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큐피드2022.03.25.
신전의 지하에는 성물과 함께 두루마리가 보관되어 있었다. 성물을 매개체로 신이 내려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두루마리에 신의 말이 기록되었다니. 키네스가 신경 쓰고 있던 일이 모두 잊힐 정도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신탁인가?”
“신탁이라기엔 애매하여 직접 들고 왔습니다.”
“어디 한번 보지.”
대신관이 제 뒤에 서 있는 신관에게 눈짓을 주자 신관이 긴 두루마리를 키네스에게 건네주었다. 두루마리를 펼친 키네스는 신력을 살짝 끌어올렸다. 그러자 금색으로 새겨진 상형 문자가 제국어로 바뀌었다. 이내 키네스는 대신관이 왜 애매하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성물은 나의 딸에게.] 신탁치고는 직관적이고 짧은 내용에 키네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성물……?”
“예, 그래서 확인해 보니 몇백 년 전 제국의 몰락을 막아줄 거라던 성물이 감쪽같이 없어졌더군요.”
“그 말은 성녀가 제국의 몰락을 막기라도 한다는 건가.”
키네스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늑대의 눈이 푸른 빛으로 발광하는 날. 안정의 능력을 각성한 나의 딸이 제르디아의 안정을 되찾게 해주리라. 신의 가호 아래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신탁이 내려왔을 당시 불안정했던 건 신력으로 인한 키네스의 몸 상태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 신탁은 키네스의 신력과 연관 지어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곧 닥쳐올 몰락의 기운으로 제국이 불안정해진다고 생각한다면 그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그래서 성녀가 신전에서 도망친 건가?’
애초에 제 몸 상태를 안정시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닌 거니까. 제국의 몰락을 막겠다는 사명을 갖고 탈출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최근에 메이아와 부딪히면서 느꼈던 그 청량하고 개운한 감각.
‘그건 분명 신력의 안정이라는 능력과 부합했지.’
심각한 키네스의 표정을 보며 대신관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또 다른 깊은 뜻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성녀님께서 이 모든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럼 내 직접 성녀와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
어차피 메이아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 직접 불러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할 얘기는 이걸로 끝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럼 이만 먼저 가보겠네.”
“테리투스 님의 축복이 깃드시길.”
대신관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키네스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응접실 문을 지키던 기사가 문을 열었다. 열린 문으로 나가던 키네스는 일순 멈춰섰다. 급하게 뛰어온 듯 옷차림새가 흐트러진 비에고가 서 있는 탓이었다.
“폐하……!”
헐떡이던 비에고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아, 아인티아 공작이 약혼 서류를 보내왔습니다!”
“……약혼 서류?”
난데없는 약혼 서류에 키네스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비에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상대가…… 신의 딸 메이아 님이십니다.”
응접실에 있던 모든 이들의 입이 경악으로 쩍 벌어졌다.
*** 이른 아침부터 나갈 준비를 하던 나는 오늘따라 유독 퀭해 보이는 리타를 향해 물었다.
“리타 씨, 괜찮으세요?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아, 아무 일도 없었어요.”
내 물음에 리타는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러더니 멋쩍게 웃으며 서둘러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오늘 외출을 하시려고요?”
“아, 네. 공작님과 약속한 게 있어서요. 아마도 점심 전에는 올 거예요.”
‘공작님’이라는 단어에 리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제 내 의복을 가져다주면서 라크하와 대화를 나누더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혹시…… 어제 아가씨께서 방에 오시진 않았나요?”
“아뇨, 안 왔어요.”
내 대답에 리타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샤 얘기는 왜 하는 거지? 라크하가 따로 아이샤를 불렀던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였다.
“공작님께서-.”
“어머나!”
그와 동시에 리타가 탄성을 터트리며 손뼉을 쳤다. 억지로 꾸며낸 듯한 과장스러운 몸짓이었다.
“그, 그나저나 단둘이서 외출하신다니 데이트네요!”
“데이트……?”
별안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 공작님께서는 보통 혼자 다니시거든요. 그런데 시터님과 동행하신다는 건 데이트가 틀림없어요!”
“…….”
내가 대답이 없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활짝 웃고 있던 리타가 뒤늦게 내 눈치를 살폈다.
“시터님?”
“……절대 아니에요. 절대.”
라크하와 내가 데이트라니. 다시 생각해 봐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냥 따로 사야 할 게 있어서 같이 가는 것뿐이에요.”
나는 리타를 돌아보며 오해가 없게끔 못을 박았다. 내 변명에도 불구하고 리타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정말이에요!”
“네, 믿어요. 믿고 말고요.”
