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잠을 재울 수 있는 여인2022.01.21.
소풍을 갔던 날은 엄연히 내 휴일이었다. 쌍둥이들의 수업이 없는 날에는 공식적으로 쉬어도 된다는 지침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놀기는커녕 긴장한 채 바쁘게 뛰어다닌 탓일까.
“피곤해…….”
테이블 위로 엎어진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일정표대로라면 오늘은 검술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검술 수업은 일전에 시롬에게 연무장에서 한다고 얼핏 들었다.
“하필 야외 수업이라니…….”
오늘만큼은 실내에서 푹 쉬고 싶은데. 무리하게 뛰어다닌 탓에 온몸이 쿡쿡 쑤셨다.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며 쿠키를 우물우물 씹고 있는데, 리타가 찾아왔다. 아침에 줬던 쿠키 접시를 치우러 온 듯했다.
“시터님 왜 그렇게 축 처져 있으세요? 방도 어두침침하고.”
“움직일 힘이 없어서요. 어제 너무 무리를 했나 봐요.”
“그래도 계속 늘어져 계시면, 우울해지기까지 할 거예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방에 있을수록 몸이 축축 처지고 있긴 했으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죠? 환기라도 해야겠어요.”
“앉아계세요. 제가 대신 해 드릴게요.”
리타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 방 커튼을 확 젖히고 창문까지 열던 때였다. 우르릉, 하늘에서 천둥이 치더니 비가 쏟아져 내렸다.
“……어머.”
외마디 탄성을 터트린 리타가 어색하게 웃으며 창문을 닫았다.
“방금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날씨가 왜 이런담.”
“신은 제 편이 아닌가 봐요.”
그렇게 신세한탄을 하고 있자니, 테리투스가 떠올랐다.
‘왜 아직까지 안 오는 거지?’
생각보다 성물을 가져오는 게 오래 걸리는 것 같다. 물론, 라크하가 의자에 앉아 자서 큰 문제는 없긴 하지만 괜히 불안했다.
‘이러다 안 가져다주는 건 아니겠지?’
멍하니 창문을 두들기며 내리는 비를 보며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때였다. 나를 따라 밖을 지켜보던 리타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와도 이틀 뒤면 검술 대회가 열리니 검술 수업을 진행하겠네요.”
“검술 대회요?”
“네, 2년에 한 번 있는 큰 행사예요.”
그렇게 큰 행사인데, 왜 원작 속에서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지?
‘아직 레이나와 키네스가 만나기 전이라서 그런 건가?’
그렇다면 말이 됐다. 메이아에게 첫 번째 축복을 받은 얘기도 키네스의 과거로 잠시 등장하는 거니까.
‘어떻게 보면 아직 원작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겠구나.’
나름 좋은 소식이었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건 원작이 시작되고 난 뒤에 일어나는 일들이니까.
‘이왕이면 4달 뒤에 원작이 시작됐으면 좋겠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 바보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리타는 그런 내가 걱정이 됐나 보다.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세요, 시터님? 아가씨와 도련님을 연무장까지 데려다주신 뒤에 돌아와서 쉬시는 게 어때요?”
나는 웃음을 거두며 헛기침을 한 뒤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쉴 순 없죠.”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쉴 생각이라니. 주 5일 내내 쉬지 않고 일하던 한국인으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 나는 1500케르크를 받고 일하는 시터라고.’
바로, 고임금 시터! 돈 생각을 하니 일할 의욕이 물씬 끓어올랐다.
“열심히 일해야…… 으윽.”
의지를 다잡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나는 바로 테이블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 근육통 때문이었다.
“시, 시터님?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아무래도 공작님께 말씀을 드리고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를 걱정하는 리타에게 손을 내저었다.
“아뇨, 쉴 순 없죠.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네? 누가 시터님께 그런 가학적인 말을 누가 한 거예요? 아프면 환자죠!”
리타…… 농담한 거지? 하지만 리타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네요. 고통을 정당화하다니.”
“그, 그러게 말이에요. 저는 이만 다녀올게요.”
알 수 없는 정의감과 분노에 휩싸인 리타를 보며 나는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 연무장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일찍 왔군.”
라크하가 여기에 와 있을 줄이야. 하마터면 들고 있던 우산을 떨어트릴 뻔했다. 쌍둥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라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 어쩐 일이야?”
“검술대회가 곧 있으니 확인 차 왔다. 오늘 대련을 한다고 들었는데.”
대련? 처음 듣는 소식에 나는 놀라 둘을 바라보았다.
