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흑막에게 정체를 들켜 버렸다. (9/136)

9. 흑막에게 정체를 들켜 버렸다.2021.11.29.

16548695405318.png"허……?"

계약서를 잡고 있는 손이 벌벌 떨렸다.

16548695405318.png'천, 천오백 케르크?'

빙의한 이후로 있었던 힘든 일들이 싹 잊히는 기분이다. 내가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렇게나 돈을 퍼붓는다고? 믿기지가 않았다.

1654869540533.png"왜 그러지? 혹시 봉급이 만족스럽지 않은 건가?"

앞에서 들려오는 라크하의 목소리에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내가 부족하다고 하면 더 줄 기세였다.

16548695405318.png"그건 아니지만…… 왜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거죠?"

1654869540533.png"계약서 조항은 다 읽고 얘기하는 거겠지?"

아차. 1500케르크에 꽂혀서 뒷내용을 읽을 생각도 못 했다. 나는 눈을 내려 계약서를 마지막까지 꼼꼼히 읽어보았다.

16548695405318.png'숙식제공에, 죽이지 않겠다는 조항도 있고.'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계약서였다. 마지막 조항을 읽기 전까지는.

16548695405318.png'……장난해?'

그래, 아무 이유 없이 돈을 많이 줄 리가 없지.

16548695405318.png“이건 무슨 내용이죠?”

16548695405363.png

1654869540533.png"적힌 그대로야."

16548695405318.png"그러니까…… 공작님과 제가 잠을 함께 잔다고요?"

그것도 매일 밤?

1654869540533.png"아, 내가 그렇게만 적었던가? 한 가지 빠트린 말이 있군."

라크하가 태연한 얼굴로 깃펜을 든 채 내게 다가왔다. 나는 계약서가 내 목숨 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감싸 안고 뒤로 물러났다.

16548695405318.png"잠시! 잠시만요!"

이건 아니지! 어떻게든 마지막 조항만큼은 없애야 했다.

16548695405318.png"저는 쌍둥이들의 시터로 고용된 거예요."

라크하, 당신의 시터가 아니라. 그가 내게 다가오다 말고 멈춰 섰다. 그러곤 잘난 얼굴을 옆으로 기울였다.

1654869540533.png"알고 있다만."

16548695405318.png"그럼 마지막 조항은 저희가 사전에 얘기했던 내용과 부합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겠네요."

단호한 대답에 라크하가 눈썹을 슬쩍 치켜들었다.

1654869540533.png"내가 그대가 절실히 필요하다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16548695405318.png"전 공작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는데요."

1654869540533.png"아니, 있어. 마지막 조항대로 밤에 그대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대체 밤에 내가 왜 필요하냐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잠시,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단어가 있었다.

16548695405318.png‘밤 시중.’

설마……. 아니었으면 좋겠다만, 그게 아니라면 내가 밤에 필요할 리가 없었다. 심지어 노골적으로 마지막 조항에 ‘을은 갑과 밤에 함께 잠을 잔다’라고 적혀 있었고. 잠을 자자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정말 잠만 자거나, 혹은 여자와 남자 간의 그런…….

16548695405318.png'라크하가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그냥 집착이 심한 예쁜 미친놈이었지. 여자를 밝히는 놈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는 본능적으로 두 팔을 교차하여 몸을 가렸다.

1654869540533.png“……뭐 하는 거지?”

16548695405318.png“공작님께서 그런 분이신 줄 몰랐어요.”

1654869540533.png“내가 뭘?”

16548695405318.png“저는 공작님의 밤 시중을 들 수 없어요.”

허. 그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1654869540533.png“밤 시중……이라고?”

16548695405318.png“그게 아니라면, 제가 필요할 이유가 뭐가 있나요.”

1654869540533.png“그래서 추가할 말이 더 있다는데 말린 건 그대이지 않는가.”

라크하가 내가 감싸 안고 있는 계약서를 가리켰다. 나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그를 쏘아보았다.

16548695405318.png“무슨 말을 추가하시려고요?”

1654869540533.png“잠을 함께 잔다는 말 앞에 ‘손만 잡은 채’를 기입할 거다.”

어디서 개수작질이야. 손만 잡는다는 게, 포옹이 되는 거고, 키스가 되는 거고, 그리고……. 마지막 단계까지 떠올린 나는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어떻게든 이 조항을 없애야 한다! 내 이성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16548695405318.png“저, 앞으로 자기 전에 안 씻을 거예요.”

