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판도라의 상자 2022.05.09.
“그냥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따뜻한 욕조에 목 끝까지 몸을 담구고 있자니 오늘 있었던 일이 느리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에게 관심을 보이던 레이나와 키네스. 그리고 얼결에 키네스의 첫 춤 상대가 됐던 일까지. 어쩐지 원작 생태계를 파괴하는 황소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나마 원작대로 흘러간 건 연회장에서 라크하가 없어진 것 정도였다.
“레이나는 키네스랑 춤을 추긴 했으려나.”
두 번째나 세 번째 춤이라도 췄어야 할 텐데. 그래야 두 사람의 관계에 접점이라도 생길 것이었다.
‘한번 확인이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아니지. 그냥 딱 맞게 돌아왔어. 나는 곧바로 생각을 부정했다. 그 자리에 있었다간 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몰랐다. 고뇌가 가득했던 목욕을 마친 나는 젖은 머리를 닦으며 테라스로 나갔다. 밤공기를 마시면 마음이 가라앉고 혼잡한 머릿속이 정돈될 것 같았다.
“후.”
난간 앞에 서서 턱을 괸 채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을 때였다. 조심스레 테라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테라스로 들어온 사람은 라크하였다. 나는 살짝 웃으며 라크하를 반겨주었다.
“아, 왔어요?”
“밤바람을 쐬기엔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
“으음, 딱 좋은걸요. 공작님께서는 먼저 들어가 계실래요?”
이제 막 나온 참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열이 오른 머리가 식는 것 같아서 조금 더 밤공기를 마시다가 들어가고 싶었다.
“아니, 나도 바람을 좀 쐬고 싶어서. 그대와 함께 들어가도록 하지.”
라크하가 내 옆으로 다가와 난간에 기대어 섰다. 라크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오늘 휴게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쌍둥이들이 있어서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었는데. 라크하도 두루뭉술하게 얘기하기도 했었고.
'지금 물어볼까?'
어쩌면 둘밖에 없는 지금이 적절한 타이밍일지도 몰랐다.
“저기, 공작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어떤 거지?”
“오늘 있었던 일이 저번에 제가 습격당했던 일과 관련이 있는 거죠?”
내가 정곡을 찔렀는지 라크하의 눈썹이 들썩였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맞아.”
“대체 누가 계속 그런 짓을 꾸미는 거죠?”
말해주기 곤란한 걸까. 라크하가 입을 다물자 짧은 침묵이 우리 사이에 흘렀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라크하는 입을 열었다.
“데미안.”
나는 곰곰이 데미안이라는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역시 외전도, 라크하가 나왔던 장면들도 대충 넘겨 읽어서 그런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역시 물어 봐야겠다. 나는 라크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데미안이 누군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선대 공작이 노예 시장에서 데리고 와서 제 자식처럼 키운 놈이야. 금기의 흑마법을 쓸 줄 아니 본격적으로 복수를 해보려는 거겠지.”
“왜 공작님께 복수를 하려는 거예요?”
“이유를 알고 싶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크하가 나를 말리듯 말을 덧붙였다.
“그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게 좋을 텐데.”
어쩐지 열면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역시 궁금했다. 이곳에서 나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가장 잘 모르는 사람은 라크하였으니까.
“알려주세요.”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라크하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대 공작이 데미안을 데리고 온 건 내가 순종적으로 굴지 않아서였어.”
정확히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나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선대 공작 부부는 흑마법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었지. 흑마법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긍정적인 내용은 결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데미안은 어떤 짓을 당해도 선대 공작을 구원자라고 여기면서 광적으로 따르더군. 심지어 나를 시기하고 질투까지 하면서.”
“그게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건가요?”
“시기와 질투. 그 정도면 다행인 거지. 지금은 적개심에 가까워.”
“어쩌다가 그렇게까지 된 거예요?”
무슨 결정적인 계기가 있기 때문에 변한 게 틀림없었다.
“내가 데미안의 유일한 안식처를 없애버렸거든.”
“유일한 안식처라면…….”
“선대 공작 부부. 내가 그들을 금기의 흑마법으로 미치게 만들어서 북쪽 숲 별장에 가뒀다. 그들이 쌍둥이들까지 건드리니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어.”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내가 지금 무어라 말을 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라크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대 눈에는 나도 미친 것 같겠지. 무슨 이유든 간에 낳아준 부모를 미치게 만들어서 가뒀으니까.”
“……아뇨.”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건 라크하가 쌍둥이들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 라크하가 내린 선택에 대해 무어라 할 자격이 없기도 했다. 집 안에 굴러다니던 술병. 벌어오는 돈을 족족 채가던 아빠. 어느 순간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년, 2년. 몇 년의 시간이 흘러도 상황은 같았다. 결국 나는 짐을 싸고 집을 뛰쳐나왔다. 내가 없다면 아빠가 제대로 살아가지 못할 걸 알면서도. 나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라크하를 마주보며 엷게 웃었다.
“뭐 하나라도 바꾸려고, 벗어나려고 그랬을 거잖아요.”
