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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흑막에게 소풍이란? (21/136)

21. 흑막에게 소풍이란?202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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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699504515.jpg“어차피 오빠는 바쁘면 밥을 안 먹어. 지금 소풍 장소를 정하느라 정신이 없을걸?”

소풍 장소를 정하는 게 뭐라고 밥까지 안 먹을까. 긴가민가했으나, 정말 라크하는 다이닝 룸으로 오지 않았다. 하지만 식사를 하는 내내 긴장했던 탓에 속이 더부룩했다.

1654869950452.jpg‘밥을 입으로 먹었는지 코로 먹었는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불편한 식사를 하고 돌아온 그날 밤, 라크하가 내 방을 방문했다. 직접 내 방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깜짝 놀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불편한 상사와 마주치지 말아야 할 곳에서 만난 기분이었다.

1654869950452.jpg“어, 어쩐 일이세요?”

16548699504529.jpg“들어가서 얘기하지. 괜찮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비켜서자, 라크하가 걸어 들어왔다. 그러더니 돌연 방 한가운데에서 멈춰 섰다.

1654869950452.jpg‘무슨 문제라도 있나?’

괜히 불안해진 나는 라크하가 보고 있는 쪽을 살폈다. 하지만 크게 거슬릴 만한 건 없었다.

1654869950452.jpg“……왜 그러세요?”

내 질문에 라크하가 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16548699504529.jpg"방에서 향이 짙게 나는군."

1654869950452.jpg“무슨 향이요?”

16548699504529.jpg"평소에 그대에게서 나는 특유의 향. 그러고 보니 샤키르의 꽃향기와 비슷해. 왠지 마음도 편안해지는 것 같고……."

1654869950452.jpg“그, 그래요?”

‘샤키르의 꽃’이라는 말에 나는 흠칫했다. 정확히 말해준 적도 없던 내 능력에 대해서 무척 정확하게 짚었으니까. 나는 킁킁대며 내 몸 냄새를 맡아보았다.

1654869950452.jpg‘오늘 쓴 샤워 코롱 향만 나는데…….’

샤키르의 꽃향기가 대체 무슨 향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라크하가 화제를 돌렸다.

16548699504529.jpg"어쨌든, 이것보단 따로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다.”

1654869950452.jpg“아, 부르셨다면 제가 직접 갔었을 텐데요.”

16548699504529.jpg“그러려고 했다만, 생각해 보니 늦은 밤에 그대를 부르는 건 위험한 것 같아서.”

그래서 부르지 않고 직접 찾아왔다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4869950452.jpg‘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람?’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었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라크하가 헛기침을 했다.

16548699504529.jpg"내가 직접 소풍 장소를 알아보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어디로 소풍을 갈지, 대충 조사를 해보았는데……."

라크하가 공중에 손을 살짝 뻗었다. 그러자, 공간이 흐릿하게 일그러지더니 그의 앞에 있는 테이블 위로 와르르, 책자들이 떨어졌다.

1654869950452.jpg"……와."

저런 마법도 쓸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흑마법사라고 해서, 파괴적이고 살벌한 마법만 쓸 줄 아는 줄 알았는데. 라크하는 테이블 위로 어지러이 널려져 있는 책자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16548699504529.jpg“조사해 보니, 집 앞마당으로도 소풍을 가더군. 이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일과 소풍을 겸할 수 있을 테니.”

아니, 이게 뭔 소리람.

1654869950452.jpg“누가 집 앞마당으로 소풍을 가요?”

16548699504529.jpg"이 책에서."

라크하가 많은 책자들 중 하나를 내 눈앞에 들어 보였다. 굉장히 간소한 책자였다. 그런데…….

1654869950452.jpg'제목이 왜 저래?'

나는 내 두 눈을 의심했다. 라크하가 짧게 헛기침을 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책 제목을 읽어주었다.

16548699504529.jpg"엄마, 아빠. 우리 소풍 가요."

1654869950452.jpg"……이거, 동화책 아니에요?"

16548699504529.jpg“소풍과 관련된 책 자료가 얼마 없기에 이것까지 참고한 거야.”

자신만만하게 어디로 소풍을 갈지 직접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이러고 있었단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소풍 위치를 정하는 것도, 도시락 준비도 모두 내가 한다고 할 걸 그랬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1654869950452.jpg"잠시만요."

나는 테이블 앞에 서서 그가 소환한 책자들을 살펴보았다. '즐거운 소풍', '소풍으로 제국 전역 탐방기', '우리 소풍 갈래요?' 등등, 정체를 알 수 없는 책들이 가득했다.