1654869540533.png“뭐……?”

16548695405318.png“머리도 일주일에 한 번 감을 거예요.”

나는 진심이 가득 담긴 얼굴로 라크하와 마주했다. 하지만 그는 흑막답게 강적이었다.

1654869540533.png“……존중해 주지.”

아니, 왜 쓸데없이 이런 걸 존중해 주냐고! 이렇게 된 이상 더 강한 수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16548695405318.png“사실 이것까지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제가 잠버릇이 심해요.”

나는 내가 주워들은 최악의 잠버릇들을 떠올렸다.

16548695405318.png“헛발질도 하고 소리 지르면서 일어나기도 해요. 물론 코 골고 이를 가는 건 기본이고요.”

1654869540533.png“그 정도면 괜찮다.”

16548695405318.png“아, 자면서 침을 뱉은 적도 있어요. 제가 공작님 얼굴에 침을 뱉을지도 몰라요.”

1654869540533.png“…….”

이래도 나랑 같이 잘 거야? 라크하는 이미 침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16548695405318.png‘끔찍하지? 자, 이제 마지막 조항은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하렴!’

기대에 잔뜩 부푼 채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올 말을 기다렸다.

1654869540533.png“심각하군.”

16548695405318.png“네, 심각하죠. 공작님께 민폐를 끼칠 수 없으니 제가 마지막 조항을 지울…….”

1654869540533.png“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나는 기분 좋게 계약서를 펼치다 말고 굳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듣고도 나와 함께 잔다는 의미였다.

16548695405318.png“왜?! 아니, 왜요?”

1654869540533.png“그대가 숨기고 있는 능력이 필요하니까.”

16548695405318.png“제 능력……이요?”

1654869540533.png“그래.”

모든 걸 꿰뚫어 볼 것 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1654869540533.png“상대를 무력화시키는 능력 같던데.”

16548695405318.png“…….”

1654869540533.png“진정시키면서 잠을 재울 수도 있고.”

내가 메이아라는 걸 알아챈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신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 문득 이를 약점으로 잡고 협박하려고 하진 않을까, 불안해졌다. 라크하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16548695405318.png‘지금 무조건 싫다고 버틸 처지가 아니잖아?’

그의 입에서 협박이 튀어나오기 전에 한시 빨리 협상이라도 시도해 보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16548695405318.png“좋아요, 공작님께서 요구하신 마지막 조항, 받아들일게요. 단, 조건이 있어요.”

1654869540533.png“조건?”

16548695405318.png“네. 만일 손만 잡은 채 잠을 잔다는 조항을 한 번이라도 어긴다면, 이 조항은 아예 없애는 걸로 하죠.”

그래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라크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4869540533.png“손 이외에 접촉할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도록. 이제 됐나?”

16548695405318.png“아뇨, 한 가지 더 있어요.”

나는 그에게 다가가 업무 책상 위로 계약서를 펼쳤다. 그러곤 가장 아래에 있는 빈 공간을 가리켰다.

16548695405318.png“무슨 일이 있어도 절 신전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숨겨주겠다는 조항을 추가해 줘요.”

라크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내가 이런 것까지 요구할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모든 건 빈틈없이, 확실하게 진행되어야 했다.

16548695405318.png“추가해 주실 거죠?”

1654869540533.png“원한다면 추가해 주겠다만 신전은…….”

16548695405318.png“그럼 얼른 적어요.”

내가 채근하자, 라크하는 얼떨떨한 얼굴로 내가 말한 내용들을 적었다. 그가 제대로 적은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16548695405318.png“사인도 하세요.”

1654869540533.png“정말 이대로 사인을 해도 되겠나?”

16548695405318.png“네, 물론이죠.”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하는 떨떠름해 하면서도 정갈한 글씨체로 제 이름을 기재했다.

16548695405318.png"펜 주세요. 저도 사인할게요."

혹여나 라크하가 마음이 변할세라 나 역시 내 이름을 빠르게 채웠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라크하가 눈을 가늘게 뜬 채 계약서에 적힌 내 이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이.

16548695405318.png“제가 잘못 적었나요?”

오타가 났나 싶어 다시 내가 적은 이름을 확인했다. 제대로 적었는데?

1654869540533.png“그대의 이름은 메미르가 아닌가?”

아직 이름이 헷갈리나 보네.

16548695405318.png“본명은 메이아잖아요.”

1654869540533.png“메이아라고……?”

