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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대로도 좋아서 (23/136)

23. 이대로도 좋아서202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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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식인 꽃 괴물로 인해 땅이 울렸다. 어찌나 재빠른지 커다란 덩치로도 울창한 나무 사이를 날렵하게 통과하며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16548699983456.png“언니! 나 잘 달려? 빠르지?"

이토록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아이샤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저 똥강아지 입을 막아줄 사람 어디 없을까.

16548699983463.png"조용히 해."

내 손을 잡고 달리던 델카인이 나 대신 아이샤를 향해 경고했다. 아이샤는 코웃음을 치더니 델카인을 보며 혀를 쏙 내밀었다.

16548699983456.png"너한테 물은 거 아니거든."

16548699983463.png"너……."

아이샤의 도발에 맞잡고 있던 델카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냥 뒀다간 상황이 더 심각해질 게 뻔했다.

16548699983484.png"와, 아이샤 엄청 빠르네!"

16548699983456.png"정말?"

나보다 앞서 달리던 아이샤가 속도를 늦추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곤, 주섬주섬 손을 바삐 움직였다.

16548699983484.png'갑자기 왜 목에 걸린 주머니를 뒤져?'

저 주머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16548699983456.png"그럼 칭찬 도장 줘!"

이 똥강아지가 정말. 안 그래도 달리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아이샤의 손에 들린 종이와 펜을 보며 나는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16548699983484.png‘사실은 이 모든 게 칭찬 도장을 받으려고 했던 아이샤의 큰 그림이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16548699983484.png"아이샤,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16548699983456.png"왜에! 지금 얘기해!"

아아,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아이샤가 무어라 하든 말든, 귀를 닫고 꿋꿋이 달렸다. 달리면서 대화를 몇 마디 주고받았다고, 숨이 금세 차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멀리서 키가 훤칠한 남자가 보였다.

16548699983484.png'……라크하?'

라크하가 핑크색 바구니를 든 채 살벌한 눈으로 우리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16548699983463.png"형!"

델카인의 부름에도 라크하의 무시무시한 기세는 줄지 않았다. 설마, 화났나? 우리가 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괴물을 끌고 왔으니 화난 건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16548699983484.png"공작님!!!! 도망쳐요!!"

내 외침에도 불구하고 라크하는 도망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참 지지리도 말을 안 듣지!

16548699983484.png"뭐 하시는 거예요!"

나는 라크하를 잡아당겼다. 다행히 그는 내가 끌어당기는 대로 따라주었다.

16548699983484.png"죽기 싫으면 최선을 다해 달려요!"

나에게 잡힌 뒤로 멍한 얼굴을 한 채 따라 달리던 라크하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16548699983484.png"……웃음이 나와요? 지금 달리는 길이 황천길이 될 수도 있는데?"

옆에 호수는 요단강이고.

16548700018883.png"안 죽어. 고작 저딴 거에 죽을 리가 없잖아."

16548699983484.png"그럼 저것 좀 어떻게 해 봐요!"

16548700018883.png"일단 달리도록 하지. 이대로도 좋아서."

대체 뭐가 좋은 건데? 라크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나는 체력을 아끼는 걸 선택했다. 이미 아이샤와 실랑이를 벌인 뒤라 숨이 찼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이 생겼다. 아이샤가 나와 라크하 사이에 끼어들었다.

16548699983456.png"비켜! 내가 잡을 거야."

16548700018883.png“아이샤, 나와 메이아의 사이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도록.”

16548699983456.png“오빠랑 언니가 무슨 사이라고 함부로 끼어들면 안 되는 건데!”

16548700018883.png“아주 각별한 사이지.”

또 뭐라는 거야. 얼마 전에는 손을 잡아도 괜찮더니 오늘은 아닌가 보다. 라크하의 헛소리에 정신까지 피로해지는 기분이었다.

16548699983456.png"뭐래! 아직 결혼도 안 했잖아!"

