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다음 계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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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다음 계획은?
2022.04.15.
쌍둥이들이 뛰쳐나가지 않도록 방문 앞을 철통 사수하라.
황제가 방문하자마자 시롬이 아인티아의 기사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 명령은 바람직했다.
쾅!
기사들 때문에 방에서 나가지 못하자 아이샤가 방문을 쾅 걷어찼다.
“야! 다 죽여버리기 전에 얼른 열지 못해?!”
살벌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기사들은 벌벌 떨어야 했다.
그래도 열리지 않는 문을 보며 아이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델카인! 그렇게 창문 밖만 볼 때가 아니라고! 너도 언니가 황제랑 같이 오는 거 봤잖아!”
“그런다고 문을 열어 주는 것도 아니잖아.”
아이샤의 독촉에도 여전히 델카인은 창문 밖만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이샤는 이를 바득 갈았다.
“짜증 나!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짜증 날 만해. 지금 나도 무척 짜증 나거든.”
“뭐?”
아이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델카인이 자신에게 공감해주는 일은 드문 탓이었다.
“황제가 형수님을 건드리는 건 내 예상 밖이니까.”
그 순간 아이샤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몰랐다. 델카인의 머리를 이용한다면 황제를 엿 먹일 수 있을지도 몰라!
“델카인, 있잖아…….”
“안 돼.”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아이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으나 델카인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할지 뻔하지. 황제가 괜히 황제인 줄 알아? 반역으로 찍히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
단호한 델카인의 대답에 아이샤가 눈가를 좁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비장한 얼굴로 주먹을 위로 치켜들었다.
“좋아! 반역이다! 언니를 채가려고 하다니 이건 반역 인정이야!”
다짜고짜 반역을 외치는 아이샤를 보며 델카인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럼 정말 이대로 얌전히 지켜보고만 있으라고?”
“그럴 리가.”
그렇다고 정말 얌전히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소리는 아니었다.
델카인은 창문에서 시선을 뗀 뒤 아이샤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형수님의 담당 하녀를 부르자.”
“왜?”
“당장 내일 계획을 실행해야겠어.”
더 늦기 전에 계획을 앞당길 필요가 있었다.
***
라크하가 휴가를 주면 뭐 하나. 제대로 쉬지를 못했는데.
심지어 난데없는 습격에다가 키네스까지 만났으니 그야말로 최악의 휴가였다.
하지만 나는 금세 생각을 고쳐먹었다. 내가 잊고 있는 게 있었다.
바로, 오늘은 쌍둥이들의 수업이 없는 날이었으니까!
‘이런 걸 보고 꿀 연차라고 하는 걸까?’
드디어 모처럼 온전히 나를 위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나는 언제 우울했냐는 듯 기분 좋게 기지개를 쭉 폈다.
‘이제 아이샤만 사고를 치지 않으면…….’
똑똑.
노크 소리에 심장이 아래로 주저앉았다.
나는 기름칠이 덜 된 기계처럼 삐걱대며 문을 바라보았다.
“시터님, 리타예요.”
“네, 들어오세요…….”
제발, 제발. 나는 제발 쌍둥이들과 관련된 일만 아니길 속으로 빌고 빌었다.
방으로 들어온 리타가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바쁘세요?”
“바쁘진 않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내가 불안하게 쳐다보자 리타가 손사래를 쳤다.
“아뇨, 전혀요! 이번에 귀한 찻잎이 들어왔는데, 시터님께서 괜찮다고 하시면 차를 준비해드리고 싶어서요.”
“으음…… 어떤 찻잎인데요?”
“베리마시타 찻잎이라고 하는데요. 달콤하면서 은은한 향이 나는 차인데 맛이 좋기로 유명해요.”
음…… 그래, 엄청 맛있을 것 같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귀한 찻잎이라고 하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좋아요, 한번 마셔볼래요.”
“방보다는 밖에서 드시는 건 어때요? 오늘 햇살도 따뜻하고 바람도 딱 적당해서 차를 즐기시기 좋을 거예요.”
리타의 말대로 오늘 날씨는 무척이나 좋았다. 이런 날 밖에서 차를 마시면 꽤나 운치가 있을지도.
하지만 혼자 밖에서 차를 마실 생각을 하니 심심할 것 같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치가 보일 것 같기도 하고.
