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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재워 드릴게요 (15/136)

15. 재워 드릴게요202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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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697423479.png“아, 오빠는 아직 모르겠구나. 언니랑 나랑 앞으로 같이 자기로 했거든.”

아이샤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능청스럽게 답했다. 미묘하게 라크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내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16548697423484.png“저 말이 사실인가?”

사실이겠냐. 하지만 여기서 아이샤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향후 4개월간의 시터 생활은 안 봐도 훤했다.

16548697423488.png‘계속 나를 못살게 굴겠지.’

나는 그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답했다.

16548697423488.png“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16548697423484.png“어쩌다 보니?”

16548697423488.png“네, 아이샤가 원해서요.”

정확히는 똥고집을 부려서지만. 아이샤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16548697423479.png“맞아! 언니랑 나랑 오늘부터 같이 잘 거야.”

16548697423484.png“……오늘부터?”

라크하가 어처구니가 없는지 나와 아이샤의 말을 번갈아 따라 읊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이틀 동안 시간을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아이샤와 잔다고 파격 선언을 했으니 말이다.

16548697423488.png‘나중에 따로 얘기해요.’

나는 라크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니, 이렇게 신호를 보내면 알아들을지도 몰랐다.

16548697423484.png“…….”

눈을 가늘게 뜬 채 뚫어져라 내 얼굴을 바라보던 라크하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16548697423484.png“어디 아픈가?”

16548697423488.png“……네?”

이건 또 뭔 소리야? 대뜸 아프냐는 말에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라크하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종을 잡아 살짝 흔들었다. 다이닝 룸에 대기 중이던 사용인이 다가왔다.

16548697456863.jpg“네, 공작님. 부르셨습니까?”

16548697423484.png“눈 떨림에 좋은 약을 가져오도록.”

16548697456863.jpg“네, 알겠습니다.”

잠깐. 이게 아닌데.

16548697423488.png“아뇨, 괜찮아요!”

다급히 뒤돌아, 사용인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님은 떠나간 지 오래였다.

16548697423484.png“괜찮긴 뭐가 괜찮나. 심각해 보이던데.”

16548697423488.png“누가 눈이 떨린다고, 윙크를……!”

나는 소리 높여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이샤와 델카인의 이목이 내게 총집중되어 있었다. 이러다간, 내가 라크하에게 따로 신호를 보내려고 했다는 게 들통날 터. 결국, 하려고 했던 말을 꾹 눌러냈다.

16548697423488.png“……맞아요. 피곤해서 그런지 요즘 눈 밑이 떨리네요.”

16548697423484.png“역시 내 안목은 정확하군.”

라크하는 흡족스럽게 웃으며 제 턱을 쓸었다.

16548697423488.png‘그런 걸로 뿌듯해하지 마!’

매번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귀신같이 눈치채면서, 내리는 결론은 이상하단 말이지.

16548697423488.png‘이걸 눈치가 좋다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해야 할까.’

한숨을 푹 쉬며 이마를 짚자, 델카인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16548697487489.png“형수님 피곤해?”

16548697423488.png“아…… 응, 조금 피곤하네.”

16548697423479.png“언니가 피곤하다고?”

별안간 느낌이 싸했다.

16548697423488.png‘지금 당장 같이 자러 가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내 눈떨림과 맞바꾼 대화 주제였다. 만에 하나 다시 언급됐다간 그야말로 파국이었다. 나는 아이샤의 입에서 내가 우려했던 말이 나오기 전에 가로챘다.

16548697423488.png“식사를 한 다음에 조금 쉬면 괜찮을 거야.”

하지만 아이샤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을 뿐. 왜 저러는 거지?

16548697423488.png“아이샤?”

의아한 마음에 아이샤를 부른 순간, 아이샤가 은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16548697423488.png“……!”

아이샤가 그토록 질색하던 매시 포테이토를 입에 넣었다. 사용인들을 비롯하여 다이닝 룸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16548697423488.png‘내가 뭘 본 거지?’

믿기지 않는 상황에 나 역시 입을 쩍 벌린 채 바라보았다. 한 번, 두 번. 역시나 이번에도 씹는 건 두 번으로 끝났다. 하지만 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16548697423479.png"아, 못 먹겠네."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리던 아이샤가 씹던 매시 포테이토를 냅킨에다 뱉었다. 그러더니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피곤하다고 하니 나를 기쁘게 해주려는 마음에 한 행동이었겠지만……. 저 눈빛은 분명.

