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누워, 재워줘2021.12.27.
"네, 공작님. 일어났으니까 옆으로 비켜……."
“라크하.”
“……네?”
“라크하라고 불러야지.”
알고 보면, 그냥 개꿈이 아닐 수도 있었다. 지금의 라크하는 이성보다 본능이 앞선 '동물'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였으니까. 나는 자포자기한 채 우선 빌어먹을 흑표범을 달래는 걸 목표로 했다.
"네, 라크하. 옆으로 비켜 주세요."
"그대와 떨어지기 싫으면 어쩌지?"
"……나중에 후회하실 텐데요."
"후회하지 않아."
"지금의 공작님, 아니 라크하는 그렇겠죠."
공작님, 이라고 말했다가 흉포하게 몰아치는 눈빛에 얼른 말을 바꿨다.
"나중이나 지금이나 결국 나인 건 같아."
"네, 그러시겠죠. 그래도 나중의 라크하에 대해서는 제가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아니. 그대는 몰라."
라크하가 서슬 퍼런 눈으로 중얼거리더니, 내게 몸을 숙였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메이아, 그대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목덜미에 감기는 뜨거운 숨결에 뱃속이 간질거렸다.
"그냥 이대로 죽어도 좋을 정도로."
죽을 거면 혼자 죽어, 이 사람아! 험한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올 뻔했지만, 꾹 눌러내며 침착하게 그를 불렀다.
"저기, 라크하……?"
이름으로 부르니 반응은 빨랐다. 라크하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코끝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일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거, 거기서 더 다가오면, 가만 안 둘 거예요.”
“날 가만 안 둔다고……?”
라크하의 눈이 더욱 짙어지며 질척한 욕망으로 들끓었다.
'가만 안 둔다는 말에 왜 더 흥분하는 거야!'
이러다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몰랐다. 위기를 느낀 나는 자유로운 손을 들어 그의 이마를 잡아 밀었다. 분명 있는 힘껏 밀고 있는데…….
'꼼짝을 안 하잖아?'
머리가 돌덩어리도 아니고. 내가 밀든 말든 가만히 있던 라크하가 내 손목을 잡았다.
"열이 나서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니니 걱정 마."
내 행동을 늘 다른 의도로 받아들이는 것도 엄연히 능력이다. 어쨌든, 밀어내서 될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조금 더 거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손목 좀 놔 줘요."
"원한다면."
"가장 원하는 건 옆으로 비켜주는 건데요."
"그것만은 그대가 좀 양보해 줘. 이대로 있는 게 좋거든."
그래, 대화가 될 거라고 희망을 가진 내가 잘못이지. 나는 최후의 수단을 실행하기 위해 손을 머리맡으로 올렸다. 손에 푹신하고, 뭉툭한 베개가 잡혔다. 라크하의 시선이 내가 잡고 있는 베개로 향했다.
"불편한가? 베개를 다른 걸로 바꿔줄까?"
쓸데없이 이런 쪽으로 배려하지 말라고! 머리를 열어서 저 뇌 속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저 말에 기회를 엿볼 수 있었다.
"다른 베개가 있어요? 어디에 있는데요?"
"저기에 있었던 것 같은……."
지금이다! 라크하가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린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그대로 베개를 라크하에게 휘둘렀다.
“미안해요!”
턱. 분명, 베개에 맞으면 팡! 하는 시원한 타격음이 나야 하는데…….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
라크하의 손에 내가 휘두른 베개가 잡혀 있었다. 저, 저 괴물 같은 반사 신경은 대체 뭐야?
“또, 나를 기절시킬 작정이었나?”
낮게 가라앉은 차분한 음성이 고요히 울렸다. 나는 깜짝 놀라 라크하의 눈을 바라보았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있던 들뜬 기운은 온데간데없었다.
‘저, 정신이 돌아온 거야?’
어떻게? 아직 몸이 닿아 있을…….
“아.”
라크하가 내 어깨를 누르고 있던 손으로 베개를 잡고 있었다. 그러면서 몸을 일으켰던 건지 더 이상 나와 접촉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게…… 말이 통하지 않아서……. 죄송해요."
"사과는 됐다."
라크하가 베개를 바닥으로 던지더니 옆으로 비켜주었다. 그러곤 내게 등지고 앉았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다면, 이런 식으로 대처하도록 해."
"네?"
뜻밖의 말이었다. 어리둥절해하며 되묻자, 라크하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내가 더 눈치채지 못하도록 행동하도록."
“정말요?”
"어쩌겠나. 그렇게 해야만 정신을 차리는 것 같은데."
“나중에 다른 말하기 없기예요.”
“그래.”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었다. 나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길게 숨을 내뱉었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밀려왔다.
‘많이 잔 기분은 안 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암막 커튼이 쳐져 있어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나 됐죠?”
내 질문에 라크하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7시군.”
나와 라크하가 방으로 돌아온 시간이 점심을 먹은 이후니까……. 대충 5~6시간은 잤구나.
