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위험 상황!2022.01.28.
검술 대회 당일. 날씨도 화창하고 컨디션도 좋고 모든 게 완벽했다. 지금 내가 검술 대회 경기장에 와 있는 것만 제외한다면.
'델카인이 검술 대회에 함께 가자고 소원을 빌 줄이야…….'
나중에 소원을 빌겠다기에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는데, 역시 아인티아의 혈통을 얕봐선 안 됐다.
"앞으로는 절대 쌍둥이들과 소원 약속 같은 건 하지 말도록."
"네…… 그러려고요."
쌍둥이들에게 소원을 들어준다는 망언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진작에 했다. 어제 아침, 난데없이 델카인의 소원을 들은 나는 두 손까지 모아가며 부탁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타일러도 델카인은 끄떡없었다.
-델카인, 제발 다른 소원을 빌면 안 될까? 정말 이건 사정이 있어서 그래. 응?
-약속이 중요하다고 하던 형수님은 어디 간 거야? 실망이야.
-뭐? 언니가 약속을 안 지킨다고? 그럼 난 수업 안 들을래!
설상가상으로 아이샤까지 합세해서 말하니 나에게 마땅한 선택지는 없었다. 그렇게 신전행 특급 열차를 타게 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금발에 푸른 눈인 사람이 꽤 있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게다가 로브를 쓴 데다가 평민 관람석에 앉아 있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이대로면 안 들키겠, 억.”
“로브를 벗을 생각하지 말고.”
머리 위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커다란 손이 내 후드를 꾹 눌렀다. 그 덕에 목이 살짝 꺾인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라크하를 노려보았다.
“벗으려고 안 했어요.”
“부주의한 그대가 잘도 그랬겠군.”
라크하가 오늘 중 가장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픽 웃었다. 무어라 하고 싶었지만, 라크하의 앞에서 워낙 실수한 일들이 많았기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라크하의 손을 밀어냈다.
“오늘 하루 동안 벗을 일 절대 없을 테니까, 두고 봐요.”
“그러면 다행이지. 이왕이면, 내 곁에서도 절대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누가 뭘 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고.”
이 남자가 정말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제가 어린아이인 줄 알아요? 발각이라도 되면 신전으로 끌려가게 될 텐데, 조심할 거예요.”
“…….”
별안간 라크하의 입이 꾹 닫히며 입가에 걸쳐져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확연히 바뀐 분위기에 불퉁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던 나는 흘깃 라크하의 눈치를 보았다.
‘내가 말실수라도 했나?’
괜히 곰곰이 내가 했던 말을 되짚고 있자니 라크하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음…… 뭔데요?”
“신전에서는 왜 도망쳤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라크하가 어디 가서 말할 위인이 아니긴 했으나 망설여졌다. 내가 입을 벙긋하지 않는 이상, 살기 위해서 신전에서 도망쳤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축복을 내리는 게 생명을 갉아 먹는 일이라는 건 원작에서도 메이아가 두 번째 축복을 내리고 나서야 밝혀졌다. -이번 축복을 마지막으로 저는 영원한 잠에 들겠지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제르디아 제국에 필요한 사람은 제가 아닌 폐하이니까요. 원작에서도 늦게 밝혀진 진실을 빠르게 밝히려고 하니 내 입장에선 꽤나 고민되는 일이었다. 내 대답이 지연되자, 라크하가 나를 재촉했다.
“사제?”
“그게 그러니까…….”
"황제 폐하께서 납시셨다!"
때마침, 관중석에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크게 외쳤다. 그와 동시에 웅성거림이 커졌다.
"좀 비켜보게! 자네 덩치가 커서 하나도 안 보이잖아!"
“황제 폐하는 나도 처음 본단 말일세!”
“아, 이제 경기가 시작하려나 봐요.”
나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 어색하게 웃으며 어물쩍 넘겼다. 그러고는 관중석에 들어온 내내 유독 텅 비어 있던 구역으로 시선을 돌렸다.
'으으, 잘 안 보이네.'
사람들이 까치발을 들며 구경을 하고 있어서 시야가 가렸다. 설상가상으로 관객들이 저들끼리 밀쳐대는 탓에 볼 틈을 찾기란 더욱 쉽지 않았다.
"이봐, 밀지 마!"
"난 민 적 없거든? 오히려 그쪽이 밀어대고 있잖아!"
“허! 먼저 민 쪽이 누군데!”
자리싸움이 치열하다 싶었는데 기어코 다툼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불똥만 안 튀었으면 좋겠다.’
