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을은 갑과 매일 밤, 함께 잠을 잔다.2021.11.26.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대체 얼마나 잔 거야? 주변을 둘러보니 희미한 빛이 커튼 사이로 어슴푸레 들어오고 있었다. 새벽인가?
“……엄청 잤네.”
피곤하다 했는데, 이렇게나 많이 잤을 줄이야. 불편한 자세로 잠든 탓일까. 몸이 찌뿌둥했다. 기지개를 쭉 펴자, 바닥으로 이불이 떨어졌다.
“응?”
내 어깨에 걸쳐져 있었나? 나는 이불을 덮어준 사람을 델카인이라고 생각하며 이불을 주웠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고요히 울렸다.
‘누구지?’
나는 천천히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갔다. 똑똑, 노크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그런데 이렇게 외진 곳에 찾아올 사람이 있나?’
이상함을 느끼곤 고개를 갸우뚱하며 망설이고 있을 때 즈음. 누가 내 앞을 막아섰다.
“방으로 들어가 있어.”
라크하였다.
“이 시간에 방문하기로 한 사람이 있나요?”
“아니, 이곳을 아는 사람은 없어.”
설마 나를 찾으러 다니는 사제들은 아니겠지?
“굳이 숲을 뒤져서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목적이 있다는 거겠지. 일단 방으로 들어가 있는 게 좋을 거야.”
“……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주방으로 가서 프라이팬을 챙겨들었다.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뭐 어때.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호신용 무기인 것을.
“여기에 들어가 있으면 될까요?”
“그래.”
라크하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나는 방문에 귀를 갖다 댔다. 바깥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나으리. 이른 새벽부터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이만 꺼져줬으면 좋겠는데.”
“……예?”
정중하게 나오는 사람 앞에서 저렇게 말하는 것도 능력 아닐까? 역시 우리 흑막님은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하, 한 가지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라크하가 문을 다시 닫으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전과 달리 목소리가 다급했다.
“여자! 요 근방에서 백금발에 푸른 눈의 여자를 못 보셨습니까?”
나잖아? 끈질긴 놈들 같으니라고. 기어코 여기까지 쫓아왔나 보다.
‘여기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라크하가 이실직고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나는 라크하가 나를 숨겨주길 속으로 빌고 빌었다.
“그런 여자는 본 적도 없다만.”
흑막이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던가.
“한 번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허가증도 없이 남의 집을 살펴보겠다고?”
“허가증이라 하면, 이거면 되겠습니까?”
“황실 기사단……?”
제길. 사제들이 아니라 황실 기사단이었어? 이젠 황실 기사단까지 나서서 나를 찾아다니는 모양이었다.
“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뚜벅뚜벅. 여러 명의 투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프라이팬을 손에 꼭 쥐었다.
‘원샷 원킬. 조금의 실수도 있어선 안 돼.’
다행히 그들이 먼저 향한 곳은 내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여긴 내 동생들의 방인데 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좀 사납거든.”
맞아, 보통 사나운 게 아니지. 어렴풋이 들려오는 라크하의 목소리에 나는 공감했다.
“……예?”
“난 분명히 경고했어.”
그 뒤로 잠시 조용했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그리고.
“으, 으아악!”
“저 새끼는 뭔데 쳐들어와!”
“잡아 족쳐, 아이샤!”
“시키지 마! 알아서 할 거니까!”
……괜히 아인티아의 악동들이 아니구나. 그냥 쌍둥이들한테 맡기고 가만히 있으면 되려나?
‘아니지. 이불이라도 덮어쓰고 있는 게 좋겠어.’
혹시나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 내가 누군지 들키면 안 되니까. 하지만 라크하의 방에는 이불이 없었다.
‘침대 커버라도 쓰고 있자.’
나는 침대 커버를 벗겨낸 뒤 머리 위로 덮어썼다. 그렇게 모든 일이 처리될 때까지 기다리던 그때.
“악!”
델카인의 비명소리가 귀에 꽂혔다. 유일한 내 편. 내 천사의 비명소리 말이다.
‘이것들이 지금 델카인한테……!’
욱한 마음과 달리 나는 소심하게 문을 열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소심함 따윈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망할 꼬맹이! 어딜 무는 거냐!”
“으윽!”
델카인이 기사 한 명에게 팔에 잡힌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라크하는 도와주기는커녕 시험하는 것처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고.
“이 망할 놈들아아아아! 놓지 못해?!”
프라이팬을 들고 뛰어간 나는 그대로 기사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댕~ 시원한 울림과 함께 기사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때마침, 아이샤가 나머지 한 명을 쓰러트리며 상황은 종료되었다.
“…….”
손이 덜덜 떨렸다.
‘내, 내가 사람을 쳤어.’
머리를 내려치면서 손에 느껴졌던 진동이 아직도 생생했다. 침묵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아이샤였다.
