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그대가 없어선 안 될 몸이 되었거든2022.02.21.
에스테르 레스토랑에 마련된 프라이빗 룸.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키네스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 안 오는 건가.”
키네스는 며칠 전, 비에고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아드리엔 남작 영애가 ‘잠을 재울 수 있는 여인’이라고?
-예, 몇 번을 물어도 계속 그리 대답하지 뭡니까.
-……그럴 리가 없다. 성녀가 아니라면 공작이 아무 이유 없이 여자를 끼고 다닐 리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혹시 말 못 할 이유가 있나 싶어 ‘잠을 재울 수 있는 여인’에게 쪽지를 전달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럼, 알 수 있겠지요.
“그 여인이 아드리엔 남작 영애일지. 성녀일지.”
키네스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비에고가 넘긴 쪽지에는 잠시 얘기만 나누고 싶다는 내용과 함께, 신의 맹세가 담겨 있었다. 정말 대화만 하고 물러나겠다는 신의 맹세가. 그렇기에 두 사람 중 누구든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에스테르 레스토랑에서 기다린 지 어느새 1시간이 흘렀다.
‘내용이 전달되지 않은 건가……?’
키네스는 초조하게 제 앞에 있는 찻잔을 매만졌다.
“폐하, 회의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뒤쪽에 앉아 있던 비에고가 파티션을 가볍게 두드렸다. 결국 키네스는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다. 이만 일어나도록 하지.”
“네, 그럼 저는 뒷정리를 하고 따라가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돌아가던 참에 메이아와 마주친 것이었다.
“폐하, 거기 서서 뭐하고 계신 겁니까?”
뒤늦게 따라 나온 비에고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키네스에게 물었다. 키네스는 여전히 얼이 빠진 얼굴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만났어.”
“네?”
“……쪽지를 보고 찾아왔었다고.”
키네스는 불과 몇 분 전, 메이아와 부딪히고 몸에 청량한 기운이 퍼졌던 순간을 떠올렸다. 보닛이 벗겨지며, 햇빛 아래 모래알처럼 반짝이던 백금발. 그리고 푸른 사파이어처럼 맑게 빛나던 눈동자. 하지만 그의 심기에 거슬리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네가 본 게 맞았어. 아인티아 공작과 함께 있더군.”
“그럼 그날 제가 봤던 푸른 눈의 여인이 성녀님이 맞다는 의미군요.”
“그래, 확실해.”
로브를 쓰고 있어서 남자의 신분을 확인하기 어려웠으나, 곁에 있는 두 아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키네스는 천천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대체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난 건지, 무슨 관계인 건지 돌아가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일단, 황궁으로 간다.”
“네, 알겠습니다.”
키네스와 비에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들의 곁으로 한 여인이 지나갔다. 살랑, 장미꽃처럼 붉은 머리가 바람결에 흩날렸다.
“……?”
키네스는 무의식적으로 멈춰 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붉은 머리의 여인은 에스테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 식사시간 내내 라크하는 저기압이었다. 아마 쌍둥이들이 없었더라면 한 입 먹자마자 체했을지도 몰랐다.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끝내고 쌍둥이들과 수다를 떨며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쌍둥이들이 자리를 잡은 곳은 노름 상인 앞이었다.
“자, 이제 섞을 테니 잘 보렴.”
눈앞에 있는 컵이 움직일 때마다 아이샤와 델카인의 눈이 바쁘게 굴러갔다. 한 편의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는 컵이 멈추는 순간. 아이샤가 벌떡 일어나 가장 왼쪽에 있는 컵을 가리켰다.
“여기!”
“아니, 난 여기 같은데.”
“아냐! 내 말이 맞아. 여기라고!”
“미안하지만, 둘 다 틀렸단다.”
노름 상인이 씩 웃으며 가장 오른쪽에 있는 컵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또르르 구슬이 굴러 나왔다.
“아으! 다시! 다시!”
“조용히 좀 해 봐. 집중을 못 하겠잖아.”
이거, 누가 봐도 야바위잖아. 속임수인 줄도 모르고 어떻게든 맞추려고 하는 쌍둥이들을 보고 있자니 걱정이 앞섰다.