‘같이 마실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냥 안에서 마실까 싶던 그때 리타가 눈에 띄었다.
아니, 바로 옆에 함께 마실 사람이 있잖아!
나는 손뼉을 짝 치며 리타에게 물었다.
“혹시 저랑 같이 차 한잔하실래요?”
내 제안에 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시터님이랑요?”
“아…… 안 되나요? 그러면 그냥 방에서 마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내가 말을 잘못하기라도 한 걸까. 별안간 리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아뇨! 돼요! 되고말고요! 제가 함께해 드릴게요!”
뭔가 이상한데. 눈을 가늘게 뜬 채 쳐다보자 리타가 내 눈을 피했다.
그러더니 내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서둘러 문손잡이를 잡고 열었다.
“어, 얼른 나가요!”
***
델카인이 세운 첫 번째 계획은 메이아를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우선 형수님을 서쪽 별관 후원으로 불러내 줘.
-그런 다음에는요?
-신호를 주면, 후원에 있는 미로 정원을 산책시켜 준다고 하면 돼. 그리고 몰래 빠져나와.
델카인이 리타에게 지시를 내리는 동안 아이샤는 연신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실패하면 죽이겠다는 듯이.
‘하마터면 그대로 아가씨의 손에 끔찍하게 살해당할 뻔했어.’
리타는 아직도 불안하게 쿵쿵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밖에 나가는 걸 꺼려하던 것과 달리 다행히 메이아는 막상 나오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상쾌한 바람에 흩날리며 반짝이는 백금발. 입가에 잔잔하게 맺혀 있는 미소.
평소에도 아름다우신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유독 더 외모에 빛이 났다.
“리타 씨, 오늘 참 날씨가 좋지 않나요. 모처럼 이런 날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요. 운이 좋게도 아이샤가 찾지도 않고.”
설마 시터님께서 아가씨와 도련님께서 술책을 부렸다는 걸 눈치채신 건가?
괜히 리타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얼른 신호나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툭, 떼구르르.
리타의 발 근처로 돌멩이가 굴러 떨어졌다.
‘도련님께서 보내시는 신호구나.’
리타는 들고 있던 찻잔을 아래로 내려놓으며 메이아에게 물었다.
“시터님, 서쪽 후원에서 조금만 더 뒤쪽으로 가면 참 예쁜 곳이 있는데 한번 걸어보실래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마침 차도 다 마셨거든요.”
이 정도면 나름 상황이 수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리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를 따라오세요. 제가 구경시켜 드릴게요.”
“좋아요. 오늘 리타 씨랑 시간을 보내길 너무 잘한 것 같아요.”
순수하게 활짝 웃으며 좋아하는 메이아를 보면서 리타는 양심이 콕콕 찔렸다.
‘죄송해요, 시터님. 제가 꼭 나중에 무릎을 꿇어서라도 사과하겠습니다.’
아마 쌍둥이들이 꾸민 계략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무척 화를 낼 것이었다.
리타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메이아를 후원으로 안내했다.
“와, 정말 잘 꾸며 놨네요.”
메이아는 감탄사를 터뜨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로 정원처럼 양옆이 막힌 채 길이 복잡하게 되어 있긴 하지만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심심할 때쯤 등장하는 알록달록한 꽃들이며, 곳곳에 허브도 심어놨는지 상쾌한 향이 났다.
“향기도 좋고, 날이 좋아서 더 예뻐 보이는 것 같기도…… 응?”
신나서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던 메이아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뒤를 돌아봤다.
“……리타 씨?”
뒤를 따라오던 리타가 없었다.
***
“언니가 여기 미로 정원에 있다는 거지?”
“네,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으실 거예요.”
“수고했어. 가 봐.”
리타가 아이샤와 델카인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한 후 도망치듯 벗어났다.
“델카인, 다음 계획은?”
풀숲에 숨어 있던 아이샤가 비밀 요원처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햇살 좋은 날, 미로에 갇히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으니까. 이제 운명적 만남만 남은 거지.”
“내가 불러올까?”
아이샤가 금방이라도 뛰어갈 듯이 벌떡 일어나자 델카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이샤라면 분명 다른 길로 샐 게 뻔했다.
“아니, 내가 형을 불러올게. 그사이에 너는 형수님이 나오는지 잘 확인하고 있어.”
