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꿀 직장이 아니야2022.01.03.
아이샤와 델카인은 겉보기엔 그렇지 않지만, 여느 평범한 아이들처럼 외로움을 많이 타고 사람의 손길을 원했다.
'그런 아이들이 탑에 갇힌다면, 몹시 괴롭겠지.'
원작을 읽을 땐, 잘못된 행동에 대해 마땅한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쌍둥이들이 여주인공인 레이나를 심하게 괴롭혔던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과연 아무런 이유도 없이 괴롭혔을까?’
아이샤와 델카인은 못된 아이들은 아니었다. 미래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아이들의 모습을 봐서는.
“형수님, 왜 그래?”
얼음처럼 굳어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델카인이 내 옷자락을 잡았다. 나는 얼른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언니 아직 몸이 안 좋은 거야?”
아이샤는 델카인의 말에 뒤늦게 내 상태를 살폈다.
"그럴 리가.”
애초에 몸이 안 좋았던 적도 없다는 걸 알긴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샤와 델카인은 내 눈치를 보기 바빴다.
"형수님,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마음은 고맙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 안 좋으면, 쉴게. 알겠지?"
델카인은 머뭇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내 관심이 델카인에게 쏠리자, 점차 아이샤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이 망할 똥강아지들.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나는 곤란한 상황이 펼쳐지기 전에,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얘들아. 배고프진 않고? 특히 아이샤는 더 배고플 것 같은데. 어제 저녁도 안 먹었다며?"
내가 관심을 주자, 아이샤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
"응! 나, 엄청 배고파!"
"오늘은 공작님이 바쁘시다고 하니 우리끼리 밥 먹을까?”
“좋아! 너무 좋아!”
아이샤는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하지만 이내 가만히 있는 델카인을 향해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델카인! 언니 옆자리는 내 자리야, 알지?”
“형수님을 중간에 앉히면 되지.”
“아, 맞다. 그렇네? 미안, 그걸 생각 못 했어.”
정말 단순하다니까. 민망한 듯 아이샤가 볼을 긁적이며 웃었다. 그런 아이샤를 보며 델카인이 픽 웃었다.
"바보."
"뭐? 내가 바보라고 하지 말랬지!"
"자자, 얘들아. 싸우면 안 되지."
또 누구 한 명이 토라지기라도 한다면 난감했다.
"언니! 델카인이 먼저 나한테 바보라고 했어!"
"그래, 이번엔 델카인이 먼저 사과하자."
델카인이 흘깃 내 눈치를 보았다. '바보를 바보라고 했는데, 뭐가 잘못된 거야?'라는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델카인도 은근히 알려줘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다. 대신 아이들이니만큼 반감을 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
"아이샤가 기분 나빠하잖아. 그리고 바보라는 말이 좋은 말도 아니니까, 사과해야지?"
나는 엷게 웃으며 델카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델카인은 눈을 감고 내 손길을 받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옳지."
"바보라고 해서 미안해, 아이샤."
델카인의 사과에 아이샤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흐, 흥. 그런다고 내가 받아줄 것 같아?"
아이샤, 부끄럽구나. 미처 숨기지 못한 아이샤의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었다. 감정을 잘 숨기지도 못하면서, 꼭 저런다니까.
"아이샤."
작게 아이샤를 부르자, 아이샤가 다시 델카인을 쓱 바라봤다. 그러곤 인심 쓴다는 듯 델카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가, 언니 때문에 특별히 넘어가 준다!"
"둘 다 어쩜 이렇게 착할까."
"정말? 나 착해?"
"응, 착해."
아이샤는 언제 도도한 얼굴을 했냐는 듯 활짝 웃으며 신나했다. 델카인도 칭찬을 들으니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쌍둥이들이 화기애애하게 웃는 모습을 보자,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 기분이다! 다들 칭찬 도장 하나씩 줄게!"
"……."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칭찬 도장이 별로인가?'
"칭찬 도장……?"
아이샤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칭찬 도장이 뭔지 모르는 건가?’
의아하던 찰나, 델카인이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칭찬 도장을 받으면 뭐가 좋아?"
