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는 능력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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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는 능력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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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는 능력인 것처럼
2022.04.11.
잠시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내가 익히 알던 사람이었으니까.
넓은 어깨와 남자다운 목선, 부드러워 보이는 진한 금발 머리.
그리고 일전에도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던 붉은 눈동자.
남주인공, 키네스 제르디아였다.
괴한도, 라크하도 아니고 키네스가 여기에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설마 테리투스가 혹시 몰라서 불렀다는 '그 아이'가 키네스였어?’
테리투스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키네스 역시 나 못지않게 당황한 눈치였다.
“그대가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하하.”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자 키네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걸 어쩐담. 솔직하게 말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머리 위로 부드러운 울림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일단 거기서 일어나는 게 좋겠군.”
“네, 네!”
나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오래 쭈그려 앉아 있던 탓일까.
찌릿.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저릿한 감각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나?”
“아…… 조금 다리가 저려서요.”
자연스럽게 키네스에게 대답해 주던 나는 멈칫했다.
잠깐, 이렇게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이,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물러나려던 찰나였다.
“잠시.”
나는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거덕대며 키네스를 올려다보았다.
“요 근방에 느껴지는 기운이 범상치 않아. 위험할지도 모르니 함께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군.”
키네스가 내 옆에 다가와 섰다. 아니, 나는 그쪽이랑 함께 있는 게 더 위험하다고!
나는 구겨지려는 미간을 가까스로 펴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인티아 공작가로 가는 길이겠지?”
키네스가 내 말허리를 부드럽게 잘랐다. 내 거절은 받지 않겠다는 듯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키네스가 입매를 휘어 부드럽게 웃었다.
“내 친히 아인티아 공작가로 데려다주지.”
지금 이 순간, 테리투스가 이토록 미울 수가 없었다.
***
라크하와 함께 온 거라고 둘러대기까지 했으나 키네스는 끄떡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위험한 곳에 나를 혼자 둔 라크하에게 벌을 내려야겠다는 식으로 나오니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키네스와 함께 마차를 타게 되었다.
나름 몇 번 외출을 해서 그런지 공작가로 돌아가는 길이 어느 정도 눈에 익었다.
‘만약 신전으로 가는 것 같으면 바로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거야.’
키네스가 거짓말을 할 위인은 아니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 밖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괜찮나?”
잠자코 나를 지켜보고 있던 키네스가 나를 향해 물었다.
괜찮냐니?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내가 단검에 뺨을 베였다는 걸 떠올렸다.
“아, 살짝 베인 거라 괜찮아요.”
“흉이 질 것 같은데…….”
“그 정도까진 아닐 거예요. 피도 금방 멎었거든요.”
상처가 난 것도 잊었을 정도로 아프지 않아 큰 상처는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키네스의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내 뺨을 향해 있었다.
‘많이 심각한가?’
나는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확인해 보았다.
창문에 특수 처리가 되어 있는지 얼굴이 비치지 않았다.
문득 걱정이 된 나는 키네스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상처가 깊어 보이나요?”
“흐음.”
키네스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내게 몸을 숙였다.
“깊어 보이지는 않는데…….”
키네스의 손끝이 내 뺨에 닿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흠칫하자 키네스가 어린아이를 달래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에게 해를 입히려는 게 아니니 안심해.”
그 순간 키네스의 손에서 푸른 기운이 일렁였다.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굳어 있는데 키네스가 엷게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이러면 흉이 지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을 거다.”
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키네스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키네스가 방금 쓴 능력은 신력이었으니까.
‘고작 이런 상처에 신력을 쓴다고?’
이미 키네스의 몸은 금이 간 그릇이나 다름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위태위태한 상태인데 그런 상태에서 신력을 쓴다면 오히려 위험했다.
“……어째서 신력을 쓰신 거죠?”
“그대가 보통 사람은 아니지 않나. 그리고-.”
키네스가 내 뺨에 닿았던 손을 살짝 쥐었다 폈다.
“접촉만으로도 몸이 안정되는 느낌이 나니까.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는 능력인 것처럼.”
“……!”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렇게 내 능력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할 줄이야.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턱 막혔다.
키네스는 잔뜩 굳어 있는 나를 한 번 쓱 흘겨보더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냥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떠봤던 걸까.
그 뒤로 키네스는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
쾅. 응접실 문이 세차게 열렸다.
곧장 마주친 보라색 눈동자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고, 공작님.”
“…….”
라크하의 흉흉한 기세에 움츠러들 법도 한데, 내 앞에 있는 키네스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응접실로 들어온 라크하가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하자 그제야 키네스는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 공작.”
“어째서 메이아와 함께 있는 겁니까.”
“그저 운명처럼 이끌리듯 왔을 뿐인데 메이아 양이 있더군.”