16548697423479.png‘언니, 나 접시에 안 뱉고 냅킨에다 뱉었어. 얼른 칭찬해.’

그래, 딱 그 눈빛이었다. 시터로서 단 몇 분 만에 고친 행동에 대해서 칭찬을 해 줘야 하는 법.

16548697423488.png“어머, 아이샤. 지금 냅킨에다가 뱉은 거야?”

16548697423479.png“응, 내가 보기 싫은 건, 남들도 보기 싫을 거 아니야."

16548697423488.png“말한 걸 한 번에 고치다니. 역시 아이샤만큼 똑똑하고 착한 아이는 없을 거야.”

16548697423479.png“그치?”

그렇게나 칭찬이 좋은 걸까. 아이샤가 양 뺨을 붉히며 헤헤, 하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16548697423488.png‘귀여워라.’

마구 날뛰다가도 칭찬 한 번에 무장 해제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머리도 곱슬거리는 게 푸들 같기도 하고…….

16548697423479.png“언니가 드디어 내 진가를 알아주는구나.”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는 아이샤를 보며 나는 그 기회를 엿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편식 교육도 함께해야지.

16548697423488.png“이러면 조만간 야채도 먹을 수 있겠는걸?”

야채에 ‘야’자도 듣기 싫어하던 아이샤는 이번엔 다른 반응을 보였다.

16548697423479.png“물론이지! 내가 다음에 야채 먹는 거 꼭 보여줄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칭찬은 아이샤가 야채도 먹게 만든다. 하지만 라크하가 끼어들면서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6548697423484.png“어쨌든 사제는 약을 가져다주면 먹도록 하고.”

16548697423488.png“네, 알겠어요.”

라크하의 시선이 이번엔 아이샤를 향했다.

16548697423484.png“아이샤, 네가 사제와 함께 자겠다고 했던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지.”

16548697423479.png“뭐?!”

쾅. 아이샤가 테이블을 작은 두 손으로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16548697423479.png“말도 안 돼! 나랑 언니가 같이 자겠다는데, 오빠가 뭔 상관이야!”

아이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라크하는 태연하게 물을 마셨다.

16548697423484.png"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아이샤."

16548697423479.png"오빠도 언니랑 잤잖아!"

'잤잖아, 잤잖아…….' 아이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다이닝 룸에 울려 퍼졌다.

16548697423488.png'아아…… 아이샤…….'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일까. 쿨럭. 라크하가 물을 마시다 말고, 사레가 들린 듯 짧게 기침을 했다.

16548697423484.png"대체 누가 그러더냐."

16548697423479.png"오빠가 대답을 안 해주길래, 내가 물어보고 다녔지."

16548697423484.png"아무튼 안 되니, 그렇게 알고 있어."

16548697423479.png"왜! 왜 안 돼!"

내 예상대로, 라크하의 승리였다. 라크하는 물잔을 내려놓더니 엄한 표정으로 아이샤를 바라보았다.

16548697423484.png"너와 함께 자는 게, 사제한테는 시터 업무의 연장선이다."

16548697423479.png"아니야! 언니도 날 좋아해서 같이 자는 거라고."

16548697423484.png"그래서, 사제가 먼저 같이 자자고 했나?"

16548697423479.png"……."

16548697423484.png"고집을 부렸으니, 마지못해 들어준 거겠지. 사제가 좋아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니 착각하지 말도록."

내가 보는 앞에서 거짓말까지 할 수는 없었는지 아이샤의 입이 꾹 닫혔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라크하는 굳이 말을 덧붙였다.

16548697423484.png"그리고 공과 사는 구분해. 아이샤."

끝내 라크하의 마지막 발언은 아이샤의 눈물샘을 건들고 말았다. 커다란 눈에 점차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더니 아이샤가 홱 돌아 다이닝 룸을 나가버렸다. 아무래도…… 일이 커져버린 것 같다. *** 체할 정도로 서늘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나고. 나는 곧장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라크하의 뒤를 따라갔다.

16548697423488.png"공작님!"

뭐 이리 발걸음이 빨라. 거의 뛰다시피 쫓아가며 한 번 더 라크하를 부른 후에야, 그는 멈춰 섰다.

16548697423484.png"무슨 일이지?"