아,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거였구나. 나는 뒤늦게 쌍둥이들의 반응을 이해하고,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아이샤랑 델카인이 착한 일을 하면, 칭찬 도장을 줄 거야. 그걸 10개 모으면, 내가 둘 다 소원을 들어줄게."
"소원?"
"진짜야?"
언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냐는 듯 쌍둥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그래, 역시 좋아할 줄 알았지.
"물론이지! 원하는 거 전부 들어줄게!"
"언니, 거짓말하기 없기다!"
"그거, 엄청 좋은 거였네."
한껏 들떠서 신나하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따라 활짝 웃었다.
"물론이지. 그럼 도장이 없으니까, 대신 펜으로 사인을 해줄게. 종이랑 펜 들고 와 볼래?"
*** 배불리 점심을 먹고, 모든 수업이 끝날 때까지 아이샤는 화관을 벗지 않았다. 심지어 틈만 나면 거울 앞에 서서 제 머리 위에 있는 화관을 살피기 바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고. 거울을 보고 있던 아이샤가 휙 뒤돌아 델카인을 향해 물었다.
“델카인, 어때. 나 잘 어울려?”
“아까도 대답해 줬잖아.”
“한 번 더! 한 번만 더 말해줘.”
“……형수님이 해준 건데 당연히 어울리겠지.”
“그치!”
아이샤가 활짝 웃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런 아이샤를 보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종종 선물을 해줘야겠네.’
그렇게 순탄하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똑똑. 노크소리에 나는 흘깃 델카인과 아이샤를 돌아봤다. 둘이서 떠드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계속 놀고 있게 둬야겠다.’
문앞으로 다가간 나는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리타가 앞에 서 있었다.
“리타 씨?”
“아, 시터님. 아직 여기 계셨군요. 다행이에요.”
나에게 볼일이 있는 건가? 마침, 이제 막 쌍둥이들의 수업이 끝난 참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공작님께서 저녁을 함께 드시자고 하셨어요. 물론, 시터님도 함께요.”
“저도요?”
“네!”
……나는 대체 왜? 아인티아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 음식이 맛있어서 좋긴 했다. 하지만, 식사 중 아이샤와 라크하의 싸움을 목격한 탓에 선뜻 내키지는 않았다. 리타가 수줍게 웃더니 내게 속삭였다.
“게다가 앞으로 있을 식사도 같이 드시자고 했어요.”
“……정말 그러셨다고요?”
“네, ‘무조건’이라고 하셨어요.”
젠장. 그 불편한 자리에서 4달 동안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고? 눈앞이 아찔거렸다. 꿀 직장이 헬 직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제발 나 좀 내버려두라…….’
착잡한 내 속도 모르고 리타는 상큼하게 웃으며 떠났다.
“그럼 아가씨와 도련님께도 전달해 주세요. 바로 다이닝 룸으로 가시면 돼요.”
“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방문을 닫고 쌍둥이들을 돌아보았다. 둘은 받았던 꽃다발을 어디에다 두면 좋을지 의논을 하고 있었다.
“저기, 얘들아?”
“응?”
내 부름에 델카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아이샤는 내가 한 번 더 부른 후에야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언니, 왜?”
“오늘 저녁은…….”
라크하가 함께 먹자고 했다고 말을 하려던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 보니 아이샤가 라크하와 밥을 같이 먹으려고 하려나?’
어제 워낙 심하게 싸웠으니, 먹기 싫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있었다. 고민하고 있던 그때, 아이샤가 눈을 반짝이며 내 말을 가로챘다.
“언니! 저녁도 우리랑 같이 먹어?”
“응, 그럴 것 같아.”
“헉, 너무 좋아!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야!”
방방 뛰는 아이샤를 보며 나는 생각을 바꿨다. 기분이 풀렸으니, 라크하와 함께 밥을 먹어도 괜찮다고 할지도 몰랐다.
“응, 대신 오늘 저녁은 공작님도 같이 먹을 거야.”
“…….”
별안간 침묵이 찾아왔다. 연신 아이샤의 곁에 있던 델카인이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었다. 델카인을 보며, 나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그 순간이었다.
