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남편? (32/136)

32. 남편?2022.02.18.

소매치기범에게 털려 텅 빈 가방처럼 내 가슴도 설렁했다.

16548703452631.jpg‘레이나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소설 속에서 나는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없다고! 원작이 시작되지 않은 시간대라는 단점이 여기서 나타날 줄이야. 제발 동명이인이었으면 좋겠지만,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똑같았다. 소설 속에서도 레이나는 화가 날 때 나오는 시원한 입담이 터져 나오곤 했으니까. 멍하니 레이나를 지켜보는데, 쌍둥이들이 앉아 있던 분수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16548703452636.jpg“델카인, 어떻게 하면 주먹 한 방으로 기절시킬 수 있는지 저 여자한테 가서 물어보러 갈래?”

16548703452691.jpg“좋아, 같이 가보자.”

레이나를 만나러 가본다고? 경악한 나는 쌍둥이들의 앞을 막아섰다.

16548703452631.jpg“얘, 얘들아! 잠깐만.”

쌍둥이들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으나 어쩔 수 없었다. 원작에서는 쌍둥이들이 레이나와 꼬이면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으니까. 웬만하면 쌍둥이들은 레이나와 마주치지 않는 게 좋았다. 나는 아이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16548703452631.jpg“우리 차라리 다른 곳을 가보는 게 어때?”

16548703452636.jpg“왜? 재밌는데. 저 여자 힘이 되게 센가 봐. 주먹만으로 기절시켰대.”

16548703452691.jpg“형수님은 저 소매치기범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아?”

이런 반응은 생각 못 했다. 나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16548703452631.jpg“다른 곳에 더 재밌는 게 있을-.”

16548703452636.jpg“저기 봐! 힘이 짱 센 여자가 알아서 여기로 오고 있어!”

뭐? 아이샤의 외침에 깜짝 놀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레이나가 우리가 있는 쪽으로 오고 있었다.

16548703452631.jpg“얘, 얘들아!”

나는 쌍둥이들을 부르며 빠르게 눈을 굴렸다. 멀리서 인형극을 준비하는 무리를 목격한 순간, 나는 그쪽을 보고서 다급하게 말했다.

16548703452631.jpg“이, 인형극이 더 재밌을 거야. 얼른 보러 가자!”

16548703452636.jpg“잠깐, 언니!”

16548703452631.jpg“당장 가야지! 인형극은 시작 전부터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고.”

양손에 쌍둥이들을 잡고 자리를 뜨려고 했으나, 레이나가 더 빨랐다.

16548703467664.jpg“저기요.”

등 뒤에서 종달새처럼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속으로 욕을 읊조린 나는 못 들은 척 앞으로 걸어갔다.

16548703452691.jpg“형수님, 저 여자가 부르는 것 같은데…….”

16548703452631.jpg“그럴 리가. 착각이야.”

델카인이 슬쩍 내 눈치를 보며 말했으나 나는 그 말을 단박에 부정했다. 쌍둥이들을 위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16548703452631.jpg‘이렇게 끝까지 모른 척하면 그냥 포기하겠지.’

하지만 레이나는 생각보다 끈질겼다. 순식간에 달려온 레이나가 내 앞을 막아섰다.

16548703467664.jpg“후아, 하마터면 쌍둥이 어머님을 놓칠…… 어머, 아닌가?”

16548703452631.jpg“쌍둥이…… 어머님?”

이번에도 레이나를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나는 석고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둔탁한 망치에 맞은 것 같은 느낌에 정신이 혼미했다.

16548703467664.jpg“으음, 두 아이가 닮긴 했는데-.”

레이나가 쌍둥이들과 나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16548703467664.jpg“어머님은 아니신가…….”

16548703452631.jpg“어, 어머님…….”

내가 살다 살다 어머님이라는 소리를 들을 줄이야. 어처구니가 없어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쌍둥이들이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16548703452636.jpg“뭐? 내가 델카인이랑 닮았다고?”

16548703452691.jpg“아…… 기분 나빠.”

16548703452636.jpg“야, 내가 더 기분 나쁘거든?!”

아이샤와 델카인은 서로가 닮았다는 말에 치를 떨었다. 이러다 쌍둥이들이 기분이 나쁘다며 레이나에게 악감정을 품을지도 몰랐다.

16548703452631.jpg‘그것만은 절대 안 돼.’

나는 더 늦기 전에 어색하게 웃으며 레이나와 반대 방향으로 뒷걸음질 쳤다.

