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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지독하고, 강렬하게 (28/136)

28. 지독하고, 강렬하게2022.02.04.

라크하가 내 방에 찾아오자마자 나는 곧장 델카인의 안부를 물었다.

16548702179026.png“델카인은 어떻대요?”

16548702179036.png“큰 상처가 아니니 약을 잘 바르기만 한다면 괜찮다고 하더군.”

16548702179026.png“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출혈이 많아 걱정을 했는데 큰 문제는 없는 모양이었다. 라크하가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16548702179036.png“그나저나 델카인이 말하기론 그대가 기사들에게 쫓겼다던데.”

16548702179026.png“아…… 네. 제 신분을 묻더라고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굳이 평민 관람석까지 내려와 내 신분을 확인하려고 했었다. 라크하가 의아한 듯 눈가를 좁혔다.

16548702179036.png“인상착의가 어떻게 됐는지 기억하나?”

나는 처음 내게 접근했던 남자를 떠올려 보았다.

16548702179026.png“경갑옷을 입고 있었고…… 아, 입가에 큰 흉터가 있었어요. 검에 베인 상처 같았어요.”

라크하는 대충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16548702179026.png“누군지 아시는 건가요?”

16548702179036.png“황제의 보좌관일 거다.”

일반 기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나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 대체 황제의 보좌관이 왜 직접 나서서 나를 살피러 왔단 말인가.

16548702179026.png‘나에게서 어떤 걸 발견하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아인티아 저택으로 온 이후로 사람이 많은 곳에 나간 건 처음이었다. 불안감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내 손 위로 라크하의 손이 겹쳐졌다. 차분하고 고요한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16548702179036.png“그대는 걱정 마. 내가 따로 알아볼 테니까.”

그 눈과 마주하고 있자니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16548702179026.png‘그래, 내 정체가 들킨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나한테는 라크하가 있었다. 나와 계약한 이상 분명 그는 나를 신전으로 돌려보내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힘을 쓸 것이었다. *** 내가 일어났을 땐 라크하는 이미 내 방에서 사라진 뒤였다. 나도 아침잠이 적은 편인데 라크하는 나보다 더했다.

16548702179026.png“부지런하기도 하지.”

나는 리타가 가져다 준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 먹으며 창문 앞에 섰다. 그리고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16548702179026.png"……오늘도 저기 있네."

전에도 그 자리에 있더니. 델카인이 마당에서 쭈그려 앉아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모른 척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팔이 다쳤는데도 저 자리에서 쭈그려 앉아 있으니 눈에 계속 밟혔다.

16548702209726.png"왜 그러세요, 시터님?"

리타가 빈 쿠키 접시를 챙기며 내게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리타를 지나쳐 방문을 열었다.

16548702179026.png"잠시 나갔다 올게요."

16548702209726.png"어딜요?"

16548702179026.png"바로 밑이요. 금방 다녀올 거예요."

나는 방문을 나서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인티아 공작저의 규모는 상당히 커서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델카인이 가버릴 수도 있었다.

16548702179026.png"여기인 것 같은데."

내 방 창문에서 보이던 곳이.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델카인의 조그만 등이 보였다.

16548702179026.png'아직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살금살금 델카인의 곁으로 가서 쭈그려 앉았다.

16548702179026.png"델카인, 여기서 뭐해?"

16548702240583.png"!"

16548702240593.png

  꽤나 놀랐는지 델카인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16548702240583.png"혀, 형수님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16548702179026.png“위에서 보고 왔지. 저기가 내 방이거든.”

나는 슬쩍 내 방이 있는 창문 쪽을 가리켰다.

16548702240583.png"아……."

전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델카인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16548702179026.png‘몰랐나 보네.’

아이샤와 달리 델카인은 한 번도 내 방에 온 적이 없긴 했다. 나는 얼떨떨해 보이는 델카인을 향해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16548702179026.png“그런데 여기서 뭐하고 있었던 거야?”

16548702240583.png“……흙장난을 하고 있었어.”

델카인이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를 하나 줍더니 모래 위를 벅벅 긁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점점 느려지더니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다시 손으로 흙을 덮었다.

16548702179026.png“음, 혹시 여기에 뭐가 있어?”

내 물음에 델카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가 천천히 내게 향했다.

16548702240583.png"형수님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

16548702179026.png"사실 예전에 우연히 봤거든. 델카인이 여기에 뭘 묻는걸."

