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잡히면 끝이야2022.01.31.
델카인의 왼팔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경기장 바닥을 적시는 피에 나는 경악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 나를 라크하가 잡아챘다.
"큰 상처가 아니니 진정해."
"어떻게 다친 걸 보고도 진정할 수가-."
표정을 잔뜩 찡그리며 라크하에게 무어라 하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차분한 말투와 달리 라크하의 표정은 굉장히 굳어 있었다.
'맞아, 라크하는 나보다 더 걱정이 되겠지…….'
아무리 쌍둥이들에게 엄하다고 하더라도, 아끼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클 테니까. 내가 불안해할수록 라크하는 더욱 신경이 쓰일 것이었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킨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못 하겠으면 델카인이 알아서 기권을 하겠죠?"
나를 슬쩍 흘겨본 라크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작님의 말대로 큰 상처가 아닌가 봐요. 무사히 경기도 끝나겠는걸요."
"……."
달래듯 힘을 주어 손을 잡자, 라크하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경기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녀석이…….”
경기장 내를 지그시 응시하는 라크하의 표정은 제법 심각했다. 나 역시 라크하를 따라 경기장을 바라보았지만, 대치 중인 델카인과 크레이만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잠시 다녀오지.”
뭐?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라크하가 관람석을 단숨에 벗어났다.
'갑자기 어딜 가는 거야?'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이며 라크하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이 망할 자식아!!!!”
경기장으로 난입한 아이샤였다. *** 델카인은 피가 새어 나오는 팔을 붙잡으며 크레이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이렇게 피해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부상을 입은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냥 기권을 할까?'
어떠한 무기도 없는 상태에서 검을 든 상대를 이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빈틈을 노려서 무기를 뺏으면 가능하겠지만…….'
상대는 실력자였다. 크레이의 빈틈을 공략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른 팔도 똑같이 되고 싶지 않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크레이가 여유롭게 검을 돌리며 씩 웃었다. 위협적인 모습이었으나 오히려 델카인은 희망을 엿보았다.
‘방심을 하고 있어.’
어쩌면, 빈틈이 생길지도 몰랐다.
"포기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고."
검을 고쳐 잡은 크레이가 델카인을 향해 달렸다. 델카인은 침착하게 크레이의 허점을 살폈다. 그때였다.
“이 망할 자식아!!!!”
아이샤가 제게 달라붙은 검술 대회 관계자를 떨쳐내며 경기장 안으로 난입했다. 느닷없는 아이샤의 등장에 델카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샤……?”
“무기도 없는 사람에게 덤비다니! 저런 야비한 놈은 가만 안 둬!”
아이샤를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크게 일렁였다. 검술 대회 관계자들이 말릴 틈도 없이 아이샤는 순식간에 크레이에게 덤볐다. 쾅! 아이샤와 크레이가 격돌하며 큰 굉음이 울렸다. 훅, 먼지 구름이 일어나 시야가 가렸다.
'저 멍청이가……!'
눈을 질끈 감으며 뒤로 물러난 델카인의 등 뒤로 무언가가 닿았다. 뒤를 돌아본 곳에는 로브를 쓴 채 표정을 험악하게 굳힌 라크하가 서 있었다. 로브가 벗겨지며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형……?"
“팔은 괜찮나?”
은근한 걱정을 담은 보라색 눈동자가 델카인의 팔로 향했다. 델카인은 슬쩍 손으로 제 팔을 가리며 답했다.
“……깊게 베인 건 아니라서 괜찮아.”
“다행이군. 수고했다.”
라크하는 엷게 웃으며 델카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말투와 손길에 델카인은 자못 놀란 얼굴로 라크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땐 이미 라크하의 미소가 사라진 뒤였다.
“내가 아이샤를 말릴 테니 마차로 가서 쉬고 있어.”
"……검술 대회는?"
"아이샤가 멋대로 난입한 순간, 부정패이니 끝이라고 봐야지."
라크하는 쯧, 혀를 차며 먼지 구름이 걷히기 전에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퍽!
“으윽!”
뒤이어 들려온 건 크레이의 신음 소리였다.
‘……뭐지?’
자리를 뜨려던 델카인은 황급히 돌아섰다. 그러나 델카인의 눈에 보이는 건 자욱한 먼지 구름뿐이었다. *** 오늘 하루만큼은 조용히 흘러갈 줄 알았는데 모든 건 내 희망 사항이었다. 라크하의 실종에 이어 아이샤의 등장이라니. 개중 굳이 더 큰 문제를 꼽자면, 라크하의 실종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보고 떨어지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혼자 사라져버릴 줄이야.