처음 알았다는 듯이 묻는 말투.

16548695405318.png‘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놀란 듯 크게 뜨인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었다.

1654869540533.png“테리투스 신전의 메이아……?”

그 눈을 보며 나는 직감했다. 내가 혼자 지레 김칫국을 마시고, 정체를 밝혀 버렸다는 걸.

16548695612172.png

  ***

16548695405318.png“이, 이만 가볼게요.”

놀란 마음에 라크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집무실을 나와 버렸다. 나는 문에 기대어 선 채,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16548695405318.png‘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라.’

후에 정체를 들켜서 라크하가 언제 고발할지 전전긍긍할 일은 없을 거 아니야. 계약서에 억지로 내용을 구겨 적긴 했으니까.

16548695405318.png‘그나저나 그럼 내 능력이 라크하에게 써졌다는 거야?’

그렇다면 어떻게? 아니, 그것보단 능력이 써졌는데 나는 왜 멀쩡한 거지?

16548695405318.png'축복과는 다른 개념이라면 말이 되긴 한다만…….'

이를테면, 축복은 능력을 쓰는 게 아니라 주는 거라던가. 그런데,

16548695405318.png‘라크하는 내 능력이 왜 필요한 거야?’

끙끙거리며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때였다.

16548695612203.png"사제!"

1654869561221.png"형수님!"

아이샤와 델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들리는 거지? 아무리 복도를 둘러봐도 쌍둥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16548695612203.png"여기야, 여기!"

똑똑똑! 아이샤와 델카인이 복도에 딸려 있는 창문을 두드렸다. 아침부터 훈련이라도 했는지, 편한 복장을 차려입은 채였다. 나는 창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1654869561221.png"라크하 형이랑 얘기는 끝났어?"

16548695612203.png"우리랑 놀자!"

1층이긴 하다만 창문이 높아서 그런지 대롱대롱, 쌍둥이들의 발이 공중에 떠 있었다.

16548695405318.png"그러면 위험해. 비켜 볼래? 내가 넘어갈게."

창문이 작은 편이 아니기에 몸을 끼워 넣어 창문을 넘었다.

16548695405318.png"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1654869561221.png"아이샤가 훈련하기 싫다고 해서, 도망쳤어."

16548695612203.png"야! 그걸 말하면 어떡해!"

아, 땡땡이를 쳤구나.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 역시 저만할 때, 학원을 다니기 싫어서 딴 길로 새곤 했었으니까.

16548695405318.png"뭐, 그럴 수도 있지."

16548695612203.png"사제, 좀 마음에 드는데? 역시 내가 안목이 좋다니까."

아이샤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1654869561221.png"형도 형수님의 이런 매력에 빠졌나 봐."

16548695612203.png"사제한테 형수님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1654869561221.png"결혼한다는데, 익숙해져야지."

16548695612203.png"뭐래, 내가 결혼 못 하게 할 거거든."

아이샤가 새침하게 고개를 팩 돌리더니 나에게 다가와 돌발 질문을 던졌다.

16548695612203.png"사제, 내가 좋아. 오빠가 좋아?"

미안하지만, 둘 다 별로면 어쩌지? 차라리 델카인이 물었으면 대답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대답을 고민하고 있을 때 즈음, 델카인이 비죽이며 나와 아이샤 사이에 끼어들었다.

1654869561221.png"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당연히 형이 좋겠지."

16548695612203.png"아니야!"

1654869561221.png"네가 더 좋으면 형수님이 망설였겠어?"

16548695612203.png"……."

이번에 반박할 말이 없었는지 아이샤의 입이 닫혔다.

1654869561221.png"형수님, 우리 아이샤 빼고 놀까? 내가 저택 구경시켜 줄게."

델카인이 내 손을 잡으며, 천사처럼 생긋 웃었다. 아마 델카인에게 악동이라는 별명이 붙은 건 아이샤 때문인 게 틀림없었다.

16548695612203.png"안 돼!"

소리를 빽 지르며 다가온 아이샤가 내 반대쪽 손을 잡았다.

16548695612203.png"델카인보다 내가 더 잘 아니까 나랑…… 아……?"

아이샤는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멀뚱멀뚱 깜빡였다. 왜 그러지?

16548695405318.png"아이샤?"

내 부름에 아이샤는 화들짝 놀라더니 잡고 있던 내 손을 떨쳐냈다. 그러곤 눈을 치켜뜨며 나를 쏘아보았다.

16548695612203.png“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