1654869950452.jpg'이게 다 뭐야…….'

낮 내내 이런 헛짓거리를 하고 있었다고? 답답한 내 속도 모르고, 라크하는 옆에서 은근히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16548699504529.jpg"모든 책을 다 읽어본 결과, 소풍은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더군.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한 거지."

어떡해. 살면서 소풍도 한 번 안 가봤나 봐. 쌍둥이들을 데리고 안 가본 건 줄 알았는데, 그냥 아예 못 가본 거였다.

1654869950452.jpg‘이런 사람에게 소풍 계획을 전적으로 맡기고,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니.’

하마터면 마당 앞을 소풍이랍시고 갈 뻔했다.

1654869950452.jpg"자, 공작님. 그 말도 맞긴 한데요. 일단 앉아 봐요."

아무래도 우리 다시 계획 짜야 할 것 같거든. 다행히 라크하는 별말 없이 내 말을 따라주었다. 나는 그를 향해 차근차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1654869950452.jpg"자, 소풍은요. 휴식을 위한 목적도 있지만, 음…… 아, 교육적인 목적도 있어요."

16548699504529.jpg"그래, 그런 의미도 있더군. 하지만 소풍으로 무슨 교육을 한단 말이지? 난 살면서 그런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어."

1654869950452.jpg"일단, 들어봐요."

나는 테이블 위 책자를 정리해서 한쪽으로 밀어뒀다. 그러곤 라크하가 내게 대표로 보여줬던 책을 콕 집었다.

1654869950452.jpg“집 앞마당으로 나가는 건, 그냥 산책과 다름없지 않을까요? 아이샤도 별로 안 좋아할 것 같고.”

16548699504529.jpg“……듣고 보니 그렇군.”

1654869950452.jpg“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책에 적힌 대로 소풍을 마당으로 가는 건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아요.”

내 말에 라크하는 '엄마, 아빠. 우리 소풍 가요.' 책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험악하게 눈살을 구겼다.

16548699504529.jpg"쓰레기 책이었군."

1654869950452.jpg"예?"

16548699504529.jpg"감히 내 판단을 흐리는 정보를 넣어두고 말이야. 태워 버려야겠어."

1654869950452.jpg"안 돼요!"

지금 어디서 불장난을 하려는 거야! 라크하의 손끝에 불씨가 타닥, 타오르는 순간 나는 황급히 책을 감싸 안았다.

1654869950452.jpg"이 책의 저자가 정보를 전달하려고 쓴 책은 아니에요."

16548699504529.jpg"저자의 의도를 그대가 어떻게 알지? 서로 아는 사이인가?"

1654869950452.jpg"그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16548699504529.jpg"책도, 저자도 마음에 안 드는군."

살기를 담은 시선이 내가 안고 있는 책을 향했다. 저자를 찾아가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나는 그의 입에서 '죽여야겠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가로챘다.

1654869950452.jpg"혼자 알아보시느라 고생 많으셨겠어요. 이제 저랑 같이 계획을 짜 봐요."

16548699504529.jpg"결국은 맨땅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단 말이지?"

1654869950452.jpg"맨땅은 아니죠. 공작님은 제르디아 제국에 대해 잘 알고 계시잖아요?"

내 질문에 라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48699504529.jpg"공작으로서 영토에 대한 지식은 기본이지."

1654869950452.jpg“혹시, 자연을 관찰하거나 역사 유적 같은 곳을 구경할 만한 장소가 있나요?”

그럼 구경하기도 좋고 교육에도 도움이 돼서 소풍 장소로 딱일 텐데. 내 질문에 라크하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16548699504529.jpg"두 가지 모두 충족하는 곳이 있긴 해."

1654869950452.jpg"네, 거기예요."

이렇게나 금방 소풍 장소를 정할 수 있는데, 무슨 고민을 그렇게나 오래 했담. 굳이 오래 고민할 필요 없이 나온 결과에 나는 흡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1654869950452.jpg"지금 공작님께서 떠오르신 곳을 가면 될 거예요."

16548699504529.jpg"정말 그런 곳으로 소풍을 간다고?"

라크하는 눈썹을 들썩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집 앞마당으로 소풍을 간다고 했던 사람이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1654869950452.jpg"네, 거기로 갈 거예요. 이제, 정해졌으니 이만 잘까요?"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간이었다. 더 지체했다가는 소풍을 즐기기는커녕 하루 종일 뻗어 있을지도 몰랐다. 라크하는 제 턱을 쓸며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16548699504529.jpg"그래, 그대의 말이 맞겠지. 나와 달리 소풍 경험이 있는 것 같으니."