“그래도 가만히 있어야겠지…….”
길이라도 엇갈리면 큰일 날 테니까. 움직이지 않는 걸로 결론을 내리고 기다리려던 찰나, 낯선 복장을 입은 남자가 눈에 띄었다. 내가 있던 관람석의 사람과 달리 깔끔한 경갑옷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심지어 그 남자는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키네스가 있는 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어.’
불현듯 싸한 기운이 나를 감쌌다.
"죄송해요, 지나갈게요."
불길함을 느낀 나는 그 사람을 등진 채 사람들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마차, 마차로 가자.’
라크하든 쌍둥이들이든 언젠가 마차로 돌아올 테니까. 수많은 인파를 뚫고 겨우 관람석 출구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
누군가가 내 팔목을 잡아챘다. 계속해서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던 그 남자였다. 가까이서 보니 입 주변에는 검에 베인 듯한 큰 흉터가 있었다.
"잠시 시간이 괜찮으신지요?"
나는 황급히 손을 빼내며 더욱 후드를 눌러썼다.
"죄송합니다. 급하게 갈 곳이 있어서요."
"그럼 신분만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그것만은 절대 안 됐다. 비켜서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자리를 지키는 남자와 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대치하는 상황이 길어질수록 남자가 나를 의심할 것은 확실했다.
‘더 이상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약간이라도 보이는 빈틈을 노려야 했다.
“그 전에 그쪽 먼저 신분을 밝혀야 하지 않을까요?”
“아, 그렇군요. 저는…….”
남자가 신분을 증명할 물건을 꺼내려는 듯 제 옷 속을 뒤적거렸다. 지금이다!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출구로 발을 내질렀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나는 최선을 다해 달렸다. 여기서 내 정체를 들킨다면 앞으로의 계획은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젠장, 이게 무슨 일이냐고!'
상황이 꼬여도 어쩜 이렇게 꼬이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변에 사람이 많은 점이었다. 인파 속으로 숨자 남자를 금방 따돌릴 수 있었다. 또다시 눈에 띄기 전에 서둘러 마차가 대기되어 있는 곳으로 가려는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머어머! 어떡해!"
"피, 피가……! 얘야 괜찮니?"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피'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사람들이 수군대는 쪽으로 돌아갔다.
"……델카인?"
아직 채 피가 멎지 않은 팔을 붙잡고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는 델카인이 보였다. 의식할 새도 없이 내 발걸음은 델카인에게 향하고 있었다. 단걸음에 곁에 다가온 나를 보며 델카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형수님?!”
“잠시만 가만히 있어 봐.”
“왜…… 어어?!”
나는 그대로 델카인을 안아들었다. 쓸데없이 힘이 센 메이아의 몸을 이럴 때 써야지 언제 쓰겠어. 델카인이 내 품에서 바르작거렸으나, 그러든 말든 나는 마차가 있는 쪽으로 달렸다.
"혀, 형수님, 난 괜찮으니까 내려줘도 돼."
“그것보단 내가 쫓기고 있어서 그런데 뒤를 봐줄 수 있을까?”
“……쫓기고 있다고?”
델카인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나를 향해 소리쳤다.
"형수님! 누가 오른쪽에서 뛰어와!"
“알겠어!”
잡히면 오늘로써 시터 인생은 물론이거니와 내 인생도 끝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한 번 길을 다른 곳으로 들자,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왼쪽! 저기 골목에서 왼쪽으로 틀면 돼!"
나는 델카인의 지시에 따라 경로를 틀었다.
“이번엔 저 끝에 골목에서 오른쪽!”
그렇게 얼마나 도망 다녔을까. 무사히 마차 앞에 도착한 나는 델카인과 함께 올라타 문을 쾅 닫았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빠르게 뛰며 숨이 벅차올랐다.
"후우…… 여, 여기까지 쫓아올까?"
"원래 마차를 대기시키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서 찾기 어려울 거야. 그리고 형도 아이샤랑 여기로 오기로 했어."
"다행이다……."
내 판단이 틀리진 않았구나. 그제야 나는 늘어져라 의자에 몸을 기댔다. 델카인까지 안고 뛰어서 그런지 온몸이 녹초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잠깐 이럴 때가 아니지.'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나는 벌떡 상체를 세워 델카인을 바라보았다.
