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방해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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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방해꾼
2022.04.08.
“함께 있다 보니 감정이 싹튼 게 아닐까요? 남녀 관계란 원래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거 아닙니까.”
비에고가 약혼 서류를 보며 이런저런 추측을 해 보았다.
하지만 키네스는 생각이 달랐다.
‘아인티아 공작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는 사람이긴 하던가?’
오히려 서로가 필요에 의해 약혼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성녀는 제국이 몰락을 막기 위해. 아인티아 공작은 가문의 위세를 위해.
‘아직 성녀의 마음을 돌릴 기회가 있을지도.’
키네스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져 있자 비에고가 눈치를 보며 화제를 돌렸다.
“아, 아인티아 공작이라고 하니 생각나는 건데, 그거 아십니까?”
별안간 함께 복도를 걷던 키네스가 멈춰 섰다.
“폐하?”
비에고도 덩달아 멈춰 서서 키네스를 돌아보았다.
키네스는 복도를 통해 보이는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황금 새…….”
황금 새가 뭐 어떻다는 거지? 비에고가 머리를 기울이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저 평화로운 푸른 하늘만 펼쳐져 있을 뿐, 황금 새는 없었다.
“으음…… 황금 새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
비에고의 물음에도 키네스는 그저 대답 없이 창문 밖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다 뭔가 떠오른 듯 작게 탄성을 터트리더니 비에고에게 물었다.
“오늘 급한 일정이 있나?”
“아, 대신관님께서 방문하셔서 오늘 일정은 빼두었습니다.”
“잘됐군.”
키네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연 발걸음을 돌렸다. 원래 가던 집무실 쪽과 정반대 방향으로.
갑작스러운 키네스의 행동에 당황한 비에고가 후다닥 뒤를 따라붙었다.
“폐, 폐하 어디 가시는 겁니까!”
“잠시 밖에 다녀오겠다.”
“갑자기 왜 외출을 하시는…… 폐하!”
비에고의 외침에도 키네스는 묵묵히 발을 옮겼다.
하늘 위를 유유히 떠돌던 황금빛 새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하지만 하늘에 남아 있는 옅은 푸른 기운이 길을 안내하듯이 어디론가 길게 뻗어 있었다.
***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라크하는 로브를 쓴 사람에게서 흑마력의 기운을 감지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로브를 쓴 사람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남달랐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소름이 곤두서는 진득하고 불쾌한 감각.
자신의 감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금기의 흑마법이 확실했다.
‘하지만 누가 금기의 흑마법을 사용한 거지?’
금기의 흑마법은 아인티아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마법이기에 다른 사람들은 그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금기의 흑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곤 단둘.
자신과 선대 아인티아 공작뿐이었다.
하지만 선대 아인티아 공작은 금기의 흑마법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메이아를 달래느라 살짝 늦긴 했으나 로브를 쓴 사람을 추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금세 뒤를 따라잡은 라크하는 괴한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었다.
쿵.
“죽고 싶지 않으면 정체를 밝혀라.”
“…….”
라크하의 협박에도 괴한은 어떠한 미동도, 말도 없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라크하는 눈가를 좁히며 괴한의 로브를 뒤로 넘겼다.
벽에 몰린 채 목이 옥죄인 괴한은 넋이 나간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을 본 순간 라크하는 이 자가 어떤 금기의 흑마법에 당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5년 전, 자신이 선대 아인티아 공작에게 썼던 흑마법과 같았으니까.
“……누가 이런 장난을.”
라크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낮게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괴한을 바닥으로 던지듯 떨쳐냈다.
이 상태로는 상대의 정체를 직접 캐물어 확인할 수 없었다.
“그냥 죽여야겠군.”
죽인 다음 정체를 알아보는 게 빠르고 안전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결심도 잠시, 괴한을 내려다보는 라크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낯선 얼굴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에 라크하가 곰곰이 상대의 정체를 떠올리던 때였다.
바닥에 늘어져 있던 괴한이 미동을 보였다.
“으으…….”
괴한이 고통스러운 듯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엎드렸다.
‘역시 그냥 죽이는 게 좋겠어.’
그게 금기의 흑마법에 당한 저 괴한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저 몸은 이미 제 의지를 벗어나 멋대로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라크하가 흑마력을 끌어올린 순간이었다.
촤악.
괴한이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순식간에 꺼내들어 제 목을 베어냈다.
공중에 피가 흩뿌려지며 괴한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하.”
그 모습을 보며 라크하는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과 황제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금기의 흑마법에 당한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데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 자결하도록 세뇌를 시켜두다니.
‘마치…… 보여주기식으로 쓴 것처럼.’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친 순간이었다. 괴한의 손에 쥐여져 있는 검이 눈에 띄었다.
“저 검은…….”
라크하는 눈살을 찡그리며 괴한의 곁으로 다가가 검을 주웠다.
검 손잡이 중앙에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체인에 묶인 검은 까마귀.
