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설마 삐친 거야?2022.03.04.
나는 내 방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과 반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운 탓에 라크하에게 받은 선물을 돌려주려고 했으나 끝내 거절당했다.
-그대가 받지 않는다면, 쓸모없는 것이니 없애버리겠다.
다이아 반지를 없애버린다니! 순간 거짓말인 줄 알았다. 내 상식상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라크하 아인티아, 그는 상식을 벗어난 사람이라는 걸. 살면서 한 번도 받기 힘들 다이아 반지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꼴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라크하를 어르고 달래 다시 내게 돌아온 반지였다.
‘때깔 고운 다이아가 사라지는 걸 내가 미쳤다고 가만히 지켜 봐?’
이왕 이렇게 받은 거 별수 있나.
“나중에 돌려달라고 할 수도 있으니 보관이나 잘 하고 있어야지.”
대충 라크하가 준 반지를 어떻게 쓸지 고민을 끝낸 나는 늘어져라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로 몸을 누였다. 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오늘은 오려나?”
라크하를 마주할 생각을 하자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차라리 먼저 잠을 자는 게 마음이 편할지도 몰랐다. 그래, 그냥 자자. 결정을 내리자마자 나는 이불을 덮고 돌아누웠다. *** 라크하는 벽에 머리를 기댄 채 긴 한숨을 뱉어냈다. 불법 경매를 단속한다는 명목하에 과거 몇 년간의 기록들을 받아왔다. 하지만 메이아가 끼고 있던 반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그럼 정말 신전을 탈출한 날 가지고 나온 거라고?’
메이아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린 라크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말이 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지니고 있었다면 제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다시 반지를 확인해 보든가 해야겠어.’
자신의 반지마저 거절하고 손에 끼워져 있던 그 반지가 이토록 거슬릴 수가 없었다. 라크하는 편한 옷차림으로 환복한 뒤 메이아의 방으로 향했다. 이미 늦은 시각이어서 그런지 메이아는 깊게 잠들어 있었다. 메이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에 발을 들인 라크하는 일순 멈춰 섰다. 창가 쪽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겁도 없군.”
감히 메이아의 방에 침입하려고 하다니. 창문을 열어 손을 뻗자 크기에 비해 꽤 묵직한 무언가가 잡혔다.
‘뭐지?’
라크하는 제 손에 잡힌 것을 확인했다. 황금색의 깃털을 지닌 통통한 새였다. 주변에서 쉽게 보지 못했던 새를 발견한 라크하의 머릿속에 일순간 엄청난 착각이 스쳐갔다. 어쩌면 새를 이용해 편지나 반지를 주고받았을 수도 있었다. 그래, 자신의 손아귀에 잡힌 이 새를 이용해서.
“……전서조인가?”
“…….”
반면, 황금빛 새의 정체는 테리투스였다. 테리투스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지만 우선 잠자코 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몸을 경직시켰다. 라크하가 현신한 몸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 일이었고, 자신을 잡은 라크하의 손에 점차 힘이 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별안간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테리투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라크하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놈이 그 전서조라면 그냥 놓아줄 순 없겠군."
추적 마법을 걸 생각으로 라크하가 새의 몸에 흑마력을 불어넣는 순간이었다.
"!"
화들짝 놀란 테리투스가 반사적으로 흑마력을 튕겨냈다. 파지직! 성질이 다른 두 힘이 부딪히며 스파크를 일으켰다.
“윽.”
손이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에 라크하가 신음을 흘리며 테리투스를 놓았다. 그 틈을 타 테리투스는 재빨리 창문을 향해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하지만 라크하가 더 빨랐다. 쿵. 창문이 라크하의 손에 순식간에 닫혔다. 독 안에 든 생쥐 꼴이 된 테리투스를 보며 라크하가 눈을 번뜩였다.
“……찾았다.”
메이아에게 반지를 가져다준 새가 확실했다. 찰나의 순간에 맞부딪혔던 저 힘은 분명 메이아의 반지에서 느꼈던 힘과 같았으니까.
‘새의 몸에 결계라도 쳐둔 건가?’
흥미로운 광경에 라크하가 입술 끝을 올렸다. 몇 겹의 결계가 있든지 간에 모두 부순 뒤 추적 마법을 걸면 될 일이었다. 그런 다음 찾아가 그놈을 쥐도 새도 없이 처리하면 메이아는 비로소 제 곁에만 있을 수 있을 것이었다.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다.”
라크하가 도망갈 곳 없이 창문 앞에서 파닥거리는 테리투스를 향해 경고를 하던 때였다.
“우움…… 테리…….”
“테리……?”
메이아 잠꼬대로 중얼거린 낯선 이름에 라크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반지를 준 놈의 이름이 테리인가?'
꿈에서 찾을 정도라니.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이성을 잡아먹었다. 전서조에 결계를 씌워줄 정도라면, 무척이나 아낀다는 건데…….