나뭇가지를 쥐고 있던 델카인의 손에 힘이 서서히 빠졌다. 델카인이 다시 땅을 내려다보았다.

16548702240583.png"맞아. 여기엔 푸이리가 있어."

푸이리. 쌍둥이들을 처음 만났던 날, 질리도록 들었던 이름이었다. 굉장히 아끼는 애완동물 같았는데.

16548702179026.png"푸이리를 묻은 거야?"

델카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엉망이 된 모래를 정리했다. 차마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서 그저 델카인의 행동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조금 뒤 델카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16548702240583.png"좋아하는 걸 줘도 관심이 없더라고. 그럴 애가 아닌데."

16548702179026.png"푸이리가 뭘 좋아했는데?"

16548702240583.png"이끼 낀 돌멩이, 뼈다귀, 아 그리고 독버섯도 좋아했었어."

그런 걸 줘서 죽은 거 아닐까?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한 말을 겨우 삼켜냈다.

16548702240583.png"그걸 주면 좋다고 늘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었는데……."

푸이리와 있었던 과거를 떠올리는 듯 델카인이 행복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었다. 굉장히 우울하고 슬픈 얼굴로.

16548702240583.png"하지만 라크하 형을 보면서 알게 됐어."

16548702179026.png"……어떤 걸?"

설마 푸이리가 흑마법으로 살아났다는 걸 눈치챈 건가?

16548702240583.png"형수님과 달리 형은 푸이리를 살리는데 실패했다는 걸."

델카인은 축축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16548702240583.png"라크하 형은 죽기 전이나 후나 똑같아. 하지만 푸이리는 아니야. 그러니까……."

조그만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16548702240583.png"나는 이미 떠난 애를 힘들게 잡고 있었던 거지, 멍청하게도."

16548702179026.png"……그래서 묻어준 거구나."

나는 손을 뻗어 모래 위를 조심스레 쓸었다. 그런 나를 델카인이 흘겨보더니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를 지었다.

16548702240583.png"참고로 내가 푸이리를 묻었다는 건 아이샤한테는 비밀이야."

16548702179026.png"아이샤는 왜?"

16548702240583.png"아이샤는 지금의 푸이리가 더 좋다고 했거든. 시끄럽게 안 군다고."

어휴, 이 똥강아지가 또. 둘이서 그 일로 얼마나 싸웠을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델카인은 나뭇가지를 옆으로 툭 던졌다.

16548702240583.png"그래서 일부러 동쪽 별관 뒷마당에 묻었는데, 형수님 눈에 띄어버렸네."

슬픔을 삼키기 위해 억지로 내는 듯한 장난스러운 목소리.

16548702179026.png"델카인……."

이렇게 따로 묻고 종종 찾아올 정도라면 푸이리를 얼마나 아꼈던 걸까. 그런데 델카인은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도.

16548702240583.png"이제, 나는 이만 가볼게."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 겉과 달리 속은 얼마나 곪아들어가고 있을지 상상이 됐다. 나는 차마 그냥 보낼 수 없어 델카인을 끌어안았다.

16548702179026.png"푸이리를 보내줄 생각에 많이 힘들었지?"

16548702240583.png"형수님……?"

16548702179026.png"델카인 덕분에 푸이리는 좋은 곳에 갔을 거야."

16548702240583.png"……."

느릿한 박자로 델카인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내 손길에 델카인이 흠칫 몸을 떨더니, 이내 나를 껴안았다.

16548702240583.png"……형수님은 푸이리처럼 떠나지 말아 줘."

16548702179026.png"응, 안 떠날게."

16548702240583.png"약속해 줘."

16548702179026.png"약속해."

델카인이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깨 위가 따뜻하고 더없이 축축하게 슬픈 색으로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 최근 들어 마음이 복잡한 일이 많았던 탓일까. 그날 저녁,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우니 술 생각이 났다. 예전에는 힘들거나 힘든 일이 있었을 때 하루의 마무리를 혼술로 장식했었는데.

16548702179026.png“……술 먹고 싶다.”

16548702209726.png“술을 드시고 싶으시다고요?”

새 이불을 가져다주러 온 리타가 내 말을 듣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성의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려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16548702179026.png‘리타에게 부탁해볼까?’

리타가 들어줄지도 몰랐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16548702179026.png“리타 씨.”

16548702209726.png“네?”

16548702179026.png“혹시 술 한 병만 구해 줄 수 있을까요?”