16548700018883.png"그래도 델카인은 꼬박꼬박 형수님이라고 부르지 않느냐."

16548699983463.png"맞아. 형수님이지."

16548699983456.png“악! 짜증 나!”

세 사람은 지치지도 않아? 어떻게 달리면서 여유롭게 대화를 주고받는 건지. 기이할 지경이었다. 그들에 비해 점차 내 체력은 한계가 오고 있었다. 내 속도가 점점 늦어지자, 함께 달리던 라크하가 나를 돌아보았다.

16548700018883.png"힘든가?"

16548699983484.png"헉헉…… 죽을 것…… 같아요."

힘든 걸 넘어서서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다. 애석하게도 라크하는 그제야 무언가를 제대로 해 볼 생각이 들었나 보다.

16548700018883.png“그대가 죽게 둘 순 없지. 자, 들어 봐.”

라크하가 내 손을 놓더니 핑크색 바구니를 쥐여 주었다.

16548699983484.png"네네……."

핑크색 바구니를 받은 나는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그러자 쌍둥이들이 내 주변을 둘러쌌다.

16548699983463.png"형수님, 괜찮아?"

16548699983456.png"언니! 그렇게 체력이 약해서 어떡해!"

16548699983484.png"머리가 울려서 그런데, 잠시만 조용히……."

나는 내게 다가오는 쌍둥이들을 향해 손을 내젓다가 순간 번뜩 떠오른 생각에 얼음처럼 굳었다.

16548699983484.png“말도 안 돼…….”

방금 라크하가 내 손을 스스로 놓은 거지? 접촉으로 인해 이성을 잃는다면, 분명 그는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야만 했다. 나는 허리를 벌떡 세워 뒤를 돌아보았다. 라크하가 식인 꽃 괴물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16548699983484.png‘정말 이제 손을 잡는 것 정도는 괜찮은 거야?’

하지만 각별한 사이니 뭐니 헛소리를 하긴 했는데……. 생각이 복잡한 나와 달리 라크하는 태연하게 아이샤를 불렀다.

16548700018883.png“아이샤.”

16548699983456.png“부른다고 내가 오빠한테 갈 것 같아? 나는 언니랑 있을 거거든?”

16548700018883.png“그토록 원하던 흑마법을 알려주려고 했더니만. 싫다면 어쩔 수 없지.”

16548699983456.png“흑마법?!”

내 옆에 있던 아이샤는 신난 듯 폴짝거리며 라크하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16548699983456.png“어쩐 일이래? 맨날 알려달라고 해도 알려주지 않더니!”

16548700018883.png“마물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16548699983456.png“좋아! 빨리 알려줘!”

관계 개선하기는 성공인 것 같으나, 여유로워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속이 타들어갔다.

16548699983484.png‘빨리 처치하라고!’

기껏 거리를 벌렸는데, 어느새 마물과 거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16548700018883.png“불을 만들려면 마력을 응축시켜 폭발시킨다고 생각하면 된다.”

16548699983456.png“보여줘!”

16548700018883.png“딱 한 번만 보여줄 테니 잘 보거라.”

라크하가 식인 꽃 괴물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 검은 오라가 솟구치더니 식인 꽃을 향해 쇄도했다. 쾅! 폭발이 일어나더니 화르륵, 식인 꽃의 몸에 불이 붙었다. 그와 동시에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마물의 비명이 귀를 할퀴었다.

16548699983484.png"윽!"

다행히 비명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라크하가 주먹을 말아 쥐자, 불길이 멎어들며 형체가 가루로 흩어졌다. 이윽고 적막한 공간을 가득 채운 건 아이샤의 감탄사였다.

16548699983456.png"와! 대박! 오빠, 짱이야!"

잔뜩 신이 난 아이샤는 발까지 동동 굴렀다. 서로 잡아먹을 듯이 굴 때는 언제고. 나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를 바라보고 있던 때였다. 줄곧 곁에 있던 델카인이 내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16548699983463.png"형수님은 괜찮아?"