16548703452631.jpg“……저,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16548703467664.jpg“잠시만요!”

레이나가 나를 잡으려는 듯 손을 뻗던 그때였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내 앞을 빠르게 막아서더니 레이나의 손을 쳐냈다. 짝! 날카로운 타격음과 함께 레이나의 손에서 떨어진 돈주머니가 바닥을 굴렀다.

16548703483284.jpg“어딜 손대려고 해.”

이윽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와 쌍둥이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16548703452631.jpg‘라크하가 왜 여기 있어?’

내가 들었던 게 환청이 아니고, 아이샤가 라크하 냄새가 난다고 했던 것도 진짜였던 거야? 레이나가 붉어진 제 손등을 매만지며 인상을 찡그렸다.

16548703467664.jpg“뭔데 사람 손을 그렇게 세게 쳐?”

16548703483284.jpg“메이아를 잠들게 만들어서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나.”

16548703467664.jpg“내가 쌍둥이 어머님을 왜 데려가!”

16548703483284.jpg“쌍둥이 어머님……?”

라크하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아, 그게 말이지. 나는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나와 라크하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레이나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주절거렸다.

16548703467664.jpg“나 원 참, 누가 보면 남편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나는 돈주머니를 찾아주려고 한 것뿐이었다고.”

투덜거리던 레이나가 떨어진 돈주머니를 주워 내밀었다.

16548703467664.jpg“이거 어머님, 아니 그쪽 것 맞죠?”

16548703452631.jpg“아, 네. 맞아요. 감사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받고 헤어져야겠다. 돈주머니를 건네받은 나는 얼른 가자는 신호로 라크하의 로브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라크하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16548703452631.jpg‘왜 그러는 거지?’

의아하게 라크하를 올려다보는데 그의 입에서 낯선 단어가 흘러나왔다.

16548703483284.jpg“남편……?”

갑자기 ‘남편’이라는 단어에 꽂혔나 보다. 라크하는 얼이 빠진 얼굴로 계속해서 같은 단어를 중얼거렸다. 다행히 레이나는 그저 라크하를 이상한 사람 보듯 쏘아본 뒤 휙 몸을 돌렸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서더니 다시 우리 앞으로 달려왔다.

16548703467664.jpg“잠깐만, 당신! 그러고 보니 내가 잠들게 만들 수 있다는 거 어떻게 알아?”

헉, 그러게.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느라 나 역시 그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16548703483284.jpg“남편…….”

하지만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탓에 라크하는 레이나의 질문에 대답할 정신이 없어 보였다.

16548703467664.jpg“이봐, 당신. 어떻게 알고 있냐고.”

레이나가 답답한 듯 미간을 팍 찌푸리며 라크하를 향해 쏘아붙였다. 무례하다고 여길 만 했으나 라크하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쌍둥이들도 어떠한 대처를 하지 않는 라크하가 이상한지 그를 흘긋대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망은 내 전문이었으니까.

16548703452631.jpg“죄송해요, 제 남편이 겁이 많아서요. 누가 몰아붙이면 꼭 이렇게 굳어버려요.”

16548703467664.jpg“예?”

레이나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레이나를 보며 나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16548703452631.jpg“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때 얘기해요.”

그러고는 늘 있는 일인 것 마냥 최대한 자연스럽게 쌍둥이들에게 지시했다.

16548703452631.jpg“얘들아, 아빠 챙겨.”

16548703513067.jpg

  ***

16548703452631.jpg“공작님.”

16548703483284.jpg“…….”

라크하는 천천히 메이아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아무래도 남편이란 말이 큰 충격이었던 걸까? 메이아는 라크하의 눈치를 보며 사과를 건넸다.

16548703452631.jpg“저까지 멋대로 칭해서 미안해요. 그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어요.”

16548703483284.jpg“……어쩔 수 없이 한 말이라고?”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말이었다며 선을 긋는 메이아의 말에 라크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뜨겁게 들끓던 머리가 차갑게 식은 기분이었다. 일순 라크하의 표정이 굳자, 메이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또 한 번 사과를 했다.

16548703452631.jpg“네, 그래도 남편이라고는 불러선 안 됐는데, 죄송해요. 공작님과 제가 부부 사이라니요. 제가 공작님이었어도 굉장히 싫었을 거예요.”

16548703483284.jpg“……싫지 않았다면?”

급격하게 기분이 나빠진 라크하는 평소였다면 하지 않았을 반박을 했다.