하필 우리 뒤쪽에 있던 사람들이라 몹시 신경이 쓰였다. 최대한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던 중에 커다란 손이 들이밀어졌다.
"잡아."
“아뇨, 그럴 필요까진 없어…… 어엇?”
퍽. 뒤에서 누군가가 세게 치는 바람에 비틀거리던 나는 라크하의 손을 잡았다. 덕분에 넘어지는 건 면할 수 있었다.
"고, 고마워요."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군.”
라크하가 서릿발처럼 냉랭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금방이라도 살해 현장으로 변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헉, 위험 상황!’
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를 끌어당겼다.
"저, 저길 봐요! 이제 잘 보인다!"
"어딜 보라는 거지?"
"저기요! 황제 폐하요."
다행히 라크하의 눈이 내가 가리킨 곳을 향했다. 오늘도 사람 한 명을 살렸습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나 어쩌면 신의 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걸지도.'
흑막의 무모한 살해를 막고 있으니 말이다. 그 사이, 흥분됐던 분위기가 한층 식으며 전보다는 시야가 트였다.
'저 사람이 샤키르의 꽃의 남주인공이구나…….'
어깨에 금빛 장식이 수놓아진 하얀 정복을 입은 키네스는 단연코 눈에 띄었다.
"크으."
태양 아래 반짝거리는 화려한 금발에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이게 남주의 포스인 건가?'
멀리서 봐도 잘생긴 아우라가 마구 풍겼다. 입을 헤 벌린 채 키네스를 보고 있자니 옆에서 라크하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러세요?"
"……황제에게서 피하고 싶은 게 아니었나?"
"네? 그렇죠."
당연한 질문을 왜 하는 거지? 잠시 라크하의 말이 이해가 안 된 나는 눈만 깜빡였다. 어쩐지 라크하의 기분이 나빠 보였다.
*** 뿌우우-.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에 아이샤가 번쩍 일어나더니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시작하나 봐!”
신난 아이샤와 달리 델카인은 가만히 제 검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덜렁거리는 건가?'
검 손잡이와 검이 맞물린 부분이 미묘하게 허술했다. 꺼림칙한 기분에 델카인은 아이샤의 검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이샤, 네 검 좀 줘 봐."
"왜?"
"확인할 게 있어서. 잠시면 돼."
"그래, 한번 봐 봐."
아이샤의 검을 받은 델카인은 연신 거슬렸던 접합부를 확인해 보았다. 검술 대회 참여자에게는 동일한 검이 주어졌다. 그렇다면, 아이샤의 검도 비슷해야 할 텐데.
'……멀쩡하잖아.'
제 검과 달리 접합부가 튼튼하게 맞물려 있었다. 짐짓 심각해 보이는 델카인의 표정에 아이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왜 그래, 델카인?"
“내 검이 불량인 것 같아서.”
“음…… 내 눈엔 괜찮아 보이는데?”
“아니, 불량이 맞아.”
“뭐? 그러면 지금이라도 가서 바꿔달라고 해!”
아이샤의 말대로 바꾸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델카인을 옥죄었다.
'이런 실수가 있을 수가 있나?’
검술 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검이었다. 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만큼은 절대 실수가 일어날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델카인은 제 감을 중요시 여기는 편이었다.
“안 바꿔줄 것 같은데…….”
“에이, 불량인데 왜 안 바꿔주겠어.”
“알겠어. 물어보고 올게.”
대기실에서 나온 델카인은 바로 검을 받았던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델카인의 예상은 적중했다. 검술 대회 관계자가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여분이 없어 교체를 해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 델카인이 검을 꽉 쥐었다. ***
“아인티아 공자가 검에 결함이 있는 걸 눈치챘다고?”
보좌관 비에고에게 소식을 전달받은 키네스는 내심 놀랐다. 변수를 없애기 위해 일부러 델카인의 검에 따로 수를 써두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흠이었다. 그런데도 눈치를 채다니 보통 눈썰미가 아니었다. 비에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런데도 기권을 하지 않고 참여할 모양인 것 같습니다.”
"신기하군. 믿고 있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글쎄요. 하지만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몬테리스 백작 영식을 이길 수 있을까요?”
문득 키네스의 머릿속에 일전에 아인티아의 악동들을 처음 본 순간이 떠올랐다. 아이답지 않게 섬뜩하게 빛나던 두 쌍의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했던 순간이.
‘아인티아 선대 공작 부부가 실종됐다는 소식에 애도를 표하러 공작저를 방문했던 날이었지.’