“생각보다 많이 잤네요.”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고쳤다. 지금이 딱 나가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공작님은 여기에 계실 건가요?”
“해야 할 일이 많긴 하지만, 내일 못 한 일을 하면 되겠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라크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녁이라도 함께 먹겠나?”
“아뇨,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잠만 자서 배가 고프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얼른 방으로 돌아가서 혼자 쉬고 싶었다.
“그럼 저는 이제 가 봐도 될까요?”
“…….”
할 말이 아직 남아 있다는 표정. 어쩐지 불만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인티아의 고용인으로서 그가 허락을 해 줘야 나가든 말든 할 텐데.
“공작님?”
“무어라 했었나? 피곤해서 듣질 못했어.”
“먼저 가봐도 되냐고 물었…….”
“어지럽군.”
“네?”
“아직 잠이 부족한 것 같아.”
내 말을 끊은 라크하가 침대 위로 누웠다.
"누워, 재워줘."
더 잔다고? 그의 돌발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잠은 이미 충분히 자셨지 않나요?”
5-6시간이 부족한 수면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크하는 단호했다.
"그대는 매일 잠을 자서 괜찮겠지만, 난 이 정도로는 부족해."
듣고 보니 그럴듯하네. 그래도 뭔가 찝찝해서 망설이자, 라크하가 짤막하게 말했다.
“지금 막 해가 졌으니 밤이군.”
저 말에 어떤 속뜻이 담겨 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내 표정이 어떻든 라크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약서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을 그대로 따라야 하지 않겠나?”
분명히 내가 세웠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네, 그래야죠…….”
턱을 괸 라크하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제 옆을 두드렸다.
“그만 걱정하고 누워. 정말 아무런 일도 없을 테니.”
*** 눈을 떴을 땐, 나는 침대 위에 홀로 누워 있었다.
“정말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났네…….”
신기하게. 몸을 반쯤 일으켜 주변을 돌아보던 때였다. 노크소리와 함께 리타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리타 씨?”
“아, 시터님. 벌써 깨어나셨군요. 마침 잘됐네요.”
활짝 웃은 리타가 내 앞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쿠키가 담긴 접시였다.
“웬 쿠키죠?”
리타는 내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음…… 사랑의 쿠키랄까요?”
저 쿠키 이름이 사랑의 쿠키였어?
‘참 요상한 이름이네.’
누가 이런 촌스러운 이름을 지은 걸까. 그나저나 이걸 나한테 왜 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먹어도 되는 건가요?"
"네! 이 쿠키는 진짜 시터님을 위한 게 맞아요."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아하니 정말 나를 위해 준비한 쿠키가 맞는 듯했다. 주는 걸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저녁도 안 먹고 잔 터라 마침 출출하기도 했으니까.
"잘 먹을게요."
나는 짧게 감사 인사를 하며 쿠키 한 조각을 들어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버터 향과 달콤한 초코맛에 혀가 찌르르했다. 당이 떨어져 피곤한 아침에 저절로 당 충전이 되는 듯한 쿠키였다.
“아으, 엄청 다네요.”
“네, 엄청 달겠죠. 사랑의 쿠키니까요!”
너무 달아서 더 못 먹을 줄 알았는데, 은근히 중독성이 있었다.
‘맛있다.’
나도 모르게 계속 먹고 있는데 리타의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제야 리타에게 권해보지도 않고 먹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먹어볼래요?”
나는 마지막 남은 쿠키를 리타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리타는 마치 있어선 안 될 일을 겪은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사랑의 쿠키를 제가 어떻게 먹어요! 절대, 절대 먹을 수 없죠!”
……사랑의 쿠키가 그렇게나 귀한 거였어? 나는 내 손에 잡힌 쿠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맛있나 했는데.
‘너란 쿠키, 엄청난 친구였구나.’
어쩐지 침대맡에 고이 모셔 둬야 할 것 같은 이 느낌.
“공작님께서 제게 주라 명하신 건가요?”
“네네, 물론이죠.”
리타가 감격에 젖은 얼굴로 빈 접시를 꼭 끌어안았다.
“영원히 도련님과 아가씨만 데리고 사실 것 같던 공작님께서 시터님을 위해 쿠키를 준비하라 명하시다니! 이게 사랑의 쿠키가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잠시만요."
일순간 머리가 띵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조각을 리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러니까…… 이 쿠키 이름이 뭐죠?"
리타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초코 쿠키죠. 시터님, 초코 쿠키 처음 드셔보세요?"
"……."
설마, 리타가 말한 사랑의 쿠키가, '사랑이 담긴 쿠키'라는 말이었어? *** 늦은 오후, 집무실로 호출당한 시롬은 속으로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낮 내내 말도 없이 사라지시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차라리 후딱 일을 처리하고 보내주면 좋으련만. 평소와 달리 라크하의 업무 속도는 느렸다. 시롬은 처리된 서류를 재검토하며 분류하다 말고 라크하를 흘겨보았다. 라크하가 제 손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방금 전에도 그러시더니.’
