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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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2022.04.22.
정신없었던 휴가가 끝난 이후.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줄만 알았으나 내 착각이었다. 탄신 연회를 앞두고 있는 탓이었다.
아이샤를 괴롭혔던 마담 이빌레아는 내게로 배정되었다.
“시터님께서 탄신 연회에 함께 참석하신다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차마 내 정체를 밝힐 수는 없으니 나는 어물쩍 대답했다.
하지만 이빌레아는 애초에 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저 이빌레아, 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네요.”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내 드레스를 맞추는 동안 이빌레아의 입가에는 음흉한 미소가 걷히지 않았다.
“제가 누가 봐도 눈이 휙 돌아갈 만한 드레스를 제작해 드릴게요.”
내 일정은 탄신 연회에 입고 갈 드레스를 맞추는 걸로 끝나지 않았다.
예법과 춤 연습 등 새로운 일정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그 일정은 탄신 연회 하루 전날인 오늘까지도 이어졌다.
나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즐거운 오후입니다. 시터님.”
그곳에는 말투와 표정은 전혀 즐겁지 않아 보이는 시롬이 있었다.
“오늘도 잘 부탁해요, 시롬.”
며칠 전부터 시롬은 모든 일과를 마친 오후에 내게 연회 예법과 춤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탄신 연회 전까지는 내 신분을 아직 밝힐 수는 없어서 그런 거라나 뭐라나.
얼결에 유일하게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시롬이 임시 교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그래도 몇 번 얼굴을 맞대고 춤을 추다 보니 어느덧 친해질 수 있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시롬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 연습이니 열심히 해야겠네요.”
“오늘은 완벽하게 추실 수 있을 겁니다.”
시롬이 잔뜩 굳은 얼굴로 내 손을 맞잡았다.
그럴 만도 했다. 며칠 동안 고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시롬의 발을 밟아댔으니 말이다.
“자, 이제 턴할 차례입니다.”
여기가 늘 고비였다. 시롬도 긴장한 듯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만큼은 발을 밟지 않으리!
비장하게 마음을 먹고, 나는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시롬!”
“시터님!”
이게 바로 특훈의 결과란 말인가!
무사히 턴을 마친 나는 시롬을 감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롬은 나보다 더 들뜬 눈으로 날 마주 보았다.
눈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감동의 물결이 우리를 휘감아 돌았다.
“드디어 이 지독한 야근의 끝인 겁니까?”
“물론이죠!”
벅차오르는 감동에 나와 시롬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시롬과 추는 환희의 댄스와 함께 탄신 연회 전날의 해가 지고 있었다.
***
짙은 어둠이 찾아온 밤.
라크하는 감고 있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이불 위로 볼록 튀어나온 조그마한 몸이 미약하게 뒤척거리고 있었다.
라크하는 침대 가에 앉아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메이아.”
이불 속에서 푸른색 눈동자가 천천히 드러났다.
메이아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가 싶더니 짧게 숨을 들이켰다.
“아,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어요?”
“그대가 자지 않는데, 내가 잠에 들 수 있을 리가.”
맞잡고 있던 손을 놓은 라크하는 메이아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손길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긴장이 돼서…….”
메이아가 머쓱하게 웃더니 상체를 일으켰다.
“탄신 연회에 처음 참석해 보기도 하고, 춤이나 예법도 이제 막 배웠으니까 그런가 봐요. 물론 오늘은 실수 하나 없이 춤을 추긴 했는데, 평소에 하도 실수를 해서 그런지 걱정되는 거 있죠.”
탄신 연회가 꽤 신경이 쓰였던 건지 메이아는 한 번 입이 열리자 폭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 모습에 라크하는 한숨처럼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춤 때문에 그런 거라면 한 번 합을 맞춰 볼까? 실전 같은 연습만큼 긴장이 덜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으음…… 그럴까요?”
메이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라크하가 다른 팔로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메이아가 놀란 듯 짧게 비명을 지르더니 고개를 들어 라크하를 올려다보았다.
“시, 시롬은 허리를 잡지 않았는데.”
“시롬……?”
라크하는 눈살을 구겼다. 그렇지 않아도 시롬에게 맡기는 게 거슬렸었는데.
이름까지 부를 정도로 친해졌다고?
그때 메이아가 라크하의 눈치를 보더니 빠르게 말을 바꾸었다.
“말이 헛나왔네요. 보좌관님이요.”
“그래, 그랬겠지.”
내가 그러라고 시켰으니까.
순간 심술이 오른 라크하는 가느다란 몸을 더욱 제게로 바짝 붙였다.
부드러운 몸이 제 품에 들어오는 순간 라크하는 더 없는 충족감을 느꼈다.
그제야 라크하는 살짝 표정을 풀고 발을 움직였다.
“그럼 시작하지.”
“그, 그러죠.”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 아래 비친 메이아의 목덜미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순간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허리를 더욱 세게 움켜쥐고 싶다는 충동이 물씬 들었다.
종잡을 수 없는 제 감정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델카인이 말했던 방법대로 메이아가 저를 사랑하게끔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 제 마음이 더 술렁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작님, 놓아주셔야 턴 동작을 할 수 있는데…….”