“그만하라고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알아서 눈치챌 때까지 내버려 둬. 일종의 인생 공부가 될 거다.”
살면서 야바위로 인생 공부가 될 거라는 말을 들어볼 줄이야.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말릴 줄 알았던 라크하는 의외로 무신경했다.
“……알겠어요.”
그래, 보호자가 내버려 두라는데 내가 참견할 수는 없지. 나는 쌍둥이들이 다시 노름 상인에게 속는 걸 잠자코 지켜봤다. 그렇게 몇 번을 졌을까.
“아아! 다시! 맞출 때까지 할 거야!”
아이샤가 제 머리를 잡아 뜯으며 눈에 핏발을 세웠다.
“이제는 말려야 할 것 같지 않나요?”
“…….”
심히 걱정되는 모습에 라크하에게 다시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라크하를 쳐다보았다.
‘뭐야, 관심도 없잖아.’
이젠 쌍둥이들을 지켜보고 있지도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경계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공작님?”
“아…… 뭐라고 했었지?”
내 부름에 한 박자 늦게 반응하는 라크하를 보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태껏 기분 탓이려니 하고 넘기고 있었는데 이번에야말로 확실했다.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으신 거죠?”
“아니, 없어.”
“거짓말하지 마요.”
눈치가 없는 사람도 지금의 라크하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챌 정도였다. 하지만 라크하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아, 이제 애들을 말려야 할 것 같군.”
“인생 공부를 시키는 거라면서요.”
어딜 은근슬쩍 넘기려고 해. 나는 슬그머니 아이들에게 가려는 라크하의 앞을 막아섰다. 한 번 더 재촉하려던 그때, 라크하가 입을 열었다.
“처리해야 할 업무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상습적인 거짓말은 좋지 않다고 말한 사람은 공작님이세요.”
업무 생각은 무슨, 그렇게 둘러댄다고 속아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기론 라크하는 내가 식당 앞에 있는 남자와 부딪힌 이후로 바짝 예민해져 있었다.
“저랑 식당 앞에서 부딪혔던 남자 때문이에요?”
내 질문에 라크하가 몸을 움찔하더니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매번 헛짚더니, 이럴 땐 예리하군.”
“그러니 그냥 넘어갈 생각하지 말아요. 그 사람과 아는 사이예요?”
라크하에게 아는 사이냐고 묻고 나자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로브를 쓰고 있어서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었는데.’
나보다 더 멀리 있던 라크하는 누군지 파악하기 더 힘들었을 것이었다. 곧바로 모른다고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라크하는 그저 나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 뒤,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대가 신전으로부터 숨겨달라고 했었지.”
별안간 그의 입에서 나온 ‘신전’이라는 단어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설마 신전과 관련된 사람이었나?’
새하얀 로브를 입고 있었느니 그럴지도 몰랐다. 게다가 내 이름을 아는 것처럼 되짚기도 했었으니까.
“그러려면, 오늘 낮에 만났던 그놈을 가장 조심해야 해.”
“……대체 누구길래요?”
“황제.”
온몸에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정신이 혼미했다. 일반 사제였어도 불안했을 텐데…….
‘내가 부딪혔던 사람이 황제, 키네스였다고?’
크나큰 충격에 눈앞이 핑글핑글 돌다 못해 어지러웠다. 레이나에 이어 키네스까지 만났다니. 말도 안 되는 우연에 기가 막혔다.
“공작님께서…… 착각하신 게 아닐까요?”
내가 이런 길 한복판에서 황제인 키네스를 만날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그러나 라크하는 의심 하나 없는 얼굴로 확언했다.
“확실해.”
“어, 얼굴을 보셨어요?”
“아니.”
얼굴을 보지도 않고 확신하는 모습에 나는 반신반의하며 또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확신하시는 거예요?”
“꼭 얼굴을 봐야 상대를 알 수 있나?”
“그렇지…… 않나요?”
라크하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상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는 건가? 눈가를 좁히며 생각에 잠겨 있자니 그가 설핏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톡 건드렸다.
“앗.”