“델카인이랑 아이샤가 대련을 한다고요?”
“응, 언니! 오늘 내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을 거야! 내가 델카인을 발라버릴 거거든!”
“뭐래. 네가 이길 줄 아나 봐?”
아이샤의 말에 델카인이 코웃음쳤다. 발끈할 줄 알았던 아이샤는 오히려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해보면 알겠지.”
아이샤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다니. 처음 보는 아이샤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둘 다 그만하고, 연무장으로 가지.”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선 라크하가 쌍둥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아직 비가 내리는 밖을 보며 나는 걱정스레 물었다.
“비가 오는데 괜찮을까요? 애들이 감기 걸릴 수도 있잖아요.”
“그런 걱정은 말도록. 대련만 하고 끝낼 예정이니까.”
그럼 다행이긴 한데…….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얘들아, 대련하기 전에 우산이라도 쓰는 게 어때?”
“어차피 젖을 건데, 뭐!”
“형수님, 걱정 마. 우린 감기 같은 거 안 걸려.”
뭐가 좋은 건지 쌍둥이들은 비를 맞으면서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러곤 좋은 목검을 서로 채가겠다며 어디론가 뛰어갔다.
“괜찮으려나…….”
“나는 쌍둥이들보다 그대가 더 걱정이 되는군.”
“제가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라크하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라크하의 커다란 손이 이마 위를 덮으며 시야가 반쯤 가려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것도 잠시, 밀어내려고 자칫 잘못 손을 댔다가 무슨 사고가 벌어질지 모르기에 나는 소리만 버럭 질렀다.
“뭐, 뭐예요!”
당황한 나와 달리 차분한 라크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열은 안 나는데."
"……열이요?"
"하녀가 그러더군. 그대가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다고."
내가 쌍둥이들을 데리러 간 사이에 리타가 라크하에게 일렀구나. 손을 거둔 라크하가 턱을 짚은 채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어디 아픈 거라면 말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그런 상태에서 비도 오는데 돌아다녀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
"그냥 근육통이 있을 뿐이에요."
"갑자기 근육통이 왜 있지?"
"어제 너무 뛰어다녔나 봐요."
"아."
작게 탄성을 터트린 라크하가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큰일이군. 이리 허약해서야."
그쪽 핏줄들이 괴물 같은 체력의 소유자들이 아닐까? 그 말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억눌렀다. 다행히 때마침, 아이샤가 우리를 불렀다.
"오빠, 언니! 파트라슈가 이제 대련한대!"
"……파트라슈?"
순간 귀여운 개를 떠올린 나는 아이샤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생각과 정반대였다. 쌍둥이들의 등 뒤로 덩치가 우람하고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남자가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라크하를 돌아봤다.
"저분이……."
"그래, 검술 교육 담당, 파트라슈 파블로프 단장이다."
시롬의 이름 이후로 두 번째 웃음 폭탄 위기가 찾아왔다. 나는 겨우 웃음을 삼키며 우산을 폈다.
"흐, 흐흥. 가, 가죠."
"그 이상한 소리는 뭐지?"
"전 아무 소리도 안 냈는걸요."
시치미를 뚝 떼자, 라크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래, 가지."
"우산은 안 쓰세요?"
"금방 그칠 줄 알고 두고 왔군."
은근히 조금씩 부족한 면이 있네. 나는 라크하 쪽으로 우산을 살짝 기울였다.
“그럼 저랑 같이 쓰실래요?”
마침 내가 들고 있는 우산은 컸다. 오는 길에 하녀들에게 큰 우산을 빌려달라고 부탁한 덕분이었다. 물론, 쌍둥이들이 아닌 라크하와 함께 쓸 줄은 몰랐지만.
"……."
그런데, 왜 그렇게 멍하니 쳐다본담. 돌처럼 굳어 있는 라크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같이 쓰기 싫은 건가?’
그런 거라면 충분히 나올 만한 반응이었다.
"싫으신 거라면, 그냥 저 혼자 쓸게요."
“……같이 쓰지.”
기울였던 우산을 거두려는 순간, 라크하가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내가 든 우산 높이가 라크하의 키에 비해 너무 낮았던 걸까.
“윽.”
우산 끝에 머리를 찔린 라크하가 짧게 신음을 흘리며 살짝 물러났다.
“괘, 괜찮으세요?”
깜짝 놀란 나는 무심코 라크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또 우산 끝으로 찔러버렸다.
“헉, 죄송해요……!”
의도치 않은 공격에 후다닥 물러나려던 찰나.
