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렇게 부르지 마, 미칠 것 같으니까2022.01.07.
대참사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깜짝 놀란 나는 라크하가 이성을 잃기 전에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그대로 있어.”
라크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리지만 않았더라면. 고요한 보라색 눈동자가 제 팔을 잡고 있는 내 손으로 향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차라리 내게 더 엉겨 붙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었다. 전에는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이성을 잃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공작님.”
“잠시.”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걸까.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려만, 라크하는 묵묵히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방법을 써볼까?’
라크하가 말해주지 않아도, 이성을 잃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었다.
“라크하?”
이름을 부르자, 그의 몸이 흠칫 떨렸다. 라크하는 입술을 짓씹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부르지 마. 미칠 것 같으니까.”
뭔가 애매한 대답이긴 한데……. 그래도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걸 보며 긴장을 조금 풀었다. 이성을 잃은 그는 이름만 불러도 들떠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즉, 아직까진 라크하는 제대로 된 대화가 되는 상태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나요?”
"그냥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으라는 게 큰 부탁은 아니니, 나는 그의 말에 따라주었다. 조금 뒤, 그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눈을 살짝 감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원래 손이 닿으면, 곧바로 이성을 잃었지.”
“지금은 괜찮다는 건가요?”
“확실히 전보다는 괜찮아. 자제할 수 있을…….”
멀쩡하게 말하던 라크하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스르르 눈을 뜬 그는 나른하게 눈을 휘었다.
“메이아.”
확실히 전보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역시 흑막을 믿어선 안 됐다. 라크하를 방심시키기 위해 나는 다른 손을 들어 올려 아무 방향이나 가리켰다.
"어? 저기 좀 봐요, 시롬 이라기 보좌관님께서 일하기 싫다고 농땡이 부리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웬걸. 벌컥. 문이 열리더니, 내가 가리킨 방향에서 시롬이 튀어나왔다.
'아니, 당신이 거기서 왜 나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허, 하고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시롬이 눈썹을 툭 떨궜다.
"이젠 시터님까지 절 놀리시는 겁니까……? 너무하십니다."
"아, 그게 아니라……."
시롬에게 사과를 하려던 찰나. 라크하가 시롬을 바라보며 상냥하게 말했다.
“방해하지 말고, 꺼져.”
비록 내용은 험악했지만.
“넵.”
시롬은 행여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싶었는지 후다닥 도망갔다. 난데없는 시롬의 등장으로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는 작전은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방법은 단 하나.
'몸을 쓰는 수밖에.'
나는 왼발을 들어 라크하의 가죽 구두 위로 실수를 가장한 척 내리찍었다.
"이런, 표현이 과격하군."
라크하는 싱글 웃으며 가볍게 내 발을 피했다. 어쩌다 보니 거리는 더욱 가까워지긴 했다만,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분명 한 번의 공격으로 더 방심했을 테니까.
'왼발은 페이크일 뿐. 진짜는 오른발이다!'
곧바로 오른발로 라크하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던 그때였다.
"안 돼!!"
아이샤의 우렁찬 외침이 온 복도를 가득 울렸다.
“아이샤……?”
아이샤는 또 언제 나타난 거야? 아이샤가 눈에 불을 켜고 성난 황소처럼 달려오더니 라크하를 잡고 뒤로 당겼다.
"하도 안 오길래 이상하다고 했어! 어디서 내가 보는 앞에서 언니랑 뽀뽀를 하려고 해!"
뭐? 뽀뽀……? 아이샤가 무슨 소리인지 얼떨떨하던 것도 잠시. 나는 나와 라크하의 거리가 굉장히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샤가 서 있던 각도에서는 오해할 만한 소지가 있어 보였겠구나.
"빨리, 언니랑 떨어지지 못해?! 이 못된 오빠 같으니라고!"
"……."
"이익! 떨어져! 떨어지라고!"
내 힘으로도 안 되는데, 아이샤의 힘으로 라크하가 당겨질 리가 없었다. 라크하는 시큰둥하게 아이샤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이 틈을 타, 아이샤를 향해 외쳤다.
"아이샤! 공작님을 떨어뜨리면 칭찬 도장 줄게!"
자고로 칭찬 도장이란, 아이들이 뭐든지 할 수 있게 만드는 마법 같은 것. 일순간, 아이샤의 눈에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칭찬 도장?"
라크하의 얼굴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오히려 잘 모른다면 더 좋은 일이었다. 칭찬 도장이라는 게 아이샤에게 얼마나 큰 힘을 가져다줄지 어디 한 번 보시라. 나는 씨익 웃으며 아이샤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한 개도 아니라, 무려 두 개나 줄 거야!"
"좋아! 꼭 주기다!"
"물론이지."
조금 뒤, 나는 내 선택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말았다. 급박한 나머지 내가 잊은 게 있었다. 델카인과 달리 아이샤는 머리보다 행동이 앞서는 아이라는 걸. 일순간 아이샤의 주변에 검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 아이샤?"
흑마법을 쓰라곤 안 했는데. 그리고 흑마법을 쓰면 또 혼날 거 아니야. 하지만 효과는 엄청났다. 단 한 번도 남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라크하가 휘릭 뒤를 돌았으니까. 자연스럽게 내 손을 쥐고 있던 힘도 빠졌다.
'지금이다!'
나는 재빨리 그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낸 뒤 뒤로 물러났다. 그런 다음 행여 아이샤가 제대로 흑마법을 쓰기 전에 말렸다.
"됐어! 그만해, 아이샤!"
"벌써?"
"응, 됐으니까 얼른!"
내 말에 아이샤의 기운이 삽시간에 걷혔다.
'다행히 흑마법을 다루는데 능숙한가 보네.'
