 마음을 제대로 각인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

그저 눈 한 번 깜빡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새 침대 위에 누운 채 라크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라크하가 멀쩡하다고 했지만, 행동은 멀쩡하다는 말과 달랐다.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커다란 손이 스르르 손바닥을 쓸며 올라와 천천히 깍지를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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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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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봐서? 내가 그대의 능력에 취한 거라면 진작에 덮쳤겠지.”

라크하의 말대로였다. 능력에 취한 라크하는 조금 더 불도저 같고 맛이 간 느낌이긴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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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은 왜…….”

나도 모르게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폭풍전야처럼 느껴졌다.

막상 먼저 물어놓고는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두려웠다.

황급히 눈을 돌리다가 내 손이 올라간 곳을 인지한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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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맞아요. 공작님께서는 멀쩡하시죠. 그러니 마저 문양을 없앨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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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대답하지 않았어.”

그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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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아.”

내 이름을 부르는 라크하의 저음에 몸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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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지 않아.”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지고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방금 라크하가 한 말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라크하가 왜 나를 좋아하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라크하와 나는 그저 서로가 필요해서 함께 있는 사이였으니까. 라크하도 그걸 늘 강조해왔고.

그냥 이건 한순간의 감정일 것이다. 라크하가 미처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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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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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능력 때문에 내 감정을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하려고?”

라크하가 내 말허리를 자르더니 정확히 내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심기가 불편한 듯 그의 목소리가 심상찮게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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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말하지. 절대 아니야. 그대도 알고 있지 않나. 이젠 그대의 능력으로 내가 이성을 잃지 않는다는 걸.”

라크하의 말이 맞았다. 이제 성물 때문에 그는 내 능력에 취해서 제 의지를 잃고 행동할 일은 없다.

결국 정말 라크하의 진심이라는 것이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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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돼.’

어째서? 라크하가 왜 나를……?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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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내가 묻지. 그대의 마음은 어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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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예전에도 그랬듯이 단호하게 말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리기라도 한 듯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 망설이게 되는 건지…… 기분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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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크하를 좋아해서는 안 돼.’

그에게 익숙해져서도, 그에게 빠져들어서도 안 된다고 이성은 외치고 있었다.

라크하의 옆에 있어 봤자 위험한 일들만 가득할 것이다. 그는 이 세계의 흑막이고, 적이 많으니까.

최근에만 해도 라크하에게 악심을 가지고 있는 데미안 때문에 죽을 뻔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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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아남아야 하잖아.’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한 나에게 지향점은 ‘생존’이었다.

그렇기에 돈을 모으면 아인티아 저택을 떠나려고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라크하에게 흔들리고 휘말리고 있었다.

그가 다치거나 조금이라도 서늘한 태도를 보이면 신경이 쓰였고, 나를 쌍둥이들만큼 소중히 여겨주는 모습에 마음이 동요했다.

모든 게 모순처럼 느껴지며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오랜 침묵 끝에 어렵게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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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어요.”

진심을 고백한 사람에게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애매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서 힘들게 꺼낸 말이었다.

모르겠다는 말이 내 진심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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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

생각 외로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라크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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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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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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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가 있다는 게 아닌가.”

그 말에 나는 라크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한 말에 그런 의미가 있다는 건 내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으니까.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눈매를 휘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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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가 앞으로도 꾸준히 그대를 유혹하면 되는 일이겠군. 그대의 마음에 확신이 생기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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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늘 익히 봐왔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팔딱거렸다.

어째서 그때와 달리 내 마음이 뒤흔들리고 있는 걸까.

라크하가 겹치고 있는 손을 제 입가로 가져다 댔다. 손등 위로 달아오른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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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내게 여지를 줬다는 걸 잊지 마.”

라크하는 달콤하게 웃더니 그 위로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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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 위로 온기가 감도는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나는 당신에게 여지 따위 준 적 없다고.

그렇게 말하며 밀쳐내야 하는데.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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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정함을 품은 저 보라색 눈동자. 이미 한참 전부터 봐왔던 눈이었다.

검술 대회가 있기 전부터였던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전에…….

내가 멍하니 그의 눈을 바라보는 사이에 라크하가 침대에 누워있던 내 몸이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손안에 가득 담겨 있던 온기까지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라크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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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흑마력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으니 나머지도 부탁하지.”

아무 일도 없었고 전부 꿈이었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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