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네 남자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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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네 남자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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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네 남자가 아니야
2022.05.06.
“아이샤가 몸이 따끔거린다고 짜증을 내더니 갑자기 열이 나.”
아이샤가 아프다는 소식에 깜짝 놀란 나는 곧장 휴게실로 걸음을 옮기려다 멈칫했다.
내가 혼자 간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아이샤의 보호자는 내가 아닌 라크하니까.
나는 다시 라크하가 있는 쪽을 흘겨보았다.
분명 눈까지 마주쳤는데, 라크하는 아직 샤론의 곁에 있었다.
‘지금 저기서 얘기한다고 안 오는 거야?’
지금 상황이 어떤지,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도 모르고. 이상하게도 울컥, 속이 치밀었다.
“형수님, 형은 내가 데리고 갈게. 형수님은 먼저 가서 아이샤의 곁에 있어 줘.”
델카인도 라크하를 발견한 모양인지 내 눈치를 보더니 드레스자락을 가볍게 당겼다.
나는 그제야 내 표정이 굳어 있다는 걸 깨닫고 표정을 풀었다.
“……그렇게 해줄래? 엄청 바빠 보이시네.”
“으응, 물론이지!”
“그럼 부탁해.”
나는 델카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휴게실로 향했다.
걸어가는 내내 속이 끓었으나 휴게실에 도착한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게 잊혔다.
“으으…….”
아이샤가 휴게실 소파에 누워 있는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곧장 아이샤의 곁으로 가 상태를 살폈다.
아이샤의 이마에 손을 올리자 비정상적으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어.’
의원을 불러와야 할 듯했다. 사람을 부르려고 몸을 일으킨 그 순간이었다.
“으음…….”
아이샤가 뒤척이면서 웅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황급히 다시 몸을 숙여 아이샤의 손을 잡고 물었다.
“아이샤, 정신이 좀 드니?”
“배고프다, 고기이…….”
“고기……?”
아픈 사람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었다.
당황한 나는 아이샤의 이마 위로 다시 손을 올렸다. 방금 전까지 느껴졌던 열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불안정하던 아이샤의 호흡도 가라앉아 있었다.
‘갑자기 열이 떨어진다고?’
말이 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갑자기 열이 난 것도 말이 되긴 하던가?
불현듯 위화감이 들었다. 나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아이샤의 상태가 괜찮아진 건 내가 접촉하고 난 후였다.
‘아이샤한테 열이 났던 이유가 단순히 몸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면?’
이를테면 능력 때문에 그런 거라든가. 그래서 내가 접촉하고 나서 괜찮아졌던 거지.
그 순간, 비틀거렸던 시종이 떠올랐다. 공교로운 타이밍에 아이샤가 아! 하고 비명을 질렀던 것도.
“설마…….”
그 시종이 내가 며칠 전에 외출했을 때 봤던 괴한처럼 흑마법에 당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곧장 휴게실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해.’
황실도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시종이 또다시 찾아올지도 몰랐다. 문 앞에 서서 잠금장치라도 있나 살펴보던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커다란 남자의 몸이 나를 덮쳤다.
“!”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굳고 말았다.
하지만 밀어낼 수가 없었다. 나를 덮친 남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라크하가 짐승이 으르렁대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샤는?”
넋을 놓고 있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대답했다.
“이, 이제 괜찮아요.”
“하…….”
라크하가 한숨 같은 긴 숨을 뱉어냈다. 살갗에 열띤 숨결이 느껴졌다.
간지러움에 발끝이 곱아드는 것도 잠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샤에게서 느껴졌던 열기만큼 라크하의 몸이 뜨겁다고. 그런데 내 몸이 닿자 뜨거웠던 그의 몸이 점차 식어가고 있었다.
‘혹시 아이샤와 똑같은 현상을 겪고 있었던 건가?’
나는 조심스레 라크하에게 물었다.
“공작님,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괜찮으세요?”
“아직 머리가 울려…….”
라크하가 옅은 신음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아이샤와 달리 쉽게 진정되지 않는 듯했다.
“어쩌면 좋죠?”
“조금만 더 이대로 있으면 괜찮아질 것 같아.”
내 접촉으로 괜찮아지는 거라면…….
나는 어색하게 허공을 떠돌던 손을 라크하의 목에 둘렀다. 그때였다.
달그락.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자 라크하의 등 너머로 샤론과 델카인이 보였다.
샤론은 눈을 부릅뜬 채 나와 라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그녀와 눈을 마주하자 라크하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보란 듯이 라크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사람은 네 남자가 아니라는 걸 자각하라고.
그러자 샤론이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휙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지금은요?”
“……이제야 살 것 같아.”
신음을 내뱉듯이 중얼거린 라크하가 단단한 팔로 내 허리를 세게 휘어 감았다.
이제 살 것 같다면서? 괜찮다는 듯이 말하면서 더 세게 껴안는 손길에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드레스 감촉이 원래 이랬던가.”
“……!”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라크하의 손이 맨살이 드러난 내 등을 훑었다.
등골에 라크하의 손가락이 스친 순간 다리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낯선 감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손에 잡히는 대로 세게 움켜쥐었다.
그게 라크하의 머리카락이 될 줄은 몰랐지만.
“윽.”
“헉.”
라크하의 신음과 함께 델카인이 숨을 짧게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서둘러 라크하의 머리카락을 놓았다.
“미, 미안해요. 사실 공작님께서 만지시던 게 드레스가 아니어서…….”
라크하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며 내 눈을 슬쩍 피했다.
“고의가 아니었어.”
“네…… 알아요.”
