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얼핏 보이는 붉은 목2022.01.14.
우아한 코끝을 따라 흐르는 야채 주스. 저 야채 주스는 아이샤와 라크하의 화해를 위해 만든 회심의 주스였다. 그런데, 라크하를 공격할 주스가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
라크하가 험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미, 미안해요. 놀라서 그만…… 소, 손수건이 어디 있더라."
나는 허둥거리며 손수건을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그때였다. 툭. 라크하가 뒤집어쓰고 있던 핑크색 바구니에서 손수건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 떨어졌다.
'이건…… 필시 신의 장난일 거야.'
그렇지 않은 이상, 내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시련이 주어질 리가 없었다. 라크하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오려나. 나는 흙바닥을 나뒹구는 손수건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하…… 저기 있었네. 손수건 대신 제 옷으로 닦아드릴게요."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숄을 벗어 손에 돌돌 말아 쥐었다.
“이걸로라도……."
“됐어. 다시 입기나 해.”
한숨을 푹 내쉰 라크하가 얼굴을 돌리며 거절했다. 하지만 거절한다고 바로 물러나기엔, 주스로 덮인 라크하의 얼굴이 처참했다.
"숄은 돌아가서 빨면 돼요."
"얼굴은 씻으면 돼."
"그래도 대충은 닦아야죠. 이리 와요."
"괜찮다니까."
"제가 안 괜찮아요."
표정이라도 풀고 괜찮다고 하든가. 잔뜩 굳은 라크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간담이 서늘했다.
‘나한테도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라. 응?’
나는 간절한 눈으로 라크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라크하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내 숄을 채갔다. 대충 얼굴을 닦은 라크하가 다시 내게 숄을 건넸다.
“됐나?”
“아뇨, 잠시만요.”
나는 손을 뻗어 숄로 아직 물기가 많은 부분을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검지로 그의 얼굴 위를 콕 눌렀다 떼어내 보았다. 물이 아니다 보니, 확실히 끈적임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쩌죠, 닦았는데도 엄청 끈적하네."
“…….”
세수할 물이라도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끄응, 주변에 호수나 강이 있는지 찾으러 가야 하나?’
하지만 호수나 강이 있어도 평범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즈음. 유독 조용해진 분위기에 나는 슬쩍 라크하를 바라보았다. 크게 뜨인 보라색 눈동자가 넋이 나가 있었다.
“공작님?”
내 부름에 라크하가 갑자기 덮어쓴 핑크색 바구니의 끝을 잡아 꾹 눌러썼다. 얼핏 보이는 목이 붉었다.
‘왜 그러지?’
의문도 잠시, 나는 방금 전에 무심코 라크하와 접촉했다는 걸 떠올렸다.
“괜찮으세요?”
“…….”
대답이 없다. 이럴 땐 차라리 내가 잠시 자리를 비켜주는 게 좋으려나? 그가 진정하도록 둘 겸, 주변을 둘러보고 와야겠다.
“잠시 여기 계세요. 제가 주변에 호수라도 있는지 한 번 찾아보고 올게요.”
“됐어.”
줄곧 단 한 마디도 없던 라크하가 입을 열었다.
“알아서 갔다 오겠다."
그러고는 휙 뒤돌아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붙잡기도 전에 떠나가는 사람을 향해 무어라 할 수도 없어 조용히 보내주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 거슬리는 게 있었으니. 바로, 아직 그의 머리 위에 핑크색 바구니였다.
"공작님! 바구니는 벗으셔야죠!"
안 들리는 건가? 들릴 법도 할 텐데, 라크하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 라크하가 세수를 하러 간 사이. 신나게 주변을 둘러보고 온 아이샤가 내게 달려왔다.
"언니! 내가 신기한 거 보여줄까?"
"응? 뭔데?"
"보면 깜짝 놀랄걸!"
대체 뭘 가져왔길래? 내심 기대하며 아이샤를 바라보았다. 아이샤는 활짝 웃는 얼굴로 품에 잔뜩 안고 있던 것들을 돗자리 위로 쏟아부었다.
"어때? 예쁘지, 예쁘지!"
나는 돗자리 위로 가득 펼쳐진 형형색색의 꽃들을 보며 입을 벌렸다. 평범한 꽃들이었다면, 이런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터.
'아니, 이게 다 뭐야.'
아이샤가 가져온 꽃들은 굉장히 해괴망측했다. 모든 꽃을 다 좋아한다던 델카인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아이샤?"
"이거 봐, 심지어 얘는 움직여!"
아이샤가 펼쳐놓은 꽃 중 하나를 들어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와 동시에 꽃이 입을 벌렸다.
"으아악! 미친!"
깜짝 놀란 나는 험한 말을 뱉으며 아이샤가 내게 들이민 꽃을 쳤다. 픽. 아이샤의 손에 잡혀 있던 꽃이 힘없이 툭 고개를 떨궜다.
"……."
이곳에 온 뒤로 내내 아이샤의 입가를 떠나지 않던 미소가 순식간에 걷혔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나는 흘깃 아이샤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샤는 웃음기를 싹 뺀 얼굴로 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울진 않겠지?'
그렇게나 좋아하는 꽃의 생명을 내가 앗아버렸으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레 아이샤를 향해 물었다.
"나랑 같이 다시 그 꽃을 찾으러 갈까?"
"아니, 아직 안 죽었어."
"응?"
뭐가 안 죽었단 거지? 아이샤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빠르게 눈을 깜빡이던 그 순간. 내가 쳤던 꽃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입을 쫙 벌렸다. -삐이이익! 괴상한 비명소리가 숲을 가득 메웠다.