"싫어!!!”
혹시 나, 귀에 피 나니?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아이샤의 목소리에 귀가 얼얼했다.
“절대! 절대로 안 가!”
"아, 아이샤?"
"싫어! 절대 오빠랑 같이 밥 안 먹을 거야! 오빠랑 같이 먹는 순간 오늘 하루는 내 인생 최악의 날이 될 거야!”
라크하는 우리가 저녁을 먹으러 오는 걸로 알고 있을 텐데……. 결국, 어떻게든 아이샤를 달래서 데리고 가야 했다. 얼결에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된 나는 심호흡을 한 뒤 아이샤의 앞에 눈을 맞추고 앉았다.
"아이샤, 그래도 언제까지 공작님과 따로 밥을 먹을 수는 없잖아."
"안 먹는다고!"
“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야. 일단 가보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
“그냥 오빠한테 같이 안 먹는다고 전달하면 되잖아!”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같이 먹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아이샤의 완강한 모습을 보니 어떤 실랑이를 벌여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결국, 나는 아이샤를 달래는 걸 포기했다.
“알았어. 그럼 지금 다녀올게.”
“제대로 전해!”
나는 씩씩거리는 아이샤를 두고 문앞으로 걸어갔다. 완전히 나가기 직전, 내게 다가온 델카인이 언질을 주었다.
“형수님, 형은 아직 집무실에 있을 거야. 보통 딱 6시에 다이닝 룸에 가거든.”
“응, 고마워.”
나는 델카인에게 아이샤를 잘 부탁한다고 말한 뒤 라크하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문 앞에 선 그때였다. 끼이익. 때마침 방문이 열렸다.
"……사제?"
내가 이곳에 찾아올 줄은 몰랐는지, 나를 본 라크하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한 뒤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공작님, 시간만 괜찮으시다면 저랑 잠시 대화를 나누실 수 있을까요?”
“안으로 들어가지.”
집무실 문을 여는 손길에 나는 손을 내저었다. 어떤 상황인지만 전달하러 온 거였으니까.
“아뇨, 그렇게 길게 할 얘기는 아니에요.”
“그럼?”
“아이샤가 함께 밥을 안 먹겠다고 해서요. 아직 공작님께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에요.”
“아이샤가……?”
“네.”
라크하가 눈가를 좁혔다. 아직 아이샤가 화가 나 있을 줄은 몰랐나 보다. 라크하라면, 아이샤와 대화를 해 보려고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아직도 반성을 못 했다는 의미군.”
“네?”
“됐다. 먹기 싫다고 하면 말라고 해. 배가 고프면 알아서 오겠지.”
이래도 되는 건가? 라크하가 이렇게나 엄격하게 굴 줄은 몰랐다. 하필 싸움의 원인이 나와 연관된 탓에 더욱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그렇게나 고집이 센 아이샤가 배가 고프다고 올 리는 없었다.
‘차라리 쓰러질 때까지 버티겠지.’
그런 광경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라크하의 앞을 슬쩍 막아섰다.
“하, 하지만 아이샤라면, 배가 고프다고 찾아올 것 같지 않아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같이 밥을 먹지 않겠다고 소란을 피웠거든요. 달래도 안 돼서 제가 온 거고요.”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려주려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라크하는 와그작 인상을 찡그렸다.
“그대의 속을 아주 제대로 썩여놨겠군. 가서 한마디 좀 해야겠어."
라크하는 무서운 기세로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아니, 잠깐. 이게 아닌데……! 이대로 라크하가 아이샤를 찾아간다면 그야말로 파국이었다.
“공작님!”
라크하를 불렀으나, 그는 가뿐히 내 부름을 무시했다.
‘미치겠네, 정말!’
거의 뛰다시피 따라간 후에야 나는 라크하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다간 더 크게 싸우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
익숙한 듯 낯선 불안한 침묵 나는 천천히 눈을 아래로 내렸다. 어찌 내 손은 미련하게도 라크하의 팔목을 잡고 있는 걸까. 망했다. 그리 생각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