그랬겠지, 오늘 내내 숄을 걸치고 있었으니까.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나와 라크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침묵을 갈라놓은 건 아이샤의 긴 하품 소리였다.
“하아암. 뭐야, 둘이 거기 가만히 서서 뭐 해?”
“아이샤! 일어났어?”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돌려 아이샤에게 다가갔다.
그런 내 뒤를 기다렸다는 듯이 델카인이 총총 따라왔다.
“아이샤, 너 이제 괜찮아?”
“뭐가?”
“방금 전에 가려워 죽겠다고 했잖아.”
“맞다! 그랬었지!”
그제야 내가 없는 사이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는지 아이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아이샤가 내게 팔을 내밀었다.
“언니, 언니! 이거 봐! 내 팔에 이상한 게 생겼어!”
아이샤의 팔 위로 검은색의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 이게 무슨…….”
깜짝 놀라 아이샤의 팔을 보는데 라크하가 곁으로 다가왔다.
“몸이 버티지 못해 흑마력이 밖으로 드러난 거야.”
“갑자기 이런 게 왜 생긴 거죠?”
“……일단 그 정도라면 금방 없어질 테니 가만히 두면 돼.”
내가 물었던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대답이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지?'
일전에 키네스가 응접실을 나가고 나서도 물었으나 지금처럼 둘러댔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라크하를 바라보던 때였다.
아이샤가 몸서리를 치며 팔을 흔들었다.
“으으, 얼른 없어졌으면 좋겠어! 징그럽단 말이야! 막 괜히 후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후끈거리는 것 같다고?
“아이샤, 어디 한번 봐 봐.”
“역시 나를 걱정해 주는 건 언니밖에 없어.”
아이샤가 감동 어린 눈으로 내게 딱 달라붙더니 팔을 내밀었다.
나는 조심스레 이상한 문양이 있는 곳에 손을 짚어보았다. 열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음, 다행히 열은 안 나는 것 같은데?”
그리고 손을 떼어낸 순간이었다. 아이샤와 델카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은 문양이 감쪽같이 없어져 있었다.
“형수님이 만지니까 갑자기 없어졌는데?”
“그러니까! 언니가 한 거야?”
……내가? 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능력도 있단 말이야?'
하지만 나는 이내 속으로 부정했다. 라크하도 금방 없어진다고 했었으니까.
그저 공교롭게 타이밍이 맞물린 거겠지.
***
아인티아 공작의 저택은 부산스러웠다.
아직 탄신 연회가 한창일 시간에 저택의 주인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저택을 정리하고 있던 그 시각.
쌍둥이들은 작은 회의를 열고 있었다. 회의가 열린 장소는 델카인의 방이었다.
아이샤는 델카인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아, 피곤한데 왜 부른 거야.”
“큰일 났어.”
아이샤는 근심이 가득한 델카인의 얼굴을 흘겨보더니 시큰둥한 얼굴로 대꾸했다.
“큰일은 무슨. 델카인, 너는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아.”
“넌 잠들어 있느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도 모르지?”
델카인의 질문에 아이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겠어.”
“많은 일이 있었지. 황제가 첫 춤을 형수님이랑 추기까지 했으니까.”
“뭐? 황제랑?!”
아이샤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주로 첫 춤은 약혼자나 연인에게 신청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의미가 있었다.
이를테면 마음에 둔 여인이거나 황실과 관련된 가문의 여인일 때에도 황제와 첫 춤을 추긴 하니까.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지 황제와 첫 춤을 췄다는 건 큰 이슈거리였다.
“응, 이제 황제가 본격적으로 형수님을 노리는 것 같아.”
“오빠는 왜 그걸 안 말린 거야!”
“형이 마침 그 자리에 없었거든.”
아이샤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지 쿵, 주먹으로 땅을 내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황제는 왜 계속 끼어드는 거야!”
델카인은 힘이 잔뜩 들어간 아이샤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건드렸다.
“진정해 봐. 그것만 문제가 아니야. 오늘 형수님이 형 머리채를 잡았다고.”
“그게 뭐가 문제인데?”
머리채를 잡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이샤는 단순하게 생각했으나 델카인의 표정은 심각했다.
“부부의 세계라는 책에서 나온 부부 싸움 장면이랑 똑같아. 이제 다른 계획을 실행해야 할지도 몰라.”
“싸울 수도 있지. 너랑 나도 맨날 싸우잖아. 그리고 우리 계획은 이미 성공했는데 또 다른 걸 해야 할 필요가 있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아이샤를 보며 델카인은 답답한지 이마를 짚었다.
'그걸 어떻게 우리끼리 싸우고 치고 박는 일이랑 같다고 볼 수 있지?'
델카인은 아이샤의 말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어떤 책을 읽어도 어른들의 관계는 복잡하고 미묘해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되어 있었으니까.
델카인은 아이샤에게 대충 넘길 일이 아니라는 걸 일깨워주기 위해 예를 하나 들었다.
“어른들은 그렇게 싸우면 가출을 하기도 한대. 부부의 세계라는 책에서도 결국 아내가 가출했었어.”
“가출이라고?”
가출. 그 단어만으로도 아이샤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입을 쩍 벌린 아이샤는 부랴부랴 침대에서 내려왔다.
“뭐야, 너 어디 가?”
“언니가 가출할 수도 있다는 거 아니야! 얼른 가기 전에 붙잡아야지!”
지금 시간에? 델카인은 서둘러 아이샤의 앞을 막아섰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진짜 형수님이 가출한다는 건 아니잖아, 멍청아!”
언제쯤 마음 놓고 고민 상담을 할 수 있는 남매가 될지. 아직은 까마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