1654869950452.jpg"네, 저만 믿어요. 오늘 잠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제 침대는 같이 눕기엔 좁은데."

16548699504529.jpg“내가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자지.”

라크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의자를 침대 옆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16548699504529.jpg"그대는 손만 줘."

라크하의 침실로 돌아가서 같이 한 침대에 누워서 자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4869950452.jpg"네, 드릴게요."

나름 괜찮은 컨디션으로 내일 소풍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

1654869957907.jpg“공작님께서 소풍을 가셨다고?”

16548699594361.jpg“네.”

집무실로 출근한 시롬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시롬이 알기론, 라크하는 살면서 소풍의 ‘소’자도 꺼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1654869957907.jpg‘해가 오늘 서쪽에서 떴나?’

시롬은 저도 모르게 눈을 비비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평온하게 이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1654869957907.jpg“어, 어디로 소풍을 가셨는데?”

16548699594361.jpg“그게…… 데인저 숲이요.”

1654869957907.jpg“!”

결국 시롬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커다래졌다. ‘데인저 숲’, 그곳이 어디던가. 흑마법의 기원이 되는 곳이자 자잘한 마물들이 득실대는 곳이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 누구도 주변을 얼씬거리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1654869957907.jpg‘그런 곳을 시터님과 가셨다니…….’

그것도 소풍으로. 알고 보면 소풍이 아니라 담력 훈련을 하러 가신 건 아닐까? 시롬은 속으로 메이아가 무사히 돌아오길 빌고 빌어야 했다. *** 나는 정성껏 준비한 도시락이 담긴 바구니를 바닥으로 떨굴 뻔했다.

1654869950452.jpg"……여기가 대체 어디죠?"

16548699504529.jpg“어디긴, 그대가 말한 곳이지.”

꿈인가? 꿈이겠지? 아니, 꿈일 거야.

1654869950452.jpg‘내가 언제 이런 곳을 오자고 했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이 쩍 벌어졌다. 이리저리 이끼가 껴 만지기도 꺼려지는 울창한 나무. 기이하게 뻗은 나뭇가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알록달록한 버섯과 꽃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자못 어두운 숲이었다.

16548699504529.jpg"자연을 보기도 좋고, 역사 유적지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자연 경관? 좋게 말하면 자연 경관이 맞다고 쳐. 그런데.

1654869950452.jpg"대, 대체 어떤 게 역사 유적인 거죠?"

16548699504529.jpg"과거부터 이어져 온 아인티아 흑마법의 기원이 되는 곳이다."

어마무시한 곳이구나. 걸핏하면, 이상한 방향으로 머리가 굴러가는 라크하를 고려했어야 했는데. 쌍둥이들의 눈초리에 얼굴이 따끔거렸다.

16548699504515.jpg"언니……."

16548699608883.jpg"형수님……."

얘들아. 미안하다. 나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1654869950452.jpg"얘들아, 공작님과 의사소통이 잘못……."

16548699504515.jpg"너무 좋아!! 어쩜 이런 곳이 있을 수가 있지?"

16548699608883.jpg"형수님 센스가 좋은데?"

응? 아이샤는 눈을 반짝이며, 우다다 앞으로 뛰어나갔다. 델카인도 마음에 드는지 감탄사를 터뜨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잠시.

1654869950452.jpg'쌍둥이들도 평범한 애들은 아니었지.'

아이샤와 델카인이 아인티아의 핏줄임을 떠올렸다.

1654869950452.jpg"애들이 좋아해서 다행이네요."

16548699504529.jpg"그대 덕분이지."

1654869950452.jpg"아, 예……."

이런 건 내 덕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괜히 일반인과 비교해 남다른 아인티아의 구성원이 되는 기분이다. 안 좋은 쪽으로.

1654869950452.jpg"그럼 여기에 일단 자리를 잡죠."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돗자리를 펼쳤다. 그리고 돗자리 위로 바구니를 두려는 순간.

1654869950452.jpg"으악!"

펼친 돗자리 위로 지나간 거대한 벌레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니, 소리만 질렀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1654869950452.jpg'……내 바구니가 어디 갔지?'

방금 전까지 손에 있던 바구니가 없다.

1654869950452.jpg"아."

옆에서 들리는 탄성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크하를 바라보았다. 잘난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야채 주스. 라크하의 머리 위로는 핑크색 바구니가 씌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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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69950452.jpg"헉……."

무서운 영화를 볼 때, 놀라 팝콘 통을 던지는 사람이 이해가 안 됐는데. 그 사람이 내가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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