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내가 미쳤군2022.01.24.
연무장 밖에 일시적으로 세워진 천막. 비를 피하면서, 아이샤와 델카인의 대련을 지켜보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메이아는 은근히 기대에 찬 눈으로 쌍둥이들을 지켜보았다.
"대련 시작!"
파트라슈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아이샤가 델카인에게 도약하며 공격을 가했다. 탁! 목검이 맞물렸다. 힘으로는 아이샤가 우세한지 델카인이 점점 뒤로 밀리고 있었다.
‘이러다가 정말 아이샤가 이기겠는데?’
하지만 메이아의 추측은 금세 깨졌다. 끼기긱. 델카인의 검이 순식간에 아이샤의 검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자연스레 중심을 잃은 아이샤가 비틀거리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경기 판도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승부를 가늠하기 어려운 대련에 메이아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공작님은 누가 이기실 것 같으세요?”
“음…….”
라크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델카인과 아이샤를 살폈다. 체력이 좋은 아이샤와 달리 델카인은 몇 번의 격돌로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다. 델카인이 순발력과 민첩성이 좋아 몇 번 더 견뎌낼 순 있겠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아이샤가 이길 거다.”
“단기전은요?”
“잘 모르겠군. 둘 다 형편없어서.”
제 동생들에게 객관적으로 대련을 평가하는 라크하를 보며 메이아는 혀를 내둘렀다.
“지금도 시간을 허투루 쓰고 있지 않나. 내가 아이샤였다면 쉴 틈을 주지 않았을 거다.”
“아…….”
메이아가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아이샤가 델카인에게 목청을 높이며 무어라 하는 중이었다.
“야! 얍삽하게 머리 굴릴 생각하지 마!”
“말할 시간에 집중이나 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잘하거든?"
"그럼 덤벼."
델카인이 채 마르지 않은 빗물을 닦으며 검을 고쳐잡았다. 아이샤도 다시 대련에 집중하려는 듯 준비 자세를 취했다. 오늘의 대련은 어느 때보다 둘에게 중요했다.
'형수님이 보고 있어.'
'이번에야말로 언니한테 잘 보일 기회야.'
탓! 먼저 치고 들어온 건 델카인이었다. 델카인의 검이 정확히 중앙을 찌르며 들어갔으나 아이샤에게 쉽게 막혔다.
"야, 야! 덤비라더니 네가 들어오냐!"
아이샤가 억울한 듯 소리쳐도 델카인은 대꾸 없이 곧바로 다음 공격을 이어갔다. 여러 번의 공방이 벌어졌다. 아이샤는 방심한 듯하면서도 정확하게 델카인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델카인이 좀 더 힘을 실어 검을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아이샤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이건 내 승리야.'
아이샤가 이번엔 검을 밀어내듯 막아냈다. 분명, 강한 힘을 실은 탓에 중심을 잃으리라. 아이샤의 예상대로 델카인의 몸이 갸우뚱 기울어졌다. 하지만, 델카인은 웃고 있었다.
"어라……?"
아이샤가 이상함을 감지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넘어지는 것처럼 보였던 델카인이 그대로 아이샤의 발을 건 것이었다. 우당탕. 넘어진 아이샤의 몸 위로 우두커니 선 델카인이 검을 겨누었다.
"델카인 승!"
승자는 델카인이었다.
*** 대련이 끝나고, 아이샤는 내 곁으로 달려와 조잘거렸다.
"언니, 오늘은 내가 비가 와서 진 거야. 어디 봐, 내가 검술 대회에서는 꼭 이길 테니까!"
의지를 다잡는 아이샤를 보며 델카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뭐해. 형수님은 네가 이기는지 모를 텐데."
"왜 몰라!"
"형수님은 검술 대회에 안 오잖아."
"뭐……?"
아이샤가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돌아보았다. 아이샤에게는 미안하지만, 델카인의 말대로였다.
"응, 아이샤. 나는 아마도 못 갈 것 같아."
달그락. 아이샤는 하늘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들고 있던 목검을 떨궜다.
"나 안 해……."
"아이샤?"
"갑자기 검술 대회에 참여하기 싫어졌어."
아이샤의 돌발 행동에 나는 라크하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아이샤는 내가 라크하의 눈치를 본다고 생각했던 걸까. 눈을 번뜩인 아이샤가 라크하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오빠! 언니도 같이 가면 안 돼? 내 소원이야!"
"아무리 부탁해도 사제는 같이 못 가니 괜한 희망을 갖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왜, 왜 안 되는데!"
“계획된 일이 아니니까.”
“그런 게 어딨어!”
라크하가 단호한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갔다.