그렇게 무언가 바뀌었고, 그것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거라면 충분했다. *** 테라스에서 방으로 들어온 나는 두 팔을 매만지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으으, 춥네요.”
“언제는 딱 좋다고 하더니.”
“그땐 정말 그랬다고요.”
나는 퉁명스레 답하며 이불 속으로 다리를 집어넣었다. 밤공기에 손발이 차가웠다. 그 상태로 가만히 의자를 챙기는 라크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침대에 같이 누워서 자자고 할까?’
라크하는 한 번 나를 덮칠 뻔한 적이 있었던 이후로 의자나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자곤 했다. 하지만 매번 그렇게 자게 두기엔 미안했다. 이젠 성물이 있어서 전과 같은 문제가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결국, 나는 굳게 결심을 내렸다.
“저기, 공작님.”
내 부름에 라크하가 나를 돌아보았다. 분명 마음을 먹었는데. 막상 말하려고 하니 목구멍에서 턱 막혔다. 나는 조금 더 머뭇거린 후에야 용기 내어 말을 꺼냈다.
“혹시…… 같이 누워서 잘래요?”
내 제안이 뜻밖이었던 걸까. 라크하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린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정말 그래도 되겠나?”
“네? 네, 물론이죠! 되고말고요.”
오히려 내게 확인하듯 되물을 줄은 몰랐기에 나는 더듬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하가 천천히 내 곁으로 걸어오더니 옆에 앉았다. 어쩐지 간질간질한 기분에 나는 휙 누워 손을 뻗었다.
“잡아요.”
그리고 라크하가 내 손을 겹쳐 잡은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라크하의 손이 이상하리만큼 뜨거웠다. 이미 오늘 한차례 느껴봤던 그 열기였다.
“설마…… 아직도 몸이 안 좋으신 거예요?”
“그대와 접촉하고 있으니 곧 괜찮아질 거야.”
대답하는 목소리는 여상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몸 상태로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있었다고?
“아프면 말이라도 했어야죠!”
“단순히 열이 느껴지는 정도인데 말할 필요가-.”
“있죠!”
나는 라크하의 말허리를 자르며 벌떡 일어났다. 아픈 사람을 붙잡고 계속 밖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거잖아.
“접촉만 했어도 괜찮은 거였…….”
거기까지 내뱉어 놓고 나는 잠시 멈칫했다. 라크하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던 아이샤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이샤도 다시 아픈 건 아니겠죠?”
“아이샤는 괜찮을 거다. 그대가 완전히 잠재웠으니까.”
“네?”
내가 무엇을 잠재웠는데? 내가 눈을 깜빡이자 라크하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아이샤의 팔에 드러났던 흑마력 말이다.”
“그걸 제가 없앤 거라고요?”
라크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상태에선 적어도 가라앉는 데 하루는 필요하니까.”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웠다. 물론 샤키르의 꽃이 지닌 ‘진정제’라는 의미를 큰 범주로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했다.
‘이렇게 다재다능한 능력이었을 줄이야.’
그래서 원작 속에서 키네스에게 축복을 내리고 빨리 죽는 설정으로 잡은 거려나. 새삼 또 발견한 내 새로운 능력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였다. 이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럼 공작님한테도 그 검은 문양이 있다는 거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없어져.”
조만간 저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에 진절머리가 날 것 같다. 나는 라크하에게 손을 뻗었다.
“어디 한번 봐요. 제가 없애드릴게요.”
“됐어.”
“고집부리지 말고요.”
혹시나 아이샤와 같은 위치에 있진 않을까 그의 팔소매를 걷어보았다. 하지만 검은 문양은커녕 말끔했다.
“어디에 있는 거죠?”
“괜찮으니 잠이나 자지.”
나는 이불을 들어올리는 라크하의 팔을 움켜잡았다.
“딱 제가 직접 그 부위에 손만 대면 끝인 거잖아요.”
“그렇게 간단하게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런 거야.”
그 정도로 심각하다면 더욱 그냥 둘 순 없었다.
“보여주기라도 해 봐요.”
라크하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뿐이었는데 이제는 오기가 생겼다. 내가 절대로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처럼 굴자 라크하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알겠으니 팔을 놔 줘.”
나는 그제야 내가 라크하의 양팔을 붙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라크하의 팔을 놓았다. 내게서 자유로워진 그의 손이 제 셔츠 단추로 향했다. 톡, 톡. 하나 둘씩 단추를 풀어내는 걸 보는 순간 나는 라크하가 왜 망설였는지 깨달았다.
‘……이래서 계속 거절했던 거구나.’
하지만 이제 와서 됐다고 하기에는 민망했다. 그리고 이건 라크하를 도와주려는 것뿐이니까.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라크하의 상반신을 마주했다. 조금씩 드러나는 역동적이고 탄탄한 근육에 마른 침만 삼키던 것도 잠시. 나는 눈살을 찡그리며 내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심장이 위치한 가슴 쪽에서부터 복근까지 괴상한 검은 문양이 뒤덮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