“!”
라크하가 내가 들고 있는 우산을 거칠게 뺏어들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
별안간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투둑, 투두둑. 오로지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만이 적막을 메웠다. 조금 뒤 내 팔을 놓은 그가 신경질적으로 제 앞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세게 잡은 건…… 미안하다.”
라크하의 사과에 그제야 나는 그가 잡았던 팔목이 붉다는 걸 알아챘다. 나는 슬쩍 옷소매를 내린 뒤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어차피 아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 팔목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쥐가 파먹은 듯 이리저리 불규칙적으로 솟구쳐 있는 라크하의 뒤통수였다. 열심히 우산 끝에 찔린 흔적이었다.
‘더 늦기 전에 말해주자.’
라크하에게 알려주려던 그때였다. 바짝 날이 선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둘 다 안 오고 뭐 하는 거야!”
잔뜩 성이 난 아이샤가 우리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내가 아까부터 불렀…….”
아이샤가 투덜대며 우리 앞에 멈춰 선 순간이었다.
“푸흡.”
통통한 볼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더니 아이샤는 이내 배를 잡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오빠, 머리가 그게 뭐야! 쥐가 파먹었어?”
나는 라크하가 무어라하기 전에 빠르게 이실직고했다.
“하하, 먼저 말해주려고 했는데…… 늦어버렸네요?”
어쩐지 원망이 섞인 듯한 눈빛에 나는 슬쩍 눈을 피했다. 정말이야. 난 말해주려고 했다고. *** 제르디아 제국의 황궁. 줄곧 황제 키네스의 곁에서 그를 보좌하던 비에고가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이번 검술 대회 지원자 명단을 보셨습니까?”
“아직.”
키네스는 눈가를 꾹 누르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지원자 명단을 볼 여유는 없었다. 더 신경을 쏟아야 할 건 따로 있었다. 따로 보관해 두었던 샤키르의 꽃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샤키르의 꽃이 개화하지 않을뿐더러 설상가상으로 신의 딸까지 사라질 줄이야. 키네스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폐하…….”
날이 갈수록 키네스는 초조해지고 있었다. 점점 희망을 잃어가는 듯한 얼굴에 비에고도 마음이 착잡했다. 그래서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며 정보를 구하러 다녔다. 그 결과, 키네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긴 했다. 비에고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이지?”
“확실해지면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최근에 잠을 재울 수 있는 여인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잠을…… 재울 수 있는 여인?”
비에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인티아 공작도 그 정보를 입수했다는 소식이 있으니, 거짓 소문은 아닐 것 같습니다.”
어둡던 키네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인티아 공작까지 나섰다면, 비에고의 말대로 헛소문일 가능성은 무척 낮았다. 그는 절대로 의미 없는 일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니까.
“혹시 그 여인이 성녀는 아니겠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더 조사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래도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식이야. 이제야 조금 다른 것도 신경 쓸 정신이 드는구나.”
키네스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비에고가 내려놨던 서류를 살폈다. 명단에 적힌 이름들을 확인한 그는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이런, 어느새 아인티아의 악동들도 검술 대회에 참여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됐나?”
“예, 공식 석상에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겠지요.”
“검술 대회를 통해 작위를 얻어 볼 생각이겠지? 언제까지 공작의 보호 아래 있을 순 없을 테니.”
흐음. 목을 울리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쭉 훑던 키네스는 어느 이름 앞에서 멈칫했다. 키네스가 짚은 이름을 흘겨본 비에고가 신상을 읊었다.
“크레이 몬테리스. 몬테리스 백작가의 장자입니다. 이번 우승 후보로 지목받고 있긴 한데…… 항간에는 사이코라고도 알려져 있더군요.”
“우승 후보라…….”
턱을 괸 채 고민하던 키네스가 ‘델카인 아인티아’라고 적혀 있는 이름을 가리켰다.
“몬테리스 영식을 아인티아 공자와 토너먼트에서 첫 번째로 붙게 하는 건 어떤가?”
“……예?”
비에고는 멍하게 키네스를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키네스가 검술 대회의 토너먼트 상대를 짤 때 개입한 적은 없었다.
“이번에 오두막집에서 당한 기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니 아인티아 공작과 쌍둥이들이 떠오르던데.”
“하지만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수를 써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유일하게 아인티아 공자는 흑마법을 못 쓰니까…….”
키네스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비에고에게 서류 뭉치를 건넸다.
“개인적으로는 아인티아 공자가 영원히 아인티아의 그늘 속에 남았으면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