‘검술 대회 같은 큰 행사에 황제 키네스가 참여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만약 그런 곳에서 눈에 띈다면 그대로 나는 잡혀갈 게 뻔했다. 라크하가 우려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라크하와 말이 통하지 않자 아이샤는 나에게 물었다.
"언니, 언니는 검술 대회에 가고 싶잖아, 그치?"
"그렇긴 한데…… 미안해, 아이샤. 멀리서만 응원할게."
나는 아이샤의 목검을 주워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이샤는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툭 떨궜다.
“언니, 미워…….”
그 모습이 무척 처량해 보여 눈에 밟혔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 *** 그날 저녁, 델카인은 따로 아이샤를 찾아갔다.
"아이샤."
"……."
델카인의 부름에도 아이샤는 별 반응 없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짜증은 나지만, 깔끔한 패배에 할 말이 없었다.
"쓸데없는 말 할 거면 그냥 가."
"나한테 형수님을 데리고 갈 방법이 있다고 해도?"
"뭐?"
고개를 번쩍 든 아이샤가 베개를 끌어안고 벌떡 일어났다. 델카인이 아무 근거 없이 어떤 방법을 제시할 위인은 아니었다. 아이샤는 눈을 반짝이며 델카인을 바라보았다.
"뭔데? 뭔데!"
"나한테 소원권이 하나 있거든."
"왜 너만 그런 게 있는…… 게 아니라-."
질투심에 눈이 멀어 험한 말을 할 뻔한 아이샤는 겨우 감정을 억눌렀다.
"후, 그걸로 언니를 데리고 가겠다는 거지?"
"글쎄."
델카인이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에게 원하는 게 있구나. 본능적으로 깨달은 아이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뭘 원하는데."
"내가 원할 때 딱 한 번, 불만 갖지 말고 협조해."
"좋아!"
그 정도쯤이야. 단순하게 생각한 아이샤가 고개를 세차게 주억거렸다.
“꼭 언니가 검술 대회에 따라오게 해주기야!”
“물론이지.”
손을 맞잡은 아이샤와 델카인은 서로 다른 목적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 아이샤와 델카인이 계략을 꿈꾸고 있던 그 시각. 메이아는 깊디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아이샤가 엄청 속상해하는 것 같던데.'
계속해서 축 처져 있던 아이샤의 어깨가 아른거렸다.
'이틀 뒤에 검술 대회라고 했었지?'
아이샤가 검술 대회에 참여하기 싫다는 식으로 말했으나, 욱해서 한 말 같았다. 그 뒤로 더 고집을 부리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일정표엔 검술 수업이 없더라도 내일 검술 연습을 할 게 틀림없었다.
'목이 마를 테니까, 주스라도 만들어서 가 볼까?'
나름 좋은 생각이었다. 따라가서 응원을 해주지 못한다면, 그전에라도 기운을 북돋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좋아. 주스를 만들어 주는 거야!'
메이아는 의지 넘치게 방문을 열고 나가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분 뒤. 메이아의 방을 찾아온 라크하는 얼이 빠졌다. 주인도 없는 방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대체 지금 시간에 어딜 간 거지?'
저녁 9시.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딜 돌아다닐 만한 시간도 아니었다.
‘누가 방에 침입한 흔적은 없는데.’
라크하는 지나가던 하녀를 잡고 물었다.
"사제, 아니 시터는?"
"시터님이요? 아, 주방으로 가시는 걸 보긴 했어요."
"주방에?"
"네, 아마도 거기에 계실 거예요."
이 시간에 주방엔 왜 간 거지? 그저 따로 볼일이 있겠거니, 하고 메이아의 방에서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라크하의 발걸음은 주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라크하가 주방 앞에 선 그때, 안에서 메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요?”
“소풍을 가셨던 날 만들었던 게 이거였습니까? 그땐 바빠서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이렇게 대단한 걸 만들고 계셨다니요!"
“와, 제 취향에도 딱 맞습니다!”
메이아가 주방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라크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가만히 안을 지켜보았다. 굉장히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주방장님, 아이샤가 좋아할 것 같나요? 사실 그날 일이 좀 꼬여서 못 먹여 봤거든요.”
“네! 당근을 물에 데쳐서 당근 향은 덜 나면서 사과 향은 진한 걸 보니, 어쩌면 아가씨도 좋아할지도 모르겠는데요? 대단합니다, 시터님!”
“별거 아닌데요, 뭘.”
주방장의 칭찬에 메이아가 두 볼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푸른 눈동자가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별안간 진득하고 꺼림칙한 감정이 라크하를 옭아맸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는 건지.'
제 앞에서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얼굴이었다. 라크하는 저도 모르게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뭣들 하는 거지?”
