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좋아하는 건 바뀔 수 있어도 사랑은 영원해2022.03.07.
검술 수업 때문에 쌍둥이들을 데리고 연무장으로 가던 때였다. 쌍둥이들과 대화를 하며 복도를 걷는데, 멀리 시롬과 함께 걸어오는 라크하가 보였다. 라크하가 지나갈 때 즈음, 나는 그를 향해 웃으며 인사를 했다.
“공작님, 좋은 아침이에요.”
“…….”
내 인사에도 라크하는 시선 하나 주지 않고 나를 스쳐 지나갔다. 무시를 당할 줄 몰랐던 나는 당황한 나머지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쌍둥이들도 그런 라크하가 이상한지 당황해하며 덩달아 멈춰 섰다.
“델카인, 지금 오빠가 언니 인사를 무시한 거야?”
“그러게……?”
라크하에게 무시당했다는 사실을 쌍둥이들에게 한 번 더 확인 사살을 받는 기분이다. 그때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이샤가 별안간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럼 드디어 내가 언니를 완전히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건가?”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괜한 기대 마."
“잠시 기대해 볼 수도 있는 거잖아!”
코웃음을 치는 델카인을 향해 아이샤가 버럭 외치더니, 더는 대꾸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됐어! 언니 얼른 가자!”
“맞아, 형수님. 얼른 연무장이나 가자.”
“으응, 그래. 수업에 늦겠네.”
내가 얼떨떨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자 델카인이 슬그머니 말했다.
“아마도 형이 못 본 걸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델카인은 나를 달래주려고 한 말인 것 같지만 슬프게도 이미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내 추측은 검술 수업이 끝나고 점심을 먹을 때 즈음, 더욱 확실해졌다. 점심 시간에 맞춰 다이닝룸에 들어서자, 한 하녀가 우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다가왔다.
“공작님께서는 오늘 점심 식사를 함께하지 못하시겠다고 합니다.”
쌍둥이들은 라크하가 바쁘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정말 삐친 거였어?’
설마 했는데 정말일 줄은 몰랐다. 내가 너무 매정하게 말을 했나? 하지만 그 정도로 라크하가 감정이 상한다고? 그게 의문이긴 했다. 나와 라크하는 그야말로 비즈니스적인 관계였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계약 약혼까지 맺을 정도로.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새 나한테 정이라도 든 건가?'
그래서 특별한 사이가 아니니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던 내게 서운했던 거지. 흑막이 고작 나 같은 엑스트라에게 정을 느낀다는 게 의아하긴 하지만……. 아무리 흑막이어도 라크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니 그럴지도 몰랐다. 거의 매일매일 보다시피 지내곤 했으니까. 심지어 잠을 같이 자기도 하고.
‘싫은 사람끼리도 매일 보다 보면 미운 정이 든다잖아?’
심지어 라크하는 내 능력 때문에라도 나를 싫어할 수 없을 텐데 오죽하겠는가.
“으음…….”
스프를 떠먹던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속이 답답한 나머지 입에 넣는 음식들이 모두 텁텁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잠시 마주쳤을 때 봤던 얼굴이 안 좋았었는데.’
나는 지나가던 길에 봤던 라크하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눈 밑이 퀭하고, 꽤 충혈되어 있었지. 안색도 창백했고. 괜히 신경이 쓰였다.
‘어제 잠을 못 잤으니까 오늘 밤에는 오겠지?’
오면 어제 너무 매정하게 말했다고 짧게나마 사과라도 해야겠다. 앞으로 몇 달간 같이 지내야 하는데, 어색하게 지내봤자 좋을 건 없을 테니까. 라크하를 생각하느라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하고 있자니, 델카인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수님?"
"아…… 응?"
"무슨 일이라도 있어?"
"뭐? 언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아이샤가 스프를 떠먹다가 고개를 번쩍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오늘은 메인 요리는 토마호크 스테이크입니다.”
“토마호크 스테이크?”
하녀가 메인으로 스테이크를 들고 나오자 금세 고기로 관심이 돌아갔다. 아이샤가 눈을 반짝이며 고기를 썰고 있는 사이에 델카인은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형이랑 싸우기라도 한 거야?"
"싸운 건 아닌데 나한테 화가 난 것……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애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답답한 나머지 델카인한테 하소연을 할 뻔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포크를 들어 올렸다.
“배고프다, 얼른 먹자.”
하지만 식사가 잘 넘어갈 리는 없었다. *** 라크하는 전날 밤에 있었던 일에 사로잡혀 메이아를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뒤돌았지만, 이미 그녀는 쌍둥이들과 자리를 뜬 뒤였다. 집무실로 돌아온 라크하는 제 이마를 붙잡으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더욱 신경이 예민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대로 방에서 나가지 않았더라면 메이아의 손에 있던 반지를 부숴버렸을지도 몰랐다.
‘이건 모두 테리라는 놈 때문이다.’
그놈만 아니었어도 저를 떠날 여지도, 오늘 메이아를 무시하고 지나칠 일도 없었을 텐데. 모든 원인을 테리로 넘긴 라크하는 살벌한 기세로 고개를 들어 시롬을 불렀다.
"시롬."
"예?"
테리라는 남자에 대해 조사해 보라고 명을 내리려던 라크하는 입을 다물었다. 별안간 신경 쓰지 말라던 메이아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윙윙 맴돌았다.
‘왜 하필 지금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라선.’
메이아가 무어라하든 그냥 ‘테리’라는 남자를 찾아서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그게 라크하가 늘상 무언가를 쟁취해 왔던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턱 막히며 누군가가 제 이성을 쥐어 잡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작님?”
