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언제까지 지켜보려고?2021.12.24.
공작이라는 명성에 비해 사치스럽지 않고, 정갈한 침실. 라크하의 침실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빛 한 줌 찾아보기 힘들었다.
'왜 이렇게 어둡지?'
의문도 잠시, 금세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넓은 창문에 암막 커튼이 꼼꼼하게 쳐져 한 점의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에도 이렇게 계속 커튼을 쳐두세요?"
“그래, 캄캄해야 푹 잠들 수 있어서 덜 피곤하거든.”
“갑갑하진 않으세요?”
“빛이 달갑지 않은데, 갑갑할 리가 있겠나.”
라크하는 태연하게 대답하며 제복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쳤다. 작게 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차에 의문이 들었다.
“평소에 샤키르의 꽃으로 잠을 이루신 거 아니었나요?”
“매번은 아니야. 양이 한정적이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이틀에 한 번 정도? 길면 삼일에 한 번 정도 사용한 것 같군.”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온 거야? 경악스러웠다. 라크하의 엄청난 정신력에 혀를 내두르는데 문득 머릿속에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래서 그런 미친 짓들을 한 건가?’
원작 속에서 라크하가 황제를 상대로 앞뒤 없이 굴던 행동들 말이다. 새삼 뒤늦게 깨달은 사실로 인해 충격에 빠져 있는데, 라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건가? 누가 보면 커튼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줄 알겠어.”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만지작거리고 있던 커튼을 놓았다. 그러고는 침대 가까이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저는 저 의자에 앉으면 될까요?”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잘 수 있나?”
“네? 앉아서는 절대 못 자죠.”
“침대에 누워.”
나를 생각해서 해 주는 말인 건 알겠으나 사양이었다.
“저는 잠을 자지 않을 거라서 괜찮아요. 그냥 의자에 앉아 있을게요.”
“자는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겠다고?”
“네, 저는 이미 충분히 잠을 잔 상태인걸요.”
“그럼 차라리 밤에 다시 부르도록 하지.”
“네?”
라크하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워준다는 말에 흔쾌히 허락했었잖아!’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가, 갑자기 왜요?”
“누가 빤히 지켜보는데 잠이 잘도 오겠군.”
“……저도 지금 침대에 누워서 함께 자라고요?”
“그래.”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대답에 머리가 띵하며 말문이 막혔다.
“어차피 앞으로 함께 잠을 자야 하지 않나.”
“그건 그렇긴 한데…….”
지금은 재워줄 생각으로 왔지, 같이 잘 생각으로 온 건 아니었기에 짐짓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내가 한 가지 놓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잠깐, 만약 지금 잔다면, 오늘 밤에는 나를 안 부를 거 아니야?’
게다가 지금의 나는 잠도 오지 않으니 여태껏 우려했던 상황도 대비할 수 있었다.
‘그냥 자는 척만 잘하면 돼.’
그래, 그러면 되는 일이었다. 다행히 라크하는 내가 입을 열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주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비장하게 말했다.
“네, 좋아요. 지금 같이 자요.”
그런 나를 보며 라크하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말과 달리 표정은 한시 빨리 도망가고 싶어 하는 토끼 같군.”
“전혀요.”
“커튼을 붙잡고 말해봤자, 전혀 믿음이 안 가.”
아차, 긴장이 된 나머지 또 커튼을 붙잡고 있었다. 커튼을 쥐고 있는 손바닥이 축축했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확답까지 했는데, 괜히 머쓱했다.
“자, 잠시 커튼을 치고 바람을 쐬려고 잡은 거예요.”
나는 헛기침을 하며 괜히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불현듯 들이닥친 햇빛에 라크하가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뿐, 다행히 크게 무어라 하진 않았다.
“그럼 그동안 침대에 앉아 있어.”
“공작님은요?”
“나는 환복을 하고 오겠다.”
“아, 네! 얼른 환복하고 오세요.”
라크하가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창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얌전히 침대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톡, 톡. 뒤에서 익숙한 듯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어리둥절해하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헙."
예상치 못한 광경에 깜짝 놀란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라크하가 등을 진 채 셔츠를 벗고 있었다.
‘다, 단추를 푸는 소리였어?’
여기서 갈아입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아무것도 못 본 거야.’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시선을 돌리려던 때였다. 라크하가 셔츠를 완전히 벗으며 그의 등이 드러났다.