표정은 전혀 아니잖아! 호호호, 작게 웃음을 흘린 리타가 이만 가보겠다며 인사를 한 뒤 쿠키 접시를 챙겨 방에서 나갔다. 한바탕 태풍이 휘몰아치고 간 기분이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마저 외출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계속해서 리타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데이트라…….”
데이트라고는 한 번도 생각을 못 해봤었는데. 리타의 말대로 혼자 나가도 되는 일인데 나를 데려가려는 게 이상하긴 했다.
‘아니야. 그냥 혼자 나가기 적적했던 거겠지.’
무심코 라크하의 생각에 빠져 있던 내가 고개를 세차게 내젓던 그때였다.
“언니!!!”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샤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막무가내로 내 방에 들어온 아이샤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어떻게 오늘 아침에도 안 올 수가 있어!”
아침부터 아이샤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음, 그게 말이야…….”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이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왔지!”
아이샤가 어깨를 쭉 펴며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 그냥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구나.’
허망한 표정으로 아이샤를 지켜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누구지? 의아해하며 돌아본 곳에는 델카인이 서 있었다.
“형수님, 들어가도 될까?”
문이 열려 있는데도 노크를 하다니. 어쩜 쌍둥이인데 서로 정반대일까. 자고로 잘한 일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 법이었다.
“응, 물론이지. 노크도 하고 착하네.”
“노크는 당연한 거지.”
델카인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아이샤가 눈을 새초롬하게 뜨더니 후다닥 문 앞으로 달려갔다. 갑작스러운 아이샤의 행동에 나와 델카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우리 둘을 보며 아이샤가 비장하게 주먹을 위로 치켜들었다. 금방이라도 문을 부술 것 같은 기세였다.
“아, 아이샤?”
아무리 질투가 나도 문은 부수면 안 되는……. 똑, 똑. 가볍고 명료한 노크소리가 방 안에 청량하게 울렸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복도를 지나가던 하녀들도 멈춰 서서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나도 노크했어! 언니!”
“…….”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 광경을 목격한 하녀들이 감격한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럴수록 아이샤의 어깨는 점점 하늘로 치솟았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집요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른 칭찬을 해달라는 듯이. 나 역시 한 박자 늦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와, 와아! 아이샤! 노크도 하고 대단하다!”
“훗, 들어올 때 살짝 열려 있어서 잊었을 뿐이야.”
“앞으로도 계속 방문을 열기 전엔 노크를 하겠지?”
“물론이지!”
아이샤에게는 은근슬쩍 훈육을 하는 방법이 가장 잘 통하는구나. 칭찬을 듣기 위해 무언가를 고치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었다. 활짝 웃은 아이샤가 다시 총총 내 곁으로 뛰어오더니 주머니에서 꾸깃한 종이와 펜을 내게 내밀었다.
“이제 칭찬 도장 줘야지! 어제 준다고 했는데 안 줬잖아.”
“아 맞다, 그랬었지?”
“응! 얼른 줘.”
아이샤의 재촉에 나는 사인을 해주다 말고 눈을 가늘게 떴다. 칭찬 도장 사인이 있는 윗부분마다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뭐라 적혀 있는 거지?'
글씨가 흩날려 적혀 있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물끄러미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자 델카인이 내 옆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나와 달리 아이샤의 글씨를 쉽게 읽어 내려갔다.
“델카인의 사과를 받아 준 날. 오빠를 물리친…….”
델카인의 목소리에 내 사인을 기다리고 있던 아이샤가 화들짝 놀라며 종이를 뺏어갔다.
“보, 보지 마! 내 일급비밀이거든?”
“왜 그런 내용을 왜 적어 놨어?”
“네가 알 바야?!”
아이샤가 얼굴을 확 붉히며 고개를 팩 돌렸다. 방금 델카인이 읽은 내용들은 일전에 내가 칭찬 도장을 줬던 이유들이었다.
'설마 내가 칭찬 도장을 언제 줬는지 적어둔 거야?'
귀여워라. 나는 겨우 웃음을 눌러내고 아이샤에게 팔을 뻗었다.
“이리 와, 아이샤. 뽀뽀도 해줄게.”
“헤헤, 응!”
아이샤는 언제 토라져 있었냐는 듯 헤실 웃으며 내 품에 안겨들었다. 요 귀여운 똥강아지 같으니라고! 미운 짓만 골라서 해도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나는 아이샤의 정수리와 볼에 마구마구 뽀뽀를 해주었다.
“언니, 그만 그만! 간지러워!”
“언제는 뽀뽀 해달라더니.”
활짝 웃으며 아이샤와 장난을 치던 그때였다.