16548699983484.png"응, 괜찮고말고."

16548699983463.png"놀라진 않았어?"

델카인은 괴물 꽃이 사라지는 모습에 내가 충격을 받진 않았을까, 염려하는 듯했다. 하지만 크기만 컸지 일반적인 꽃이 타는 모습과 크게 다를 점은 없었다.

16548699983484.png“그냥 소리 때문에 살짝 놀랐을 뿐이야.”

16548699983456.png"뭐? 언니가 놀랐다고?"

16548700018883.png"사제, 괜찮나?"

라크하와 아이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나 보다.

16548699983456.png“오빠가 흑마법을 너무 요란하게 써서 언니가 놀랐다잖아.”

16548700018883.png“그게 무슨 소리지? 라펜데스 비명 소리에 놀란 거겠지.”

16548699983456.png“하긴, 그렇겠다. 오빠! 라벤더인가 뭔가 그거 씨를 말려버리자!”

16548700018883.png“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

이렇게 쿵짝이 잘 맞으면서 왜 며칠간 냉전 상태였던 거람. 반쯤 질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다시 라크하가 나를 돌아보았다.

16548700018883.png“사제는 동의하나?”

16548699983484.png“상관없어요…….”

16548699983456.png“언니! 상관없다니, 이런 기회가 없다고! 우리를 괴롭혔던 건 멸종시켜야 해!”

아이샤가 눈을 반짝거리며 의지에 찬 얼굴로 외쳤다.

16548699983484.png‘그냥 알아서 했으면 좋겠다…….’

갑자기 놀라서 죽기 살기로 달렸던 탓인지 정신이 금세 피로해졌다. 다행히 내 상태를 빠르게 눈치챈 델카인이 아이샤를 불렀다.

16548699983463.png“아이샤, 저쪽에 또 신기한 꽃이 있던데 가볼래?”

16548699983456.png“진짜? 가보자!”

호기심이 많은 아이샤는 금세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다. 그리고 델카인과 함께 순순히 다른 곳으로 향했다.

16548699983484.png“하아.”

늘어져라 한숨을 내쉬자, 라크하가 조심스레 물었다.

16548700018883.png“피곤한가?”

16548699983484.png“네, 너무 뛰어다녀서 그런가 봐요.”

16548700018883.png"그걸 먹으면서 마음을 달래도록 해."

라크하가 핑크색 바구니를 가리켰다.

16548699983484.png‘응? 바구니는 텅 비었을 텐데?’

나는 고개를 숙여 내가 들고 있는 바구니 안을 바라보았다. 노란색의 작은 열매가 들어 있었다.

16548699983484.png“……이게 뭐예요?”

16548700018883.png“이름은 몰라.”

안 그래도 색깔이 이상해서 불안한데, 이름도 모른다고?

16548699983484.png‘독이라도 들어 있는 거 아니야?’

먹지 않고 머뭇거리자, 라크하가 한 움큼 열매를 집어 개중 하나를 내밀었다.

16548700018883.png"먹어 봐."

눈앞에 들이 밀어진 열매를 보니 입안이 바싹 말랐다.

16548699983484.png"좀…… 이상한데요."

16548700018883.png"뭐가 이상하지? 여기서만 구할 수 있는 귀한 것인데."

그러면 더 먹기 싫은데……. 흑마법의 기원지인지 뭔지 하는 곳에만 나는 거라니. 이곳에 있는 것들이 정상적인 게 없다는 걸 몸소 느낀 탓에 뭐든지 꺼려졌다.

16548699983484.png“독이 없는 거 맞아요?”

내 질문에 라크하가 눈썹을 들썩이더니 제 입에 열매를 하나 넣었다. 미친 거 아니야? 독이 들었으면 어쩌려고!

16548699983484.png"뱉어요! 독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황급히 라크하에게 손을 뻗었는데, 그가 손쉽게 내 손을 막았다.