16548703452631.jpg“네……?”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메이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보석 잡화점을 구경하던 아이샤가 메이아에게 달려왔다.

16548703452636.jpg“언니, 언니!”

아이샤는 잔뜩 울상을 지으며 메이아의 치맛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16548703452636.jpg“나 엄청 배고파!”

16548703452631.jpg“아,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이구나.”

오전부터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심지어 먹은 거라곤 솜사탕밖에 없기도 했다. 뒤이어 다가온 델카인도 아이샤의 말을 거들었다.

16548703452691.jpg“나도 배고파.”

16548703452636.jpg"언니, 고기 사줘!"

델카인의 말에 힘을 얻은 아이샤가 배를 부여잡으며 외쳤다. 하지만 메이아에겐 고기를 살 돈은 없었다. 메이아가 초라한 제 돈주머니 사정을 떠올리며 움찔했다.

16548703452631.jpg“얘들아 그게…….”

메이아는 우물거리며 애꿎은 돈주머니만 꼼지락거렸다. 라크하는 곤란해하는 메이아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제 뒤로 끌었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아이샤와 시선을 맞추었다.

16548703483284.jpg"아이샤, 고기가 먹고 싶다고?"

16548703452636.jpg“응, 그런데 나는 오빠보단 언니가 사주는 게 먹고 싶어.”

천연덕스러운 아이샤의 말에 곁에 있던 델카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16548703452691.jpg“야, 형수님은 고기를 살 돈이 없다는 거잖아. 한 번에 좀 알아들어.”

16548703452636.jpg“뭐야, 언니 거지야?”

16548703452631.jpg“…….”

침묵으로 긍정하는 메이아의 모습에 아이샤와 델카인이 딱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16548703452691.jpg"괜찮아, 형수님. 난 형수님이 돈이 없어도 좋아."

16548703452636.jpg"맞아, 언니. 돈이 없으면 어때. 오빠가 있잖아."

  *** 돈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 비참하긴 했지만 라크하 덕분에 결과적으로 나쁘진 않았다.

16548703452631.jpg‘나를 대신해서 물주 역할을 돈독히 해줄 테니까.’

비참함과 수치스러움도 잠시, 돈을 내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렇게 라크하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무척 휘황찬란한 레스토랑이었다.

16548703452631.jpg‘여기 귀족들만 가는 곳 아니야?’

발걸음이 입구 앞에서 절로 멈추었다.

16548703452631.jpg“……여길 간다고요?”

16548703483284.jpg“왜, 별로인가?”

16548703452631.jpg“아뇨, 별로이진 않은데…….”

지나다니며 우리를 흘긋대는 귀족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우리 셋의 옷차림 때문이었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검은 로브를 쓰고 있는 라크하. 심지어 나와 쌍둥이들은 서민에 가깝게 변장을 하고 있었다.

16548703452691.jpg“형수님, 왜 그래? 여기 싫어?”

델카인의 질문에 도리어 아이샤가 긴장한 눈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아이샤는 여기서 식사하고 싶구나.

16548703452631.jpg“아니야. 들어가자.”

16548703483284.jpg“싫으면 다른 곳을 가도 된다.”

고작 한 번 망설였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다들 내 눈치를 보기 바빴다.

16548703452631.jpg“아니에요. 여기서 먹죠.”

뭐, 들어가면 라크하가 알아서 해주겠지. 겸연쩍게 웃으며 앞장선 나는 라크하를 보며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16548703452631.jpg“그냥 들어가면 되죠?”

뭐 따로 들어가기 전에 갖춰야 할 예의가 있다든가 그런 건 없겠지? 그런데 돌아온 건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16548703483284.jpg“메이아, 앞을……!”

라크하의 외침에 뒤늦게 앞을 돌아봤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때마침 레스토랑에서 나온 남자와 부딪히고 말았다.

16548703452631.jpg“윽!”

으으, 아파라. 세게 부딪히진 않았으나, 남자의 몸에 얼굴을 박아 코가 얼얼했다. 코를 매만지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선혈처럼 붉은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새하얀 로브를 쓴 남자에게 사과를 건넸다.

16548703452631.jpg“아, 죄송합니다.”

16548703580096.jpg“메이아……?”

나와 부딪힌 남자가 나지막이 내 이름을 중얼거렸다. 나를 알아? 로브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그 속에서도 유유히 빛나는 붉은 눈이 정확히 나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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