아인티아의 기사들에게 주어지는 검에만 새겨져 있는 문장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정체에 라크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서쪽 별관, 꼭대기의 가장 구석진 방에 있는 다락방.
라크하는 과거 그곳에서 봤던 호박색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안녕, 네가 라크하야?
그곳에서 본 소년을 생각하기도 잠시,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라크하의 생각이 뚝 끊겼다.
샤키르의 꽃향기가 났다.
“메이아……?”
라크하는 무심코 메이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메이아의 곁에 있으면 늘 잔잔하게 나던 향이었으니까.
불현듯 불길한 감정이 그를 휘어감았다.
***
잘그락. 로브를 쓴 남자의 손에서 단검이 떨어졌다.
‘저걸로 날 죽이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남자의 입에서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살려……줘.”
그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틀거리더니 연신 살려달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찡그리던 때였다.
테리투스가 내 옷자락을 잡고 당겼다.
“메이아야, 지금이다. 얼른 도망가자꾸나.”
“아…… 네, 네. 알겠어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의 움직임이 멈춘 지금이 도망치기 좋은 기회였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대로 내달렸다.
테리투스도 처음에는 나를 따라 열심히 날갯짓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뒤처지기 시작했다.
‘설마 나를 두고 도망가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안 그래도 테리투스는 곤란한 상황이었을 때 도망친 전과가 있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나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다.”
이 망할 신 같으니라고. 왜 매번 중요할 때만 내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지금 저를 버리고 가시겠다는 거예요?”
“나도 그러고 싶지 않다만, 이제 곧 현신이 풀릴 게다.”
“방금 현신하셨잖아요!”
나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뭔 벌써부터 현신이 풀린다는 말인가.
“어, 어쨌든 가보아야겠구나.”
거짓말은 못하니 둘러대는 것 같은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여전히 불신의 눈으로 테리투스를 노려보던 순간이었다.
쿵!
큰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벽에 몸을 박고 쓰러지는 괴한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꾸물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좀비를 보는 듯한 광경에 나는 기겁했다.
“테리투스 님께서 가고 나서 제가 저 남자한테 죽으면 어떡해요!”
“그럴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걱정 말고 이대로 쭉 달려서 오른쪽으로 가거라.”
“오, 오른쪽이요?”
“그래! 그러면 그곳에…….”
점점 테리투스의 목소리가 옅어지더니 이내 짹짹, 하는 새소리와 함께 뚝 끊겼다.
왜 오른쪽으로 가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 이유 없이 그 말을 한 건 아닐 것이었다.
‘테리투스도 내가 이런 식으로 죽으면 곤란할 테니까.’
하지만 이게 웬걸. 안심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고작 몇 걸음 앞에 갈림길이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쭉 달려서 오른쪽으로 가라고 했었는데…… 여길 말하는 건가? 아니면 더 가서 꺾어야 하나?
망설이던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결정을 내렸다.
‘오른쪽으로 꺾으라고 했으니까 여기겠지!‘
뒤따라 오는 괴한 때문에 오래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그렇게 운이 지지리도 없는 내가 마주한 건 라크하도 광장도 아닌 막다른 길이었다.
꽉 막힌 벽을 보고 있자니 입 밖으로 심한 욕이 튀어나왔다.
그때였다.
타박. 타박. 내가 있는 골목으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급한 대로 벽 한구석에 쌓여 있는 나무 상자들 뒤로 몸을 숨겼다.
‘제발 모른 척 지나가기를!’
하지만 애석하게도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내 발걸음 소리가 멈추더니 턱, 누군가가 나무 상자를 잡아챘다.
화들짝 놀란 내가 소리를 지르려던 때였다.
“성녀?”
선혈처럼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한 술집.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 데미안이 문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 형씨, 계산은 하고 나가야지 않겠소?”
술집 주인이 문을 막아서며 데미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수상쩍기 그지없는 검은 로브. 덩치에 비해 마른 몸. 처음 술집에 들어올 때부터 꺼림직했던 남자였다.
“……비켜.”
작은 목소리였지만 술집 주인의 귀에는 똑똑히 들려왔다.
돈도 내지 않았으면서 하는 말이 ‘비켜’라니, 술집 주인은 헛웃음을 흘렸다.
“돈도 없으면 애초에 들어오지를 말았어야지.”
빈정거리는 술집 주인의 목소리에 데미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형씨가 그렇게 쳐다본다고-.”
호박색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술집 주인의 초점이 흐릿해졌다.
이내 단호한 기세로 막아서던 술집 주인은 홀린 듯이 문 앞을 비켜섰다.
“쓸데없이 방해꾼만 많아.”
무감각한 눈으로 술집 주인을 흘겨본 데미안은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때 밖에서 불어온 바람에 로브가 벗겨지며 목을 덮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다시 로브를 눌러쓴 데미안은 어느 한곳을 바라보며 누군가에게 말이라도 거는 듯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아직 더 걸릴 것 같아요.”
그의 눈이 향한 곳은 북쪽 숲이 있는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