16548699983484.png"뭔지 확실히 알지도 못 하면서 먹으면…… 아."

별안간 입안에 낯선 물체가 들어왔다. 황급히 뱉으려던 나는 이내 입안에 가득 퍼지는 달콤한 맛에 입을 꾹 다물었다.

16548699983484.png“……맛있네?”

방금 전까지 난동을 피운 내가 민망할 정도로 달달하니 맛있었다.

16548700018883.png"역시 단 걸 좋아하나 보군."

16548699983484.png"공작님께서 제가 단 걸 좋아하는지 어떻게 아세요?"

아직 내 스스로도 메이아의 몸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잘 모르는데. 얼떨떨해하는 나를 보며 라크하가 살짝 미소 지었다.

16548700018883.png“모를 수가 있어야지.”

16548699983484.png“네?”

16548700018883.png"그 쿠키를 남김없이 먹었다던데, 어떻게 모르겠나?"

순간 리타가 사랑의 쿠키라며 야단법석을 떨던 일이 떠오르자, 얼굴에 열이 올랐다.

16548699983484.png"아까워서 다 먹은 거예요."

16548700018883.png"상습적인 거짓말은 좋지 않아. 사제."

라크하가 눈을 접어 웃더니, 내 이마를 가볍게 톡 건드렸다. 그러곤 내 손에 나머지 남은 열매를 쥐여 주곤 나를 스쳐 지나갔다.

16548700018883.png"아이샤, 델카인! 그 나무는 건들지 말고!"

아, 애들이 또 사고를 치려고 했구나. 내 손에 쥐어진 노란 열매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 알 집어 입에 넣었다.

16548699983484.png'더럽게 맛있네.'

또, 기가 막히게 정말 맛이 내 취향에 맞았다.

16548699983484.png'내가 이런 맛을 좋아하는구나.'

다른 사람을 통해 내 취향을 확인하는 기분은 묘했다. ***

16548699983484.png"애들은 뻗었네요."

16548700018883.png"한참을 뛰어 놀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아이샤와 델카인은 잠을 잘도 잤다. 소풍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준비했던 도시락도 다 버렸고,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16548699983484.png'라크하와 아이샤가 다시 친해지긴 했지.'

소풍의 본래 목적을 이루어서 다행이었다.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나에게 라크하가 질문을 던졌다.

16548700018883.png"아이샤와 델카인 때문에 힘들진 않나?"

16548699983484.png"음……."

나는 흘깃, 쌍둥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천사 같은 얼굴로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16548699983484.png"힘들어도, 저를 워낙 좋아해 주니 괜찮네요."

16548700018883.png“다행이군.”

16548699983484.png"제가 힘들다고 그만두고 가버릴까 봐 겁나요?"

나는 라크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장난으로 물은 거였는데, 라크하가 일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16548700018883.png"가버린다고……?"

16548699983484.png"네, 힘들면 그만둔다고 가버릴 수도 있죠. 그러니까, 공작님이라도 저한테 잘 하셔……."

16548700018883.png"안 돼."

16548699983484.png“네?”

나는 능청스럽게 말을 늘어놓다 말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라크하가 휙 고개를 창문을 향해 돌렸다.

16548700018883.png"멀미가 나니, 그만 얘기하지."

흑막에게 멀미라니. 당황스럽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나 역시 그냥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며, 바깥 풍경을 보고 있자니 피로가 밀려왔다.

16548699983484.png'무리하게 뛰어다녀서 그런가, 엄청 피곤하네.'

몇 번이나 하품을 했을까. 마차가 덜컹거리는 탓에 딱딱한 창문에 머리가 부딪혔으나, 계속 눈이 감겼다.

16548699983484.png'조금만 자자.'

결국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머리에 딱딱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16548699983484.png'아 편안하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더 깊은 잠에 빠졌다. 건너편에 앉은 라크하가 손으로 내 머리를 받쳐주는지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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