“!”
나는 그대로 굳은 채 라크하의 등 근육을 바라보았다. 그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탄탄하게 박힌 등 근육이 나비처럼 날갯짓을 했다. 나도 모르게 넋을 놓은 채 감상하고 있는데, 라크하가 힐끔 고개를 돌렸다.
“뭘 그리 멀뚱히 지켜보지?”
“탄탄한 나비…….”
“나비……?”
그의 눈썹이 슬쩍 위로 치켜 올라갔다.
‘헉, 내가 뭐라고 한 거야.’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서둘러 내가 뱉은 말을 수습했다.
“바, 방금 창문 밖으로 나비가 지나갔거든요.”
내 말이 진실인지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 느껴졌다. 나는 그가 눈치채기 전에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운동을 많이 하시나 봐요.”
“오후마다 검술 훈련을 하는 것도 운동이라면 운동이겠지.”
“그렇군요.”
말을 하면서도 절로 시선이 완벽한 조각상 같은 몸으로 내려갔다. 그게 티가 났던 걸까. 라크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래서, 언제까지 지켜보려고?"
“네?”
“뭐, 계속 보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그대가 본 것에 대한 책임은 지겠지?”
“안 보고 싶거든요!”
당황한 나머지 목청이 높아졌다. 고개를 다른 쪽으로 팩 돌린 나는 양 뺨을 감싸쥐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설상가상으로 계속해서 머릿속에 방금 전 장면이 맴돌았다.
'내가 본 나비 중 가장 탄탄한 나비였지.'
아니야, 그만 생각해야지! 애써 아른거리는 탄탄한 나비를 머릿속에서 떨쳐내고 있던 그때, 환복을 하고 온 라크하가 곁으로 다가왔다.
"얼굴을 붙잡고 뭐 하고 있는 거지?"
“……방이 덥지 않나요? 더워서 열을 식히고 있었어요.”
절대로 그쪽 등 근육 생각을 하고 있었다곤 말 못 하지. 물끄러미 나를 지켜보던 라크하가 털썩 내 옆에 앉았다.
“그럼 바람을 조금 더 쐬다가 잠을 자도록 해.”
“예……?”
난데없는 배려에 얼이 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가 삐딱하게 얼굴을 기울였다.
“따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아, 아니에요.”
나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전에도 그랬지만, 참 파악하기 힘든 사람이라니까.’
멀뚱히 창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문득 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감았다. 청량한 바깥공기가 볼을 간지럽히자, 한결 열이 식었다.
‘좋다.’
마음이 안정되면서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신기하군.”
“네?”
별안간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나는 라크하를 돌아보았다. 그가 나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여유를 느낄 수 있다는 게 말이야. 난 늘 잠을 자야한다는 생각에만 급급해서 여유를 느낀 적이 까마득하거든.”
“아…….”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까. 보지 못했던 라크하의 이면에 잠깐 말문이 막혔다. 내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자, 라크하는 조소하듯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냥 헛소리를 했다고 생각해. 이만 창문을 닫고 눕지.”
“잠시만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눕기엔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라크하도 그런 여유를 느껴보고 싶다는 거잖아.’
때마침, 내겐 라크하에게 안정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게다가 능력을 쓴다고 내게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샤가 손가락 정도는 괜찮다고 했었으니까, 라크하도 괜찮지 않을까?’
고민하던 나는 라크하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음…… 잡아볼래요?”
“그대의 손을 잡으라고?”
“네, 손가락만요.”
의문을 품은 눈동자가 내 손가락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에 민망해진 나는 괜히 퉁명스레 답했다.
“까마득하다면서요.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내 말에 라크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라크하가 갑자기 시선을 거뒀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니 신경을 쓸 필요는 없어.”
“제 손가락이 머쓱하대요.”
훅 들어온 내 농담에 라크하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괜한 농담을 했나, 후회가 들려고 할 때 즈음. 라크하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내가 눈치가 없었군.”
그러고는 나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손은 공중에서 멈췄다.
“왜 그래요?”
"그대의 손은 너무 작아."
"제 손이요?"
내 손이 작다고?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얇고 길쭉한 손가락. 결코, 작은 손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크하의 손과 비교하는 순간, 그가 왜 그 말을 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손 되게 크네.'