“아끼는 전서조가 돌아오자마자 목이 꺾인 채로 죽으면 어떠려나.”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라크하의 목소리에 테리투스가 흠칫했다. 라크하의 눈동자가 묘하게 반쯤 맛이 가 있었다. 제 선에서 해결하고 도망치려고 했던 테리투스는 생각을 바꿨다. 지금의 라크하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메이아뿐이었다. ***
‘으으, 추워.’
난데없이 몸을 휘감는 한기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양팔을 매만지며 눈을 스르르 뜬 나는 금세 한기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날이 잔뜩 선 검은 기운이 금방이라도 황금빛 새를 삼킬 듯이 일렁이고 있었다. 황금빛 새가 왜 있지? 그 생각도 잠시, 나는 황금빛 새의 정체를 눈치챘다. 내 방을 찾아올 만한 동물이라곤 테리투스밖에 없었으니까.
“공작님!”
방금 일어난 탓에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다행히 내 부름에 라크하의 검은 기운은 우뚝 멈췄다. 나는 허겁지겁 침대에서 내려와 라크하와 테리투스 사이를 막아섰다.
“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저택에 함부로 침입했으니, 그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겠나."
침입했다고? 나는 창문가에 앉아 있는 테리투스를 흘겨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테리투스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성물이라도 없었으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고 대충 입을 맞췄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제스처를 알아듣는 게 최선이었다.
"창문이 닫혀 있었을 텐데 저 새가 어떻게 침입했다는 거죠?"
"수상하게 창문 앞에서 알짱거리더군."
하필 걸려도 라크하한테 걸려서는.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걸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라크하가 내게 물었다.
“혹시 저 새를 알고 있나?”
숨기려고 했던 비밀이라도 들킨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동요한 티를 최대한 숨기며 대답했다.
“……아뇨, 몰라요.”
하지만 내 대답이 살짝 늦은 탓일까. 나를 바라보는 라크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내가 알아서 처리를 해도 되겠나?”
알아서 처리한다는 말에 일순간 테리투스를 공격하려던 라크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그런다고 테리투스가 죽는 건 아닐 테지만, 테리투스에게 몸을 빌려준 새가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무의미한 살생을 방관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라크하의 행동을 말렸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잖아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확신하지?”
"그건……."
나는 대답을 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마땅히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둘러대더라도 라크하의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질 때 대처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자니 그럴 자신이 없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일단 죄 없는 새를 살리는 게 우선이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뒤돌아 창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테리투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후다닥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내 돌발 행동에 라크하의 표정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나는 라크하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아,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
“정말이에요.”
내가 몇 번을 강조해서 말해도 라크하의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어라하지는 않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매섭고 따가웠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점차 발끝으로 떨어졌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에 라크하의 입이 열렸다.
“저 새가 반지를 가져다준 걸 알고 있다.”
“그건 어떻게…….”
“그대의 반지에서 느껴지는 기운과 같으니까.”
흑마법으로 알아낸 건가? 테리투스의 정체를 눈치챈 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내 반지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을 줄이야. 궁금해할 거라고는 생각했으나, 이 정도로 집착을 보일 줄은 몰랐다.
“왜 이렇게까지 제 반지에 신경 쓰시는 거예요?”
내 물음에 라크하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대가 어떤 수상한 자와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수상한 사람과 내통하고 있다니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제 사정도 아시잖아요."
"수상한 사람이 보낸 게 아니라면 왜 숨기려고 한 거지? 그럼 숨겨진 연인이 보낸 새라도 되는 건가?"
뭐? 숨겨진 연인? 어처구니없는 말에 머리가 띵했다. 새를 통해 반지를 받았다는 걸 저런 식으로 오해한다고? 내가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사랑에 빠질 정도로 아무 생각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건가? 울컥한 나는 라크하를 향해 버럭 외쳤다.
“그럴 리가요!”
“그럼 누가 그대에게 반지를 준 거지?”
여전히 내 반지에 대해 집착하는 라크하의 모습에 문득 오기가 들었다.
‘내가 굳이 라크하에게 변명까지 하며 반지를 누가 줬는지 말해야 할까?’
어떻게 보면 반지는 내 개인 물품이었다. 일전에 어떤 일을 해 보아도 고용주가 개인 물품의 출처를 이토록 파고드는 경우는 없었다. 물론 오늘로써 라크하와 약혼 관계가 되긴 했지만…….
‘그것도 엄연히 계약 약혼이잖아!’
이러다 반지에 대한 집착이 커져서 나에 대한 집착으로 번지게 된다면 곤란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라크하와 확실히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입을 뗐다.
“……제가 누구한테 반지를 받든 공작님께서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나요? 저희가 특별한 사이도 아니고, 그냥 계약 관계일 뿐이잖아요.”
라크하도 우리가 계약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이제라도 납득하겠지? 하지만 오히려 라크하는 배신감으로 들어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크게 상처라도 될 말을 한 것처럼.
“…….”
이윽고 라크하는 대답도,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려 성큼성큼 내 방을 빠져나갔다.
“고, 공작님!”
당황한 내가 뒤늦게 라크하를 불러보았지만, 그는 이미 떠나간 후였다. 얼결에 혼자 방안에 남은 나는 얼떨떨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설마…… 삐친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