"팔은?! 피가 많이 나는 것 같던데, 괜찮아?"
"깊게 베인 건 아니어서 금방 나을 거야."
괜찮다는 듯이 말하는 것과 달리 델카인의 팔에선 아직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지혈이나 소독할 만한 거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눈살을 살짝 찡그리며 델카인의 상처를 살피던 찰나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마부가 앉아 있는 자리와 이어진 뒤쪽 창문을 벌컥 열었다. 내 돌발행동에 놀랐는지 마부가 경련하듯 몸을 떨며 나를 바라보았다.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그…… 혹시 붕대나 응급 처치를 할 수 있는 약품들이 있나 해서요."
"아닙니다. 아, 약품들은 없습니다."
뭐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이런 상황에 나가서 사 올 수도 없고.'
라크하라도 빨리 오면 좋으련만. 한숨만 연거푸 내쉬고 있는데, 마차 문이 열리며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나는 활짝 웃으며 라크하와 아이샤를 반겼다.
“공작님, 딱 맞춰서 잘 오셨어요!”
“아이샤, 여기 있어. 얼른 사제를 찾아-.”
마차 안을 확인하지도 않고 뒤돌던 라크하가 우뚝 멈춰 섰다. 크게 떠진 보라색 눈동자가 나에게 향했다.
“메이아……?”
"언니,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잖아! 오늘 나 이기는 거 봤어?"
라크하의 뒤에서 불쑥 나타난 아이샤가 해맑게 웃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칭찬을 해주었다.
“응, 엄청 잘하던걸?”
“그치! 내가 좀 잘해. 그나저나 델카인, 너 괜찮아?”
턱을 치켜세우며 뿌듯하게 웃던 아이샤가 뒤늦게 델카인의 상태를 살폈다.
“으, 아프겠다!”
“이 정도 상처로 뭘 그리 호들갑이야.”
“너는 걱정해 줘도 난리야.”
“네 걱정은 필요 없거든?”
쌍둥이들이 투닥거리는 걸 보며 나는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이젠 쌍둥이들의 소란스러움이 일상처럼 느껴졌다. ***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바, 방금 아인티아 공녀가 아니었나?”
“워낙 순식간이어서 제대로 못 봤어.”
관람석에 있던 귀족들이 술렁였다. 그에 비해 키네스는 턱을 괸 채 지그시 라크하의 행동을 주시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에 은은한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미약한 신력으로 차분히 먼지 구름 속을 들여다본 키네스는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아인티아 공작이 주먹질이라니. 상상도 못한 행동이었다.
‘알려진 것보다 더 제 동생들을 아끼기라도 하나 보지.’
그래도 보는 눈이 많은 탓인지는 몰라도 주먹질로 끝나서 다행이었다. 아인티아 공작이라면, 충분히 무모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흥미롭게 경기장 속을 지켜보고 있던 그때, 자리를 비웠던 비에고가 돌아왔다.
"일은 어떻게 되었나?"
"죄송합니다. 놓쳤습니다."
"이런."
키네스는 쯧, 혀를 찼다. 공작이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도 놓쳤을 줄이야. 비에고의 고개가 점점 더 아래로 떨어졌다.
"보통 실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찌나 재빠른지 근방에 있던 기사들과 함께 쫓았으나 잡을 수 없었습니다."
"성녀는 아니겠군."
사제들의 말에 의하면, 신의 딸은 심약하고 허약하고 여인이었다. 조그만 일에도 눈물을 흘릴뿐더러 식사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다고. 아쉬운 성과였다. 로브를 쓰면서까지 꽁꽁 숨기고 있기에 공작이 데리고 있는 거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키네스는 답답한 듯 검지로 황좌를 톡톡 두드렸다.
"그럼 힘을 들여 확인해 볼 필요도 없지. 경기장도 이제 정리되었으니, 다음 경기나 보자꾸나."
키네스는 흥미가 사라진 무덤덤한 얼굴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망설이던 비에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
"왜 그러지?"
"한 가지 특이사항이 있긴 했습니다."
처음 붙잡은 그 찰나의 순간에 목격한 후 다시 한번 확인하진 못했다. 다만, 제대로 본 게 맞는다면…….
"푸른 눈의 여인……이었습니다."
분명 푸른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