저 손으로는 내 새끼손가락만 잡기 힘들 것 같았다. 나는 들고 있던 손을 이불 위로 내려놓았다.
"이러면 괜찮죠?"
닿기만 하면 되니까. 내려놓은 손가락 끝에 라크하의 손이 닿았다. 그와 동시에 라크하는 후, 하고 숨을 길게 내뱉었다. 마치 숨통이 트인다는 듯이.
"자, 이제 눈을 감아 보세요."
라크하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흠결 하나 없는 도자기 같은 얼굴에 기다란 속눈썹이 내려앉았다. 살랑살랑 불어온 바람이 라크하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헝클였다.
"어때요?"
"……이런 기분이었군."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났다.
"눈을 감은 채 햇빛 아래에 있는 평온함이."
나는 일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따사로운 햇살 속에, 느른하게 웃고 있는 라크하가 무척이나 행복하고 아름다워 보인 탓이었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홀린 듯이 라크하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눈을 천천히 떴다.
“그대 덕분이야. 다시는 못 느낄 기분이었을 텐데.”
햇빛 아래 반짝이는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내 덕분이라니. 내가 한 건 고작 손을 내민 것밖에 없는데. 가슴 한쪽이 찡했다.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여유와 평온함 없이 살아왔기에 그런 걸까.
"……앞으로 계속 느끼게 해드릴게요."
가만.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취해서 충동적으로 아무 말이나 뱉어버렸다. 정확히는 행복해 보이는 라크하에 취해서, 가 더 맞는 말이겠지만.
“앞으로 계속?”
“그, 그게 그러니까…….”
나는 허둥지둥대며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둘러대지?’
말실수? 혼잣말이라고 할까? 마땅한 대답을 선택하고 있는데, 침대 옆에 놓인 종이 한 장이 눈에 띄었다. 그러자, 적절한 핑곗거리가 떠올랐다.
“계약서! 네, 계약서 내용대로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말이에요. 이제 창문 닫고 올게요.”
좋아. 잘 대처했어.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하마터면, 영원히 라크하와 얽힐 뻔했다.
‘원작 속 인물들과 얽혀서 좋은 건 없어.’
접촉하고 있는 동안 순한 양처럼 보이긴 하지만 결국은 흑막은 흑막. 원작 속에서 라크하는 사람을 죽일 때에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고. 고혹적이고 잘난 외모는, 서브 남주여서 주어진 버프일 뿐.
‘절대로 마음을 주어선 안 돼.’
나는 겨우 마음을 고쳐잡았다. ***
"방금 전은 닿아도 괜찮았죠?"
"그래, 그 정도는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어."
라크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접촉 부위가 적으면, 흥분제와 같은 효과는 일어나지 않는 거니까.
"그럼 이번에도 그렇게 하죠."
그와 마주 누운 나는 머리맡에 손을 올려놓았다. 이내 조심스러운 손길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흠결 하나 없는 도자기 같은 얼굴에 기다란 속눈썹이 내려앉았다.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붉은 입술이 열렸다.
“언제 눈을 감으려고?”
“……어떻게 알았어요?”
실눈 뜨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꾹 감고 있는 눈에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시선이 보통 노골적이어야지. 지금도.”
라크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막 눈을 감으려고 했어요.”
“눈을 감고 말해야 신뢰가 가겠군.”
“지금 감고 있거든요.”
“잘했어.”
내가 퉁명스럽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느른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칭찬했다. 그리고 조금 뒤, 고른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잠들었구나.'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라크하가 얼마나 피곤했던 건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언제쯤 깨우지?'
잠든 라크하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무거운 추가 눈꺼풀을 누르는 듯한 느낌. 결국 몰려드는 잠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나타난 커다란 흑표범이 내 어깨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끄응…….”
그런데 꿈이라기엔 그 압박감이 왜 이렇게 생생한 걸까? 끙끙거리며 눈을 뜨자, 짙게 일렁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보였다.
'흑표범의 눈이 원래 보라색이었나?'
막 잠에서 깨어난 탓에 한 번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메이아."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크하가 내 위에 올라탄 채 내 한쪽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잠들면 안 됐었는데!’
자면서 몸이 닿기라도 한 게 분명했다. 눈이 마주치자, 라크하가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또 한 번 내 이름을 불렀다. 무척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메이아, 일어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