저 행동을 목격한 것만 벌써 다섯 번째였다.
‘손이라도 다치셨나?’
시롬은 은근슬쩍 라크하의 손을 살폈다. 하지만 특별한 점은 없었다. 그때였다. 별안간 라크하가 메이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메이아…….”
“시터님과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시롬은 이때다 싶어 라크하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흐릿하던 라크하의 초점에 빛이 돌아왔다.
“무슨 소리지?”
“방금, ‘메이아’라고 부르신 것 같기에…….”
“내가 그랬다고?”
라크하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험악하기 그지없는 얼굴에 시롬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제가 잘못 들었나 봅니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공작님께서 여인을 생각하며 이름이나 부르고 있다니요.”
시롬은 역시 말도 안 된다며 손을 내저었다. 여자에겐 눈곱만큼 관심이 없는 라크하가 그럴 리가 없었다. 차라리 제가 잘못 들었다는 게 말이 됐다. 하지만 시롬이 웃을수록 라크하의 표정은 더욱 굳어가고 있었다.
‘……뭐야? 정말 그러기라도 했단 거야?’
불현듯 싸한 느낌을 받은 시롬은 바로 웃음을 거두고 눈을 깔았다. 그러고는 서둘러 라크하가 사인을 끝낸 서류들을 챙겼다.
“아, 아이고. 얼른 제 일이나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시롬.”
“예……?”
라크하의 부름에 시롬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멈춰 섰다. 여전히 라크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사제가 메이아라는 걸 어떻게 알고 있지?”
“일전에 시터님에 대해서 조사해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틈틈이 있어야 할 중간보고는 지나가던 개가 물어갔나 보군.”
언제는 귀찮다고 중간보고 따윈 하지 말라고 하시더니. 트집을 잡는 걸 보아하니, 제가 한 말 중에서 심기가 뒤틀린 부분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시롬은 짧게 헛기침을 한 뒤 대꾸했다.
“아직 안 물어갔습니다.”
“다행이군. 이참에 한번 중간보고를 들어보지.”
“네, 그럼 메이아 님의 신분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시롬은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을 보고했다.
“메이아 님은 리베르탄 출신일겁니다. 리베르탄에서 태어난 푸른 눈의 아이를 신의 딸이라고 부르겠다는 신탁에 따라 신전에서 데려가 키웠다고 하니까요.”
“리베르탄이라면 제르디아 제국 외곽에 있는 빈민가를 말하는 건가?”
빈민가, 리베르탄. 크고 작은 범죄가 줄줄이 일어나는 탓에 아이 한 명쯤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시롬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를 이어갔다.
“네, 맞습니다. 그리고 신전에 데리고 온 이후에 신탁이 한 번 더 내려왔다는데, 아직 일부밖에 못 알아냈습니다.”
“어떤 내용이지?”
“이겁니다.”
시롬이 겉옷 안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내밀었다. 라크하는 쪽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능력을 각성한 나의 딸이 제르디아의 안정을 되찾게 해주리라.] 단 한 줄의 내용이었지만, 라크하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들과 조합하기엔 충분한 정보였다.
“그래서 신탁도, 신의 딸도 숨겨왔던 거군.”
“네?”
“신탁이 알려지면 황제의 아킬레스건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신력이 불안정한 것에 대한 내용을 담은 신탁을 알려봤자, 민심을 흐리고 약점만 될 뿐이었다.
“아, 예. 그러다 메이아 님께서 도망치면서 어쩔 수 없이 정보가 샌 것 같습니다.”
라크하는 문득 메이아의 첫 인상을 떠올렸다.
‘계속해서 어디론가 떠나고, 도망치려고 했었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메이아는 이상하리만큼 절박하게 굴었다. 목숨에 위협을 받는 사람처럼 말이다.
“도망친 이유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보긴 했는데…… 아직까진 별다른 단서가 없습니다. 어쩌면 시터님을 통해서 직접 알아보는 방법이 더 빠를지도 모릅니다.”
“직접 알아본다고?”
라크하의 반듯한 눈썹이 들썩였다.
“예, 시터님과 친분을 쌓으면서 자연스럽게 말하도록 유도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침 시터님도 저를 나쁘지 않게 보는 것 같고요.”
시롬은 저를 호의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메이아를 떠올리며 슬쩍 웃었다. 그 순간, 라크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상하게도 시롬과 친하게 지내는 메이아를 떠올리니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됐다. 굳이 거기에 시간을 쓰지 말도록. 내가 직접 알아볼 테니.”
“네?”
뜻밖의 발언에 시롬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일을 시키지 않고 직접 알아보겠다고 할 줄이야. 또 다른 일을 시키려고 이러시는 건가?
“업무가 밀렸는데 뭘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나?”
“예, 예! 지금 막 다시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내려온 명령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