“좋아. 그런데 이런다고 둘 사이가 깊어지긴 해?”
“물론이지. 헤매던 미로 정원에서 뜻밖의 만남. 이럴 때 서로를 운명처럼 느끼게 될 거야.”
델카인의 말을 주의 깊게 듣던 아이샤가 표정을 구겼다.
“언니랑 오빠가 운명이라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짜증이 나는데.”
“정신 좀 차려. 어쨌든 너는 거기서 잘 지켜보고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알겠어.”
솔직히 혼자 놔두는 것도 불안하긴 한데.
델카인은 찝찝한 얼굴로 아이샤를 두고 서쪽 별관으로 향했다.
***
사락, 사락.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집무실에 조용히 울렸다.
라크하가 서류를 확인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파트라슈의 얼굴 위로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이윽고 서류를 넘기는 손이 멈추었다.
“여기에 적힌 대로라면 최근 몇 달 동안에는 기사단에 변동된 인원은 없다는 건데…… 확실한가?”
“네, 확실합니다. 제가 바로 파트라슈 파블로프 아닙니까.”
파트라슈는 특유의 능글거리는 말로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라크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서류를 툭 책상 위로 놓은 라크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럼 어제 내가 봤던 기사는 뭐지?”
“……외부에서 저희 가문의 기사를 보셨단 말입니까?”
“그래.”
한쪽 구석에서 ‘테리’ 명단을 정리하고 있던 시롬이 두 사람의 대화에 속으로 혀를 찼다.
아인티아 공작가의 기사들을 관리하는 건 단장인 파트라슈의 업무였다.
하지만 파트라슈는 검술 실력에 비해 꼼꼼한 성격은 아니었다.
분명 파트라슈가 놓친 부분이 있을 게 뻔했다.
“아, 이번에 북쪽 숲으로 파견을 보낸 기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침묵이 더 길어지기 전에 변명거리를 떠올린 파트라슈가 서둘러 말했다.
하지만 막상 말하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북쪽 숲에서 아무 연락이 없군요. 파견을 보낸 기사가 도착했다면 바로 연락이 왔을 텐데 말입니다.”
“그 기사에게 특징이 있나?”
파트라슈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기사의 외양을 설명했다. 다행히 파견을 보내느라 최근에 만난 적이 있기에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모든 설명을 들은 라크하가 눈가를 좁히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나마 이전부터 북쪽 숲에 있던 기사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아직 그쪽은 아무 일도 없이 멀쩡하다는 거니까.
“그 기사가 맞는 것 같군. 이만 가 봐.”
파트라슈는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총총 집무실을 나섰다.
라크하의 다음 목표는 미리 집무실에 불러둔 하녀였다.
“공작가에서 일하고 있는 사용인들 중에 연차가 가장 높다고.”
“네, 네. 맞습니다.”
“그럼 혹시 서쪽 별관 다락방에 있던 아이를 기억하느냐?”
허리를 숙이고 있던 하녀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데, 데미안을 말하시는 겁니까?”
“그래, 언제 데미안을 마지막으로 보았지?”
“5년 전입니다. 스스로 공작가를 나갔을 겁니다. 워낙 저택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5년 전이라면 라크하가 선대 아인티아 공작 부부를 쫓아냈을 무렵이었다. 북쪽 숲, 깊은 별장으로.
라크하는 턱을 괸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데미안. 쌍둥이들이 태어나기도 전, 선대 아인티아 공작이 데려온 아이였다.
지나가다 한 번씩 눈에 띌 때마다 라크하는 데미안을 무시하곤 했다.
자신과 너무 다른 아이였으니까.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공작님.
-너는 왜 공작님의 관심을 거절하는 거야? 차라리 내가 공작님의 아들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선대 아인티아 공작의 관심을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던 미련한 아이였다.
쌍둥이들이 태어나며 데미안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잊고 있었는데…….
똑똑, 문득 들려온 노크 소리가 라크하의 상념을 깼다.
들어온 사람은 델카인이었다.
“형, 혹시 바…….”
델카인의 시선이 라크하 등 뒤에 있는 창문으로 향했다.
아직 낮인데도 바깥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비라도 올 것처럼.
“……쁘겠지. 내가 시간을 잘못 맞춰 왔네.”
델카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이를 간과할 라크하가 아니었다.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지?”
쌍둥이들이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