“아.”
조그맣게 들려온 메이아의 목소리에 라크하는 그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무사히 턴을 마친 메이아의 손을 잡으려던 때였다. 스텝이 꼬인 메이아가 비틀거렸다.
넘어지진 않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이성과 달리 몸은 메이아를 향해 손을 뻗은 뒤였다.
얼결에 라크하의 품에 안긴 메이아는 눈을 크게 떴다.
“!”
맞닿은 가슴팍에 크게 진동하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 순간, 메이아는 라크하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하지만 라크하가 꿈쩍도 하지 않아 오히려 메이아가 제 힘에 밀려났다.
메이아가 휘청이자 라크하는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메이아!”
풀썩!
그녀의 머리 뒤를 감싼 라크하와 메이아의 몸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자신의 아래에 깔린 메이아를 보며 라크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실수도 많고 부주의한 여자다. 그래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군.”
계속 눈에 밟혔다.
“……죄송해요.”
메이아는 라크하의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대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그냥 내가 일부러라도 밀려났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공작님이 일부러 제 손에 밀려나 주신다고요?”
“그래.”
메이아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천천히 빼내려던 때였다.
“풋.”
갑자기 메이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지?”
“아, 재미있는 생각이 나서요.”
라크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메이아는 아직 자신의 밑에 깔려있었다.
분명 위기감을 느껴도 모자랄 상황인데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니.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기라도 하는 걸까?
“마냥 재밌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네?”
라크하는 반쯤 충동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라크하가 입매를 휘어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거든.”
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새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게 선연히 눈에 담겼다.
“우리는 나름 약혼한 사이잖아?”
자신을 의식하라고. 그저 자각만 시켜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어디까지 생각한 걸까.
황급히 손을 뻗은 메이아가 라크하의 입을 막았다.
“서류상으로만 약혼일 뿐이지 엄연히 저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
“알아.”
라크하는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제 입을 막고 있는 메이아의 손을 잡아 내렸다.
전에 저 말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그렇게나 나빴는데.
지금처럼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귀엽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저 경고만 했을 뿐이야.”
라크하는 우아한 맹수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대도 약혼자인 나를 의식하긴 하라고.”
나지막하고 담담한 목소리가 메이아의 마음속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
도무지 심장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거의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라크하는 왜 그렇게 행동한 걸까.
그리고 왜 나는 그 순간 그를 강하게 밀어낼 생각을 못 했을까.
마치 내가 라크하에게 마음이라도 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헉.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기겁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안 돼요! 시터님! 기껏 손질한 머리가 헝클어져요!”
아차. 리타가 머리를 손질해 줬었지.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그제야 거울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하늘빛이 도는 드레스는 내 몸에 딱 맞아떨어졌다.
넋을 놓고 내 드레스를 바라보던 나는 살짝 몸을 돌린 순간 멈칫했다.
“헉.”
“시터님께서 보셔도 너무 예쁘죠?”
“너무 파였어…….”
나는 후다닥 거울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드레스를 더 자세히 살펴봤다.
짧은 치마는 몰라도 이렇게 등이 파인 옷은 입어본 적이 없었다.
충격을 먹은 얼굴로 등을 바라보고 있자 리타가 번쩍이는 비늘이 붙어 있는 숄을 흔들어 보였다.
“이거라도 챙겨드릴까요?”
저걸 입었다간 내가 연회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내 표정이 잔뜩 굳어지자 리타가 볼을 긁적이더니 옷장을 뒤졌다.
“이건요?”
“아, 그걸 입으면 될 것 같아요.”
리타가 꺼낸 숄은 내 드레스와도 잘 어울렸고, 파인 곳을 가릴 만큼 길이도 적당해 보였다.
리타에게 숄을 받아 걸치던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리타가 방문을 열었다.
방문이 열리자마자 아이샤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우리 왔어!”
“얘들아, 왔…….”
뒤를 돌아보며 인사를 건네려던 나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심장을 꾹 눌렀다.
심장 폭행이란 게 바로 이런 걸까.
머리에 화관 같은 장신구를 한 아이샤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채 활짝 웃으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델카인은 한쪽 어깨에 망토가 달려 있는 푸른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내 심장아 살아 있니?’
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곁으로 다가온 아이샤와 델카인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언니, 어디 아파?”
“형수님, 괜찮아?”
너희들 때문에 안 괜찮아. 그래, 이런 게 좋아하는 감정이지.
날뛰는 심장을 겨우 가라앉힌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쌍둥이들을 반겨주었다.
“응, 물론이지.”
내 귀여운 똥강아지들. 나는 아이샤와 델카인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러자 둘은 볼을 붉히며 좋아했다.
세상 귀여운 것들을 합쳐 놓았다면 요 똥강아지들이 아닐까.
“오늘 둘 다 너무 멋있네.”
“정말?”
“형수님도!”
둘을 껴안으려고 손을 뻗는데, 아이샤와 델카인이 각자 내 손을 잡았다.
“이제 가자는 거지?”
“그럼 얼른 본관으로 가자, 형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런 의미가 아니었으나, 아무렴 어때.
“그래, 얼른 가자.”
나는 쌍둥이들을 보며 씩 웃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