“……둘이서 뭐 하는 거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음산한 목소리에 나와 아이샤의 웃음소리는 자연스럽게 뚝 멈추었다. 라크하가 차가운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전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얼떨떨하게 라크하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델카인이 나와 아이샤를 떨어트려 놓았다.
“아, 뭐야! 왜 끼어드는 건데!”
“형수님, 오늘 형이랑 어디 나가는 거야?”
델카인은 아이샤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곤 내게 물었다.
“어, 응? 그렇지.”
내 대답에 델카인이 아이샤에게 팔짱을 끼더니 라크하를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형, 아이샤는 내가 잡고 있을게. 얼른 형수님 데리고 데이트하고 와.”
*** 라크하가 메이아를 데리고 나간 후. 델카인의 협박에 못 이겨 아이샤는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분노가 가시지 않는지 아이샤가 발을 세게 굴렀다.
“데이트? 데이트라고?”
“아이샤, 참아.”
“너는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어? 아니, 어떻게 나를 붙잡으면서까지 둘을 그렇게 보내줄 수가 있냐고!”
델카인이 이렇게 행동할 줄이야.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 아이샤는 마구잡이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퍽 문을 찼다.
“아! 아파!”
제가 차 놓고 애꿎은 문을 노려보는 아이샤를 지켜보던 델카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
“이러다 오빠가 언니를 독차지해서 우리한테 관심이 줄어들면 어쩔 건데!”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몰라.”
“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델카인의 발언에 아이샤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 사이에 델카인은 책장에서 책을 하나 꺼내왔다.
“내가 어제 밤새 읽은 책이 있거든?”
“아니, 말 돌리지 말고!”
“일단 들어 봐. 이게 사랑과 전쟁이라는 책인데. 여기에 뭐라 적혀 있냐면…….”
델카인이 따로 접어둔 위치를 집어 펼쳤다. 그러고는 아이샤에게 한 구절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여주었다. 아이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책 내용을 따라 읽었다.
“사랑은 상대를 가장 붙잡기 좋은 매개체이다. 특히 결혼은 모두의 축복 아래 상대와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맹세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델카인의 질문에 아이샤가 팔짱을 낀 채 심오한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아이샤가 짧게 탄성을 터트리며 주먹으로 제 손바닥을 내리쳤다.
“언니가 나 사랑하니까, 안 떠나가니 안심하고 있으라는 거구나!”
“아니…… 멍청아, 다시 생각해 봐.”
이게 아니라고? 한쪽 눈썹을 치켜든 아이샤가 다시 관자놀이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르겠는데? 그냥 설명해 줘. 최대한 간략하게.”
“잘 들어.”
델카인은 책을 착 덮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형수님은 우리 시터로 고용됐어. 그러니까 우리가 성인이 되면 나갈 사람이라는 거지.”
“그렇구나……가 아니라 뭐?!”
눈을 휘둥그레 뜬 아이샤를 보며 델카인이 혀를 찼다.
“뭐, 우리가 형수님을 묶어두는 방법도 여러 가지 있어. 칭찬 도장을 10개 모은다든가. 형수님과 내기를 해서 소원권을 따내든가.”
“나 벌써 4개 모았어!”
아이샤가 칭찬 도장 종이가 든 주머니를 흔들며 활짝 웃었다. 델카인이 눈앞에 밀어진 주머니를 슬쩍 밀었다. 그걸로 끝날 일이라면 좋겠지만, 아직 걸리는 점들이 있었다.
“문제는 붙잡아도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눈치를 줄 거라는 거야.”
“그게 왜 문제야.”
입꼬리를 말아 당긴 아이샤가 손으로 제 목을 그었다.
“언니한테 눈치 주는 놈들은 전부 죽이면 되잖아.”
“너…… 진짜 생각 없다.”
어처구니없다는 델카인의 시선에도 아이샤는 왜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때. 가장 빠른 방법인걸.”
“빠른 방법은 맞지만, 그럼 형수님이 좋아할 것 같아?”
아이샤는 평상시 메이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메이아는 저와 델카인이 싸울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하곤 했다. 싸움은 절대 안 된다는 듯이. 아이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뭐든 쟁취하기 위해선 싸우는 거라고 배웠다. 그런 아이샤의 눈에는 메이아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맞다, 언니는 평화주의자이지.”
“그러면 이 책의 내용대로 해야 한다는 거지. 바로, 결혼이야.”
“엑?! 싫어! 그럼 언니를 오빠한테 완전히 뺏기는 거잖아.”
“뺏긴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다르게 생각하면…….”
델카인은 아이샤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영원히 우리 곁에 있게 할 수 있다는 거지.”
“…….”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말에 아이샤의 눈이 잘게 떨렸다. 이를 눈치챈 델카인은 생긋 웃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형수님과 형의 큐피드가 되어주자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