시롬의 부름에 라크하는 가까스로 불쾌한 감정을 떨쳐냈다. 매번 해 왔던 방법대로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었다.
"테리라는 남자에 대해 조사해 봐."
"언제까지 알아오면 될까요?"
"지금 당장."
"네……."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일의 강도에 시롬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문밖을 나서던 시롬은 집무실 앞에 서 있는 델카인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도련님?"
"안녕, 시롬."
델카인이 포동포동한 손을 흔들며 시롬에게 인사를 건넸다.
"도련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형을 보러 왔어.”
“공작님을요?”
웬만하면 델카인이 낮부터 집무실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기에 시롬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응, 형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들어오라 해.”
델카인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집무실 안쪽에서 라크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크하의 허락에 델카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무실에 들어갔다. 그러자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던 라크하가 고개를 들어 델카인이 다쳤던 팔을 흘끔 바라봤다.
"이제 붕대를 푼 걸 보아하니 조금 괜찮아졌나 보군."
"응, 그 정도 상처쯤이야 금방 낫지."
델카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집무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좌식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다과를 하나 입에 넣어 오독오독 씹어먹으며 물었다.
“그런데 형. 형수님이랑 싸웠어?”
만약 어떤 문제도 없는 거라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대답이 튀어나올 것이었다. 하지만 라크하는 대답을 하기보다는 델카인에게 되물었다.
"……사제가 나와 싸웠다고 했나?"
"아니, 형이 형수님을 무시하길래."
"무시하려고 한 건 아니야. 생각할 게 많았을 뿐이지."
라크하의 대답에 델카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사람의 대답 모두 시원치 않은 걸 보아하니, 역시 두 사람의 사이가 서먹해진 게 틀림없었다. 델카인은 끙 소리를 내며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좋지?'
라크하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고 챙겨주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에 금세 메이아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벌써부터 위기가 찾아올 줄이야.
'아직 형수님은 형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던데.'
두 사람의 관계가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라크하가 적극적으로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지금 사이를 보자니 라크하가 스스로 나설 것 같지는 않았다. 델카인이 결연한 눈빛으로 라크하를 올려다보더니 불쑥 질문했다.
"형은 형수님과 계속 함께하고 싶어?"
"물론이지."
라크하에게는 대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도 메이아를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시롬에게 일을 시켰으니까. 단번에 나온 라크하의 대답에 델카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다행히 형은 여전히 형수님을 사랑하구나!’
그렇다면 이제 신경 써야 할 건 딱 하나였다.
"형 그럼 이럴 때가 아니야. 얼른 형수님이 형을 사랑하게 만들어야지!"
"사랑……?"
폭탄과도 같은 델카인의 선포에 라크하가 홀로 중얼거렸다.
“응! 좋아하는 건 바뀔 수 있어도 사랑은 영원하다잖아. 형을 사랑하게 되면 영원히 함께 있을 거야!”
해맑게 외친 델카인이 멍한 라크하를 보며 좀 더 이해가 될 만할 말을 생각한 뒤 덧붙였다.
“음…… 그래 마치 형이 형수님을 사랑해서 계속 같이 있고 싶은 것처럼!”
테리라는 남자를 죽이면 끝이라고 생각했던 라크하에게 새로운 방법이 제시됐다.
‘……사랑하게 되면 영원히 함께 있을 거라고?’
그 뒤에 델카인이 했던 말은 라크하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 눈을 간지럽히는 햇살에 천천히 정신이 돌아오자,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리타 씨?"
리타라고 생각하고 잠긴 목소리로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살짝 눈을 뜬 나는 인기척이 느껴졌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리타가 아닌 당황한 얼굴로 의자를 붙잡고 있는 라크하가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공작님?"
사과를 하려고 어젯밤 내내 기다려도 오지 않기에 포기하고 잠들었는데, 새벽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나 때문에 깼나?"
"아니에요."
일어날 때가 되어서 깼을 뿐이었다. 물론 평소보다 조금은 이르긴 하지만.
'그나저나 기분이 좀 풀린 건가?'
오늘은 어제처럼 나를 무시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기분도 한결 괜찮아 보였고. 이럴 때 사과를 하면 단번에 받아줄지도 몰랐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심스레 사과의 말을 꺼냈다.
"저…… 그날 제가 너무 말을 매정하게 했죠? 미안해요."
내 사과에 라크하의 표정이 굳었다. 내 사과가 너무 성의 없었나? 이어질 라크하의 말을 불안하게 기다리는데,
“그건 그대가 사과할-.”
벌컥! 노크도 없이 열린 문이 라크하의 말꼬리를 잘랐다.
“시터님!”
얼마나 열심히 달려온 건지 리타가 숨을 헐떡이며 나를 불렀다. 나와 라크하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리타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아, 앗! 죄, 죄송합니다. 제가 나중에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됐어. 둘이서 대화를 하도록 해. 나는 먼저 가보도록 하지.”
결국 무슨 연유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틈도 없이 라크하가 내 방을 나갔다. 라크하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리타가 제 가슴을 쓸어내린 뒤 초조한 얼굴로 내게 물어왔다.
"시터님,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지금 당장이요?"
"네! 제발 도와주세요!"
“아, 네! 알겠어요. 잠시만요.”
급박하다 못해 절박하게 느껴지는 리타의 외침에 나는 빠르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하면서 나는 아직까지도 안절부절못하는 리타를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인 거예요?"
“그, 그게 아가씨께서……!”
우리 똥강아지, 아이샤가 엄청난 일을 벌이고 있나 보구나. 나는 방에서 여유롭게 상황을 물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가면서 얘기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