아이샤는 언제 위협적으로 굴었냐는 듯 활짝 웃더니 쫄래쫄래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목에 걸고 다니던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와 펜을 꺼냈다.
"자! 여기! 두 개 줘!"
***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점심을 먹으러 다이닝 룸을 가기는커녕 집무실로 들어온 상태였다. 여전히 아이샤가 라크하와 절대로 밥을 먹지 않는다고 고집을 부린 탓이었다.
‘델카인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무서운 기세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
“…….”
말없이 서로를 몇 분 동안 노려봤을까. 상황을 중재하지 않는다면, 저 기싸움에 끝은 없어 보였다.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둘이 화해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싫어!"
"이대로 넘어가면 버릇이 나빠질 거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누가 한 핏줄이 아니랄까 봐, 둘 다 고집이 만만치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다시 친하게 지내면 얼마나 좋아.’
하지만 라크하는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곤 따로 쌍둥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같지 않았다. 결국, 계속 이런 냉전 상태가 이어진다는 건데. 매번 두 사람의 기싸움에 끼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잖아.’
지금 방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델카인은 또 뭔 죄란 말인가. 곰곰이 둘 사이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던 때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내일 쌍둥이들의 수업이 없었다.
‘이참에 같이 소풍이라도 가서 오순도순 도시락도 먹고 놀다보면 자연스럽게 친해지지 않을까?’
라크하만 시간을 낼 수 있다면, 딱이었다. 나는 라크하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공작님,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시간을 내려면 낼 수는 있어. 그런데 그건 왜 묻지?”
옳거니! 나는 두 사람을 보며 진하게 웃었다.
“저희, 소풍을 가는 게 어때요?”
“소풍……?”
“네, 두 분 다 최근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많으셨잖아요. 쉴 겸 기분 전환도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라크하는 몰라도 아이샤라면 좋아할 게 뻔했다. 놀러 나가는 걸 싫어할 아이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예상과 달리 아이샤의 표정이 뚱했다.
“왜 그래, 아이샤?”
“……소풍이 뭔데?”
아이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소풍이 뭔지 몰라서 저런 반응을 보인 거였구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직 소풍을 가본 적이 없다면, 모를 만도 했다.
“그러니까 소풍은…… 음, 나들이라고 생각하면 돼. 맛있는 걸 싸 들고 가서 주변 경치도 구경하고 그러는 거지. 아이샤가 좋아하는 꽃도 보면서 말이야.”
“뭐야, 되게 좋은 거였잖아? 좋아! 나 갈래! 무조건 찬성!”
내 설명에 아이샤가 눈을 반짝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역시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
이제 라크하만 설득하면 될 일이었다.
“공작님도 함께 가요.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애들이랑 가보겠어요?”
“가도 상관은 없다만, 소풍은 쓸모없는 유희 활동이지 않나? 차라리…….”
“언니, 됐어. 우리끼리 가자!”
아이샤가 라크하의 말을 끊으며 외쳤다.
“어차피 오빠는 샤키르의 꽃을 찾을 때 빼고는 웬만하면 우리랑 안 나가거든.”
그렇다고?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샤의 말이 거짓은 아닌지 라크하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 덕에 더욱 기세가 아이샤가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매번 우리보고 샤키르의 꽃이 어디 있는지 기억해 두라면서 데리고 다니는데, 재미라도 있으면 몰라. 그런데 하나도 재미없고, 무엇보다 거기에 며칠 동안 있는데 밥도 맛없어!”
아이샤의 말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을 캐치했다. 아이샤의 우선 순위는 밥이었다.
“어쨌든, 오빠는 소풍 같은 건 절대로 안 가려고 할걸?”
이러다가 정말 셋이서만 소풍을 가게 되면 곤란했다. 그때, 잠자코 있던 라크하가 입을 열었다.
“……가면 되지 않나.”
“가, 간다고?”
라크하의 대답에 아이샤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래, 듣고 보니 그저 유희를 위해 데리고 나갈 생각을 안 해보긴 했으니까.”
“…….”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무심했군.”
아이샤가 얼이 빠진 얼굴로 라크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라? 이거 뭔가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데?’
불만인 것처럼 얘기하더니 평소에 라크하와 어디 놀러가고 싶긴 했었나 보다. 이 분위기를 끌고 가야 한다! 나는 또 다른 변수가 생기기 전에 빠르게 상황을 마무리했다.
“그럼 처음으로 다 같이 소풍을 가는 거겠네요. 저는 내일 아침부터 도시락 준비를 해야겠어요.”
아이샤는 밥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으니까. ‘도시락’이라는 단어에 갑자기 아이샤가 눈을 번뜩였다.
“언니, 그때 먹었던 거 해줘! 그 맛있는 감자!”
“응, 물론이지.”
“장소는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죠.”
전과 달리 훈훈한 상황에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 분위기를 밀어 같이 밥을 먹으면서 소풍 계획을 세워보자고 해 볼까?’
그렇게 나의 야심찬 계획의 마무리를 지어보려는데, 아이샤가 작게 나를 불렀다.
“언니, 언니.”
“응? 왜 그래, 아이샤?”
“이리와 봐.”
따로 하고 싶은 얘기라도 있는 걸까? 내 치맛자락을 잡고 당기는 아이샤를 따라간 그 순간이었다. 씨익 웃은 아이샤가 문을 벌컥 열더니 엄청난 힘으로 나를 문밖으로 당겼다.
“어어……?”
이윽고 아이샤의 발랄한 외침이 가득 울렸다.
“그럼 오빠는 바쁠 테니까 우리끼리 저녁 먹고 올게!”
쿵. 라크하와 내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문이 닫혔다. 역시 모든 게 내 뜻대로 풀릴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