제 부모님이 실종됐음에도 불구하고, 쌍둥이들은 울기는커녕 초연했다.
‘하긴 그런 아이들이 나약하게 자랐을 일은 없겠군.’
키네스는 제 턱을 매만지며 홀로 중얼거렸다.
“몬테리스 백작 영식이 굉장한 실력자여야 할 텐데.”
“네?”
“아니야. 그나저나 아인티아 공작은? 경기가 시작했는데도 보이지가 않는군.”
“그렇지 않아도 마차를 대기해두는 곳에 아인티아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없다고 합니다.”
“이상하군.”
제 동생들만큼은 누구보다 아끼는 공작이 참석하지 않을 리는 없었다. 결국, 의도적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무슨 이유로 숨어 있는지는 몰라도.
‘어디에 숨어 있는 거지?’
키네스가 천천히 관람석을 훑어보던 때였다.
"우와아아!"
귀가 멍할 정도로 큰 함성소리에 키네스의 시선이 다시 경기장으로 향했다. 검은 반곱슬 머리를 질끈 묶은 작은 소녀가 손을 흔들며 방긋 웃고 있었다.
‘아인티아 공녀……?’
일순간 키네스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저기 있구나.”
아인티아 공녀의 시선 끝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있었다. 변장을 한 거겠지만, 오랫동안 그를 봐온 키네스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
불현듯 아인티아 공작을 지켜보던 키네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아인티아 공작의 옆에 공작보다 키가 한참 작은 사람이 서 있었다.
“누구지?”
서로를 마주보며 대화를 하는 걸 보아하니 친근한 사이로 보였다.
‘이런 곳에 아인티아 공작과 동행할 이가 있던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이유가 저기에 있을지도 몰랐다. 키네스는 비에고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인티아 공작의 옆에 있는 사람을 알아봐.”
*** 아이샤의 승리에 내 입가에 활짝 미소가 피어났다.
“봤어요?! 아이샤가 단 몇 초 만에 상대를 제압했어요!”
“상대가 약한데 저 정도는 기본-.”
“기본이 아니죠! 돌아오면 아이샤에게 꼭 칭찬을 한마디라도 해줘요.”
나는 라크하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이게 칭찬을 해 줄 일이라고?”
“네, 물론이죠!”
확고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라크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살을 찡그렸다.
‘아이샤가 칭찬에 목을 매는 이유를 알겠네.’
오빠라는 사람이 어쩜 이리 칭찬에 각박한지. 동생을 아끼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표현을 못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경기장을 가리켰다.
“지금 경기에서 아이샤가 못 했어요?”
“아니.”
“졌어요, 이겼어요?”
“이겼어.”
“봐요. 좋은 일만, 잘한 일만 가득하죠?”
내 질문에 기계적으로 답하던 라크하가 멈칫했다. 그런 라크하를 보며 나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럼 칭찬을 해 줘도 되는 거예요.”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걸까, 혹은 생각이 많아진 걸까. 라크하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머쓱해진 나는 볼을 긁적이며 다시 경기장 쪽을 바라보았다. 델카인이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아인티아 공자와 몬테리스 백작 영식이구만!”
“자네는 누가 이길 것 같나?”
“나는 몬테리스 백작가에 걸겠네!”
“아이고, 그 무섭기로 유명한 아인티아 공작에게 쥐도 새도 모를 새에 죽고 싶어서 그러나? 좋아! 같이 한 번 죽어보세! 나도 몬테리스 백작 영식이 이길 것 같네!”
이렇게 두 명의 남자가 이승에서 떠나가는 걸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라크하를 흘겨보았다. 전과 다를 게 없는 표정을 보아하니 다행히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델카인이 경기장으로 나온지도 모르는 것 같아 나는 라크하를 톡톡 건드렸다.
“이제 델카인이 나왔어요.”
“……아, 벌써 그렇게 됐나?”
라크하가 고개를 들어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여러 사람들의 기대를 받은 경기답게 이전까지 봐왔던 경기와 남달랐다. 델카인과 크레이는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격돌했다. 몇 번의 접전이 이어졌을까.
"그렇지!"
델카인의 큰 한 방에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델카인의 검을 막고 있는 크레이가 뒤로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면 델카인이 이길 거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델카인의 검이 왜 비틀린 것 같지?’
의아하게 델카인의 검을 바라보던 그때, 검과 손잡이가 분리되었다. 그러면서 크레이의 검은 그대로 델카인을 베어냈다.
“델카인……!”
촤악.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공중에 흩어지는 핏방울을 보며 나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