"윽!"
고막을 날카롭게 자극하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그 소리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으으! 시끄러!"
아이샤 역시 눈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내 다른 손으로 꽃을 쥐어잡았다. 파삭. 아이샤의 손아귀에서 꽃은 가루처럼 사라졌다. 아이샤는 가루가 된 꽃을 바라보더니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언니의 안목이 정확하네."
"뭐?"
"이딴 게 꽃일 리가 없어."
그걸 이제 깨달은 거야? 한숨을 푹 내쉬는데, 별안간 땅에 진동이 느껴졌다.
'뭐지?'
의아해하며 주변을 파악하려던 그때였다. 델카인이 수풀 속에서 불쑥 나타나더니 소리를 질렀다.
"도망쳐!"
"델카인? 어디 있다가……."
내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내 곁에 달려온 델카인이 내 손을 잡더니 앞으로 뛰어간 탓이었다.
"형수님, 죽기 싫으면 열심히 달려!"
"뭐?"
“저기 봐!”
나는 달리다 말고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저, 저게 뭐야?!'
내 입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 쿵, 쿵, 쿵! 생전 처음 보는 생물체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커다란 입이 달린 꽃이 넝쿨로 이루어진 팔 다리로 울창한 나무를 헤쳐가면서 말이다. 마치, 우리를 먹어버리겠다는 듯이. *** 뒤에서 메이아가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라크하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만이 그의 귀를 강타하고 있을 뿐.
-숄은 돌아가서 빨면 돼요.
자신이 뭐라고, 입고 있던 숄까지 벗어가며 닦아주려고 하는 거란 말인가. 걱정스러운 듯 올려다보던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가 계속해서 어른거렸다.
-그나저나 어쩌죠. 닦았는데도 엄청 끈적하네.
메이아의 손가락이 얼굴 위로 살짝 닿았다 떨어진 그 순간. 라크하의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왜 이러는 거지?’
본래 가벼운 접촉 정도는 그저 편안하고 나른한 기분이 들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후."
라크하는 신경질적으로 쓰고 있던 핑크색 바구니를 벗었다. 얼마나 당황했던 건지, 바구니를 벗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전부 메이아의 능력 때문이야.’
그게 아니라면 제게 일어나는 현상들이 말이 되지 않았다.
"얼른 정신 차려야겠군."
호수 앞에 도착한 라크하는 얼굴을 씻어내기 위해 손에 물을 한가득 떴다. 하지만 이내 또르륵, 물을 다시 호수 위로 부었다.
"……여기였던가."
메이아가 만졌던 곳이. 라크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볼 위를 만졌다. 아무리 눌러봐도, 메이아가 손을 댔을 때의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길."
한심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메이아'는 그저 샤키르의 꽃을 대체할 수단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멍청한 꼴은 뭐란 말인가. 연거푸 세수를 한 뒤에야, 라크하는 몸을 일으켰다.
'얼른 가야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전과 달리 라크하의 눈이 한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핑크색 바구니를 들고 돌아가려던 찰나.
"단 걸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라크하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렇지 않아도 메이아가 기껏 준비해 온 것들도 다 쏟아진 상황이었다.
'저쪽이었던가?'
마침 이 근방에 독이 없으면서 달달한 열매가 있었다. 열매를 담을 만한 바구니도 있고. 라크하는 홀린 듯이 열매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이것도 잘 먹으려나."
열매를 정성스럽게 따 바구니에 담던 라크하가 멈칫했다.
'내가 뭐 하는 거지?'
한낱, 계약 관계인 사람을 위해 열매를 따고 있다니. 라크하는 손에 있는 열매를 내려다보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 정신이 덜 든 게 틀림없다.'
그렇게 결론 내린 라크하는 세수를 하기 위해 다시 호수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삐이이익!
"이 소리는……."
무슨 소리였더라? 간만에 듣는 괴음에 라크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하지만 이내 라크하는 무엇에서 비롯된 소리인지 깨달았다.
"라펜데스."
그림자 숲의 마물 중 하나였다. 일반적인 꽃으로 보이지만, 생명이 깃든 엄연한 생명체였다. 수명도 상당히 길어 그 크기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는 마물. 하지만 주로 일생의 반을 잠든 채 지내기에 건들지 않는 이상 위험한 마물은 아니었다. 그런 마물을 건들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아이샤."
꽃이란 꽃은 다 좋아하니. 라크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 괴음이라면 분명 다른 라펜데스를 깨웠을 터.
'귀찮은 일이 생겨버렸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던 것도 잠시. 라크하는 얼음처럼 굳었다.
"메이아."
메이아가 위험하다. 쌍둥이들은 알아서 제 몸을 간수 잘하는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메이아는 아니다. 황급히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가려는데, 쿵쿵쿵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공작님!!!! 도망쳐요!!"
쌍둥이들과 메이아가 열심히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크기가 거대한 라펜데스가 쫓아오고 있었고.
'아이샤라면 충분히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메이아의 옆에서 달리는 아이샤를 보아하니…….
"신났군."
아이샤는 세상 밝은 표정으로 달리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즐긴다는 듯이. 라크하는 혀를 차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흑마법으로 거대한 라펜데스를 태우기 직전이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어느새 가까이 뛰어온 메이아가 라크하의 손을 냅다 잡고 달렸다. 그와 동시에 끌어올린 기운이 눈이 녹듯 사르르 사라졌다.
'그냥 이대로 달릴까?'
메이아와 함께 달린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