키네스의 대답에 라크하의 눈에 서려 있던 경계심이 더욱 짙어졌다.
그러든 말든 키네스는 한결같이 여유로웠다.
“메이아 양의 치료를 해주고 공작저까지 데려다주기까지 했는데 그렇게 쳐다보면 섭섭한데.”
“치료……?”
라크하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나를 내려다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배처럼 흔들렸다.
“……네, 뺨이 살짝 베였었거든요. 별거 아닌 상처였어요.”
그 와중에도 키네스는 라크하를 약 올리듯 차를 홀짝였다.
“음, 오늘따라 유난히 차향이 좋은 것 같군.”
“…….”
두 남자 사이에 서늘한 기류가 흘렀다.
웃는 얼굴의 키네스와 섬뜩한 얼굴의 라크하를 보며 나는 눈물을 삼켰다.
‘이런 상황을 원한 게 아니었는데…….’
나를 데려다주고 그대로 떠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마침 여기 근방에 볼일이 있으니 내 보좌관이 오기 전까지만 머물고 가도록 하지. 겸사겸사 아인티아 공작이 오면 인사도 하고 말이야.
황제만 아니었다면,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냐고 그대로 멱살을 잡고 흔들었을지도 몰랐다.
“공작도 앉아서 같이 차 한잔하게.”
키네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이 와중에 차가 넘어가냐고. 도무지 키네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철저히 속내를 숨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불안했다.
심지어 라크하가 오고 나서도 차나 권하고 있으니…….
“그럼 메이아는 방으로 보내겠습니다.”
내 곁으로 온 라크하가 내게 눈짓을 주었다.
내가 그 말만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하지만 차마 좋아요! 하고 벌떡 일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탁.
때마침 키네스가 눈치를 주듯 찻잔을 내려놓았다.
“음, 공작은 메이아 양을 많이 아끼나 보군?”
“약혼을 한 사이인데 어찌 아끼지 않겠습니까.”
처음으로 키네스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물론, 잠시이긴 했지만.
“그래, 약혼을 했다지.”
“네, 그렇습니다.”
“요즘 약혼을 했다가 파하는 경우도 흔하다던데.”
‘너네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라고 돌려 말한 게 틀림없었다.
“저희는 다를 겁니다.”
라크하가 내 어깨를 가볍게 쥐며 말하자 키네스의 눈빛이 한층 가라앉았다.
하지만 키네스는 여유롭게 입매를 휘었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약혼이라면 다르겠지.”
여전히 키네스의 말속에는 가시가 솟아 있었다.
내 어깨를 잡고 있는 라크하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라크하를 타이르듯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쳤다.
‘참아. 참아야 하느니라.’
이러다 라크하가 황제를 죽이고 말겠다는 식으로 나올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아슬아슬하게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의 팽팽한 기류를 갈라놓았다.
응접실 문 앞에 서 있던 하인이 용건을 확인한 뒤 우리를 향해 허리를 푹 숙였다.
“비에고 세르비아 님께서 오셨습니다.”
“빨리도 왔군.”
키네스가 혀를 짧게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가는 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키네스와 눈이 마주쳤다.
키네스가 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조만간 열릴 탄신 연회 때 보도록 하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키네스는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
“폐하!”
마차 앞에서 불안하게 서성이던 비에고가 키네스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뛰어왔다.
그러고는 키네스의 몸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보다시피 멀쩡해. 괜한 걱정이군.”
“갑자기 아인티아 공작저에 계신다는데 어찌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정말 어쩌다 보니였다. 그저 표식을 따라갔을 뿐이었고, 그러다 성녀를 만났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으나 키네스는 이내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침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경계를 할 줄은 몰랐지.’
키네스는 저를 향해 날을 잔뜩 세운 메이아를 떠올렸다.
연신 시선을 피하는 푸른 눈동자. 초조한 듯 제 옷자락을 매만지던 손.
질문은커녕 메이아의 곁에 있는 것도 꺼려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호의를 베풀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함께 있는 동안 메이아는 긴장을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한 가지 있었다.
메이아에게서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경계를 누그러뜨리고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는 게 우선이었다.
‘물론 이제 샤키르의 꽃의 여분이 얼마 없긴 하지만…….’
잠을 자지 않는다고 피곤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신이 피폐해질 뿐.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면 될 일이었다.
‘이를테면 레이나 아드리엔이라든가.’
소문의 잠을 재울 수 있는 여인의 주인공은 메이아가 아닌 그녀였으니까.
키네스가 마차 벽을 집고 마차에 타려던 때였다.
“폐, 폐하!”
비에고가 펄쩍 뛰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키네스는 눈살을 구기며 비에고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느냐.”
“소, 손이……!”
“손?”
키네스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다를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손이었다.
그에 비에고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분명 손이 순간 흐릿하게 보였었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봤나 봅니다.”
흐릿하게 보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