라크하의 싸늘한 음성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의 등장을 가장 먼저 알아챈 건 메이아였다.
“공작님……?”
“헉, 공작님!”
“고, 공작님! 아, 안녕하십니까!”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주방은 혼비백산이 되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라크하가 주방으로 들어온 적은 없었다. 라크하는 단걸음에 걸어가 은근슬쩍 주방장과 메이아 사이에 끼어들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아…… 내일 아이샤에게 줄 야채 주스를 미리 만들고 있었어요. 내일 만들 시간은 따로 없을 것 같아서요.”
“이런 걸 그대가 왜 하는지 모르겠군. 다른 이들의 업무일 텐데.”
라크하의 얼음장 같은 시선에 주방 식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아슬아슬한 위기 상황이었다. 위급한 상황만큼은 누구보다 잘 파악하는 메이아는 빠르게 대처했다.
“제가 직접 준비하고 싶다고 졸랐어요.”
라크하는 눈살을 살짝 구겼다.
‘뭐든 열심히 하는 성격인 건가?’
메이아가 제 동생을 진심으로 신경 쓰고 아낀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누구든 제 동생들을 꺼려했으니까.
“굳이 그대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시터로서 해야 할 업무만 하면 되는 것을.”
“그렇긴 한데…… 오늘 우울해하던 아이샤가 계속 마음에 걸려서요.”
하지만 메이아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깼다.
"그리고 업무를 떠나서 이건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에요."
거짓 하나 없어 보이는 얼굴에 라크하는 문득 혼란스러웠다. 제 동생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건 분명 저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고……?”
“네."
"……."
갑자기 말이 없어진 라크하를 보며 메이아는 서둘러 주스를 챙기려고 했다. 이러다 갑자기 라크하가 주방에서 나가라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게 웬걸, 병이 하나 부족했다.
“어라, 나머지 하나가 어디 갔지?”
“테이블 위가 복잡하길래 불편하실까 봐 제가 따로 빼놨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주방장님.”
역시 친절하시다니까. 주방장이 챙겨준 병을 받은 메이아가 활짝 웃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라크하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고는 제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뭐지?’
이상하게도 속이 뒤틀렸다. 라크하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 메이아와 주방장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음…… 주스가 조금 남았네요. 주방장님께서 드실래요?”
“저야 좋죠. 감사합니다. 시터님.”
메이아가 주방장에게 남은 주스를 건네주려던 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커다란 손이 주스를 채갔다.
“?”
“이건 내가 마시지.”
주스를 채간 범인은 라크하였다. 라크하의 돌발 행동에 메이아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 그건 주방장님께 드리려고 했던 건데…….”
메이아가 말을 채 끝맺기 전에 라크하는 그대로 주스를 한 번에 쭉 들이켰다.
“나쁘지 않군.”
라크하의 기준에선 최고로 맛있다는 말이었다. 이를 잘 아는 주방식구들은 하나같이 입을 쩍 벌렸다. 그 모습에 라크하가 낮게 경고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걸 보아하니 다들 여유로운가 보지?”
“아, 아닙니다!”
“이, 이제 막 주방 정리를 하려고 했습니다!”
메이아가 짐짓 당황한 얼굴로 라크하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낮에 봤을 때와 달리 신경이 바짝 서 있었다.
‘달달한 걸 드시면 조금 괜찮지 않을까?’
메이아는 꿀을 한 스푼을 떠 미리 주스를 담아둔 병에 타 라크하에게 내밀었다.
“제 것도 드실래요? 어차피 저는 내일 안 마셔도 상관없거든요. 꿀을 타서 달달하니 기분도 한결 괜찮아지실 거예요.”
“…….”
눈앞에 들이밀어진 영롱한 주황빛 주스에 라크하는 멈칫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충격에 빠졌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한 거지?’
난데없이 주방에 들어와 훼방을 놓질 않나. 주방장에게 주려던 주스를 뺏어 먹질 않나. 모두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내가 미쳤군.’
의식할 새도 없이 저지른 행포였다.
"공작님?"
“……치워.”
라크하는 그대로 몸을 돌려 황급히 주방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메이아가 주스를 든 채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매정하게 거절을 당할 줄이야.
“맛이 별로였나 보네…….”
라크하의 입맛에 맞지 않는데, 아이샤의 입맛에는 어림도 없을 게 뻔했다. 선물은 무슨, 그냥 주방 식구들한테 나눠줘야겠다. 메이아가 울적하게 선물 작전을 포기하고 있는 동안, 주방 식구들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 살면서 이런 경사를 보게 될 줄이야.’
공작님은 한평생 여자에 관심이 없었다. 평생 쌍둥이들만 끼고 독신으로 살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하지만 어쩌면 공작님께 간질거리는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