16548702209726.png“음…… 시터님이 부탁한 거라고 하면 주방장님께서 흔쾌히 주실 것 같긴 한데…….”

옳거니! 나는 리타를 향해 반짝반짝한 눈빛을 보냈다. 리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48702209726.png“네, 좋아요. 가져다드릴게요.”

다녀오겠다며 나간 리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와인 한 병을 들고 돌아왔다.

16548702179026.png“이게 얼마 만에 마시는 술이야.”

들뜬 마음으로 혼자 와인을 홀짝거리고 있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내 방에 볼 일이 더 있나? 아직 라크하가 올 시간은 아니기에 리타라고 생각한 나는 흔쾌히 답했다.

16548702179026.png“네, 들어오세요.”

하지만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리타가 아닌 라크하였다. 깜짝 놀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6548702179026.png“어, 어쩐 일이세요?”

16548702179036.png“갑자기 술은 왜 마시는 거지?”

라크하는 대답 대신 도리어 질문을 하며 테이블 앞에 섰다. 나는 볼을 긁적이며 솔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마땅히 둘러댈 말도 없었다.

16548702179026.png"으음…… 기분이 조금 울적해서요."

16548702179036.png"누가 그대를 괴롭혔나?"

라크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나를 괴롭힌 사람이 있다면, 죽여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살벌한 얼굴이었다. 평상시엔 저 얼굴만 봐도 간담이 서늘했을 텐데.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살짝 웃음이 흘러나왔다.

16548702179026.png“공작님이 무서워서라도 아무도 절 못 괴롭히겠어요.”

16548702179036.png"전에도 얘기하지 않았나. 내 사람을 건드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무심한 말투와 달리 그 속에 담긴 말은 다정했다.

16548702179026.png‘내 사람…….’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잔을 만지작거렸다. 문득 내가 아인티아의 구성원이 됐다는 게 실감이 났다. 또래에 비해 의젓했던 델카인의 눈물을 본 것 하나로 감정이 동요하고 있으니 말이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라크하가 내 손에 있는 잔을 뺏어갔다.

16548702179026.png“어?”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라크하가 잔에 있던 술을 한 번에 비웠다.

16548702179026.png'……마지막 남은 잔이었는데.'

아쉬운 얼굴로 빈 술잔을 바라보고 있자, 라크하가 발걸음을 뗐다.

16548702179036.png"술을 더 가져오지. 그대는 이것보단 약한 술로 마시는 게 더 좋을 것 같군."

16548702179026.png"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나는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 더 마시고 싶긴 하나 라크하가 술을 가져오게끔 둘 순 없었다.

16548702179026.png‘애초에 사용인의 술을 공작이 가져다주는 게 어디 있어.’

게다가 라크하와 단둘이 술을 마시기에는 껄끄러웠다.

16548702179036.png“다음부턴 아쉬운 표정부터 지우고 말해, 사제.”

라크하가 찡그려진 내 미간을 가볍게 눌렀다.

16548702179026.png"아."

16548702179036.png"금방 다녀오지."

언제부터 내 표정을 잘 읽었다고. 나는 라크하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그가 누른 미간을 만지작거렸다. 술기운 때문인지는 그의 손가락이 닿은 곳이 뜨거웠다.

16548702418852.png

  ***

16548702179036.png"오늘 델카인이 울었다고?"

16548702179026.png"네, 델카인이 우는데 이상하게도 제가 더 슬프더라고요."

새하얀 눈밭 위 동백꽃처럼 물든 볼. 기다란 속눈썹에 살짝 가려진 나른한 사파이어 눈동자가 라크하를 향했다. 메이아가 숨을 길게 푹 내쉬며 말을 천천히 이었다.

16548702179026.png“심지어 오늘 하루 내내 아무렇지 않은 척하니 더 마음이 안 좋았어요.”

메이아의 눈매가 슬프게 내려갔다. 평소에 쌍둥이들을 아끼더니 꽤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듣고 있는 라크하도 마음이 씁쓸한 건 매한가지였다.

16548702179036.png‘기분을 풀어줄 방법이 없으려나.’

한참을 고민하던 라크하는 메이아가 쌍둥이들과 함께 소풍을 가자고 했던 날을 떠올렸다. 쌍둥이들과 함께 나간 그날의 메이아는 활기가 넘쳤었다. 산책이라도 권해볼까, 나가서 맛있는 거라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까. 라크하의 머릿속에 있던 많은 생각은 결국 입 밖으로 터져나왔다.