“그렇다기엔 이렇게 손끝만 닿아도 내가 사제, 그대라는 걸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건 제가 특수한 경우니까 그렇죠.”
이마를 매만지며 퉁명스레 중얼거리자 라크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만약 닿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빠르게 뛴다면?”
“제 능력이 미미하게 영향을 주나 봐요.”
“아니, 달라.”
단호한 어조로 말한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우아하고 뼈대가 굵은 손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혀들었다. 생경한 느낌에 뱃속이 간질거렸다.
“닿으면 그저 마음이 편안한 것, 고작 이것뿐이야. 그런데…….”
별안간 의문을 품은 시선이 내 손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유독 더 그렇군. 원래 이 정도 접촉은 견딜 만한 정도였는데.”
라크하가 의아한 듯 손을 더욱 깊게 맞잡았다.
‘성물 때문인 건가?’
나는 무심코 성물을 끼고 있는 왼손 약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라크하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처음 보는 반지군. 분명 어제까지는 없었던 것 같은데.”
헉, 아직 반지의 정체에 대해 뭐라 둘러댈지 생각을 안 해봤는데. 나는 라크하가 반지의 정체를 알아차리기 전에 잡혀 있던 손을 빼내고 황급히 그의 관심을 돌렸다.
“겨, 결국 황제 폐하도 느끼실 수 있다는 거죠?”
“…….”
별안간 라크하의 고운 미간이 일그러졌다. 내가 갑자기 화제를 돌려서 그런가? 나는 슬쩍 라크하의 눈치를 보았다. 이러다 입을 다물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그는 대답을 착실히 해주었다.
“……그놈과는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역겨운 기분이 들어. 신력과 흑마법은 상성이니까.”
“그럼…….”
“그래, 그놈도 그대가 내 곁에 있다는 걸 눈치챘을 테지.”
내가 ‘메이아’가 맞는지 확인하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이미 들킨 것과 다름없었다.
‘이대로라면…… 신전으로 끌려가고 말 거야.’
나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이제 원작은 다시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비참한 엔딩이겠지. 나뿐만 아니라 쌍둥이들도 그리고 어쩌면…… 라크하도,
‘싫어. 아니, 그렇게 될 순 없어.’
처음엔 혼자서 무작정 생각할 시간도 없이 도망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혼자가 아니잖아.’
내게는 라크하가 있었다. 유일하게 소설 <샤키르의 꽃>에서 황제 키네스에게 대적할 수 있는 자. 여태껏 흑막인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한배를 탄 이상 더 이상 라크하는 나에게만큼은 흑막이 아니야.’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라크하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그러고는 라크하와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 신전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숨겨주겠다고 했던 거 기억하시죠?”
“물론이지. 그대를 절대로 그 인간에게 보낼 일은 없을 거야.”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차분하고 고요했다. 그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불안하게 뛰던 내 가슴도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크하가 흔들림 없이 확신에 찬 어조로 덧붙였다.
“그리고 전에도 내가 말했을 텐데. 내게서 얻어가고 싶은 게 있다면 얼마든지 얻어가라고.”
라크하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내 손등 위로 그의 손이 겹쳐졌다.
“우린 서로가 필요한 사이니까.”
“필요한 사이…….”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절실하게 와닿았다. 악마처럼 유혹적으로 눈매를 접어 웃은 라크하가 잔잔히 들끓는 눈으로 나를 주시했다.
“그래, 그러니 마음 놓고 있어. 혹여 그대가 간다고 해도 보내주지 않을 생각이니까.”
내 손등 위로 겹쳐진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수갑이라도 채워진 것처럼. 단단하고 억세게.
“이미 나는 그대가 없어선 안 될 몸이 되었거든.”
그게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파악할 시간은 없었다. 쿠당탕! 뒤에서 난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큰 굉음으로 인해.
“이 사기꾼아!!!”
야바위라는 걸 깨달은 아이샤의 분노의 외침이었다. 이윽고, 델카인의 살벌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아이샤, 저 인간 죽여.”
뭐? 죽인다고? 화들짝 놀란 나는 라크하를 뒤로하고, 아이샤와 델카인에게 뛰어갔다.
“안 돼! 아이샤, 델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