16548697423488.png“헉, 헉. 어디 가시는 길이에요?"

16548697423484.png"집무실을 가는 중이었다만."

정말 이대로 일하러 간다고? 나는 겨우 숨을 가다듬은 다음 입을 열었다.

16548697423488.png"아이샤를 달래주러 가는 게 어떨까요?"

16548697423484.png"아이샤의 투정을 받아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16548697423488.png"그래도 말이 심했어요."

좀 더 좋게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 아이샤가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결국 라크하의 말을 듣긴 하니까. 라크하는 피곤한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16548697423484.png“……어제도 못 잤어.”

16548697423488.png"네?"

16548697423484.png"기절한 뒤로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어렴풋이 하고 있던 내 추측이 맞음을 직감했다.

16548697423488.png“설마 잠을 못 이루시는 건가요?”

16548697423484.png“그래, 난 그대가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해.”

역시 그런 거였구나. 내가 꼭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게 이상하다고 했더니. 하지만 의아했다.

16548697423488.png“어째서 잠을 자지 못하는 거죠?”

16548697423484.png"이미 아이샤를 통해 봤겠지만, 아인티아는 흑마법을 사용하는 가문이야."

16548697423488.png“그렇군요.”

그 정보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다. 제국에서 흑마법을 기피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잠시 뜸을 들이던 라크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16548697423484.png"눈을 감으면, 망자의 소리가 들려."

16548697423488.png"……망자의 소리요?"

16548697423484.png"흑마법 중에서도 금기로 여겨지는 게 있다. 만약 그 흑마법을 쓰게 된다면 망자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

그 말인즉슨, 라크하가 금지된 마법을 썼다는 의미였다.

16548697423488.png‘그래서 그때 샤키르의 꽃을 찾고 있었던 거구나.’

그게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라크하는 지금까지 샤키르의 꽃을 통해서 잠을 이루고 있었던 거였다. 테리투스 신전 주변의 숲에서만 자라는 샤키르의 꽃을. 이번엔 샤키르의 꽃이 없어도 나 때문에 공작가로 돌아온 것이고.

16548697423484.png"그런데, 아이샤가 그대를 독차지하려 드니 어떻게 좋은 소리가 나오겠나? 게다가 이틀을 더 버텨야 할지도 모르는데."

라크하의 눈동자가 사나운 기운으로 일렁였다. 그의 말을 다시 정리해 보자면……. 첫째, 기절한 뒤로 자지 못했다. 둘째, 예민하니 건들지 말라, 였다.  

16548697423488.png"……그렇겠네요."

나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인정했다. 예를 들어, 며칠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누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침대를 가져가려 한다? 나라도 짜증이 무척 날 것 같았다. 사정을 알게 되자 어쩐지 그가 불쌍했다.

16548697423488.png‘어제 접촉 부위에 따라 능력의 강도가 달라진다고 했었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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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697423484.png“그건 왜 묻지?”

16548697423488.png“제가 재워 드릴게요.”

나를 바라보던 보라색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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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먼저 제안할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눈살을 찡그렸다.

16548697423484.png“……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지?”

16548697423488.png“어차피 오늘 쌍둥이들의 수업이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공작님이 잠을 못 이루시는지도, 접촉 부위가 적으면 괜찮은지도 몰랐거든요.”

만약 모든 정황을 알고 있었다면, 시간을 달라는 제안을 하지 않았을 텐데.

16548697423488.png“어제도 제가 그냥 가버려서, 많이 피곤하고 힘드셨겠어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시간이 괜찮은지 여쭤본 거였는데 역시 안 되시려나요?”

16548697423484.png“…….”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괜히 머쓱해진 나는 볼을 긁적였다. 하긴 너무 뜬금없고 충동적인 제안이긴 했다.

16548697423488.png"만약 바쁘신 거라면, 그냥 오늘 밤에 찾아갈게요."

16548697423484.png"지금 가지."

라크하가 휙 돌아, 앞으로 걸어갔다. 다리가 어찌나 긴지,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이러다 그를 놓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나는 황급히 외쳤다.

16548697423488.png"같이 가요!"

16548697423484.png"빨리 와라. 그대의 말대로 피곤해 죽겠으니."

냉랭한 말투와 달리 라크하의 걸음이 늦어졌다. 이상하게도 뒤에서 보이는 그의 귀 끝이 빨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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