16548702179036.png“……외출이라도 하겠나?”

16548702179026.png“네?”

뜻밖의 제안에 놀란 메이아가 두 눈을 깜빡였다. 꿈인가? 술에 취해서 잘못 들은 걸까?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었다.

16548702179036.png“답답할 땐 바깥바람이라도 쐬고 오는 것만큼 좋은 건 없으니까. 뒤쪽 길로 몰래 나가면 눈에 띌 일도 없기도 하고. 주변에 호위도 충분히 붙이면 아무 문제 없을 거다.”

16548702179026.png“정말요?”

어쩐지 신나 보이는 메이아를 보며 라크하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16548702179036.png“그래, 내일이나 모레쯤에 함께-.”

16548702179026.png“네! 셋이서 무사히 잘 다녀올게요!”

16548702179036.png“뭐?”

셋? 라크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메이아를 바라보았다. 둘이서 나가자고 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왜 세 명이 나온단 말인가.

16548702179026.png“아이샤와 델카인이 무척 좋아하겠어요. 공작님도 은근히 상냥하신 면이 있다니까요.”

메이아는 라크하가 한 말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곧장 말을 제대로 정정하려던 순간이었다.

16548702179026.png“저는 공작님의 이런 면이 좋더라고요.”

쿵. 라크하의 심장이 속절없이 아래로 주저앉았다. 제 말을 끊은 저 여자에게 무례하다고 화를 내야 하는데. 어째서 그녀가 하는 행동은 모든 게 허용되는 걸까. 라크하는 그저 이 순간이 혼란스러웠다.

16548702179026.png“공작님께서 이런 모습을 자주 드러냈으면 좋겠어요.”

턱을 괸 메이아가 배시시 웃었다. 푸르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맑고 청량했다.

16548702179026.png“으음, 이제 얼마 안 남았네. 자, 얼른 짠해요.”

메이아가 술잔을 들어올렸다.

16548702179036.png"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

라크하가 잔을 뺏어 내려놓으며 메이아를 말렸다. 여기서 더 마신다면 내일 숙취로 힘들어할 게 뻔했다.

16548702179026.png“딱 한 잔만 더 마시면 안 될까요?”

술기운이 오른 메이아가 눈을 접어 웃으며 라크하를 채근했다. 메이아의 눈웃음에 라크하는 자신도 모르게 잠시 멈칫했다. 그 틈을 타 메이아가 다시 술잔을 잡아들던 그때, 손이 미끄러져 잔을 놓치고 말았다. 쨍그랑! 술잔이 테이블 위로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16548702179036.png“!”

잔이 깨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라크하가 황급히 메이아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면서 마법을 써서 유리 파편들을 재로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16548702179036.png“어디 다친 곳은 없나?”

16548702179026.png"네, 네. 없는 것 같은데…… 아, 피 난다."

제 몸을 살피던 메이아가 눈가를 좁혔다. 팔등 위로 송골송골 피가 맺히고 있었다. 깨진 파편이 튀며 살짝 베인 모양이었다.

16548702179026.png"그래도 가벼운 상처인 것 같아요."

16548702179036.png"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

라크하는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샤키르의 꽃향기가 그의 코끝을 파고들었다. 지독하고, 강렬하게. 마치, 샤키르의 꽃밭에 파묻히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향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16548702179036.png“윽.”

벌떡 일어난 라크하는 코를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위험했다. 하마터면 자각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성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그런 줄도 모르고 메이아가 벌떡 일어나 라크하에게 몸을 들이밀었다.

16548702179026.png"저, 냄새나요?"

16548702179036.png"……떨어져."

16548702179026.png"제가 이제야 말하는 건데, 사실 전에 안 씻는다고 했던 거 그냥 한 말인 거 알죠? 저 매일 씻어요."

일전에 무심코 했던 말을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라크하는 계속해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이대로 방에서 나가버릴 것 같은 모습에 메이아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괜한 오기가 생긴 메이아는 라크하에게 다가갔다.

16548702179026.png“그래서, 저 냄새나냐고요.”

16548702179036.png"그것 때문이 아니라니…… 윽."

16548702179026.png"그럼 코를 막으면서 도망칠 일이 뭐가 있는데요."

억울한 얼굴로 메이아가 한 발자국 더 다가간 그 순간.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던 보라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커다란 손이 메이아의 손목을 거머쥐더니 그녀를 테이블로 몰아붙였다.

16548702179026.png"!"

그의 눈이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정욕으로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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