“봤어? 봤냐고! 역시 내가 고용한 사람이라니까!”
“당연하지! 내가 가장 가까이 있었는걸.”
“사제……! 짱 멋있어!”
“형수님, 감동이야…….”
쌍둥이들이 존경 어린 눈빛을 보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나를 향한 라크하의 싸늘한 눈빛 때문에.
‘이제 눈치챘겠지……?’
내가 이 프라이팬으로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다행히 라크하는 지금 당장 따지지 않았다.
“저놈들이 깨어나기 전에 얼른 돌아가도록 하지.”
하지만 차분한 라크하의 목소리가 유독 무섭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마차는 멀지 않은 곳에 대기되어 있었다. 방금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은 아인티아 공작가로 따라가는 게 안전했다. 마차를 타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쌍둥이들은 여전히 흥분 상태였다.
“사제! 어떻게 프라이팬을 무기로 쓸 생각을 한 거야?”
“맞아, 형수님! 그게 엄청난 무기가 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음……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
나는 라크하를 흘겨보며 대답했다. 들었지? 나는 프라이팬을 무기로 쓸 생각이 없었던 거야. 물론 내가 생각해도 티가 나는 거짓말이긴 하다만……. 생존을 위해서 뭘 못 하겠는가.
“사제가 망토 같은 걸 쓰고 달려오더니 프라이팬으로 딱! 크으!”
“내가 최근에 읽던 위인전인 줄 알았다니까.”
그 뒤로도 쌍둥이들은 저들끼리 신나서 떠들기 바빴다. 쌍둥이들의 흥분이 가라앉으며 조용해졌을 때 즈음.
“이봐, 사제.”
라크하가 나를 불렀다. 이젠 익숙해진 호칭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네?”
“황실 기사단이 왜 그대를 찾는 거지?”
“저를 찾았나요?”
모르쇠 수법. 불리할 때 가장 쓰기 좋았다.
“백금발에 푸른 눈의 여자를 찾는다고 하더군.”
“우연의 일치일 거예요.”
“…….”
순식간에 마차 안의 공기가 냉랭해졌다. 다행히 쌍둥이들이 나서며 얼음장 같던 분위기는 깨졌다.
“오빠, 왜 사제한테 무섭게 굴어! 우릴 구해 주려고 했는데.”
"맞아. 그것도 프라이팬으로!"
"얘들아……."
나는 감동을 받은 눈으로 쌍둥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번 기회에 내가 쌍둥이들의 마음을 크게 얻었나 보다. 역시 너희밖에 없…….
“사제, 이렇게 오빠가 못되게 구는데 결혼하지 마. 내가 잘할 테니까 그냥 내 거 해.”
응?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내가 반응을 보일 새도 없이 아이샤는 뿌듯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 좀 멋있는 말 한 것 같은데.”
“전혀.”
델카인이 한심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형수님이 미쳤다고 네 거가 되겠다고 하겠어?”
“뭐 어때. 어차피 내가 고용했으니, 이미 언니는 내 거야.”
저런 기적의 논리는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다행히 델카인이 내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어?”
“넌 조용히 해. 사제! 사제는 내 거 맞지?”
아이샤가 내 눈을 똑바로 주시하며 물었다.
“음…… 그게…….”
이걸 어떻게 얘기하는 게 좋을까. 대답하기 곤란할 때 끼어들어 준 건 고맙지만……. 그래도 올바른 개념을 심어줘야겠지?
“아이샤. 고용했다고 해서 누군가가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야.”
나름 친절하고 명료하게 대답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별안간 아이샤의 눈빛이 거센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아니, 넌 내 거야."
"아이샤……?"
"라크하 오빠가 아니라 내 거라고.”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난 내 건 절대 뺏기지 않아.”
나를 바라보는 아이샤의 눈동자가 집착으로 들끓었다.
‘집착의 대명사는 라크하 아니었어?’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지그시 상황을 지켜보던 라크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이샤.”
“뭐야.”
아이샤의 맹랑한 시선이 라크하를 향했다.
“제 것을 누구에게 뺏기지 않는다. 좋아, 아주 바람직한 자세이긴 해.”
말리지도 못할망정, 불을 붙인다고?
“하지만 상대를 보고 선택해야지. 엄연히 고용 권한이 있는 사람은 나다.”
“그래도 내가 먼저 사제를 고용하고 싶다고 했으면 내 거지.”
라크하는 아이샤의 말을 비웃듯 픽 웃었다.
“좋아,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뺏기지 않도록 해 봐.”
……그대로 마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 공작가로 돌아온 라크하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집무실이었다. 쉴 틈은 없었다.
‘계약서부터 써야겠군.’
메이아를 붙잡아 놓으려면 계약서는 필수였다. 게다가 황실에서 나서서 찾는 인물이라. 분명 샤키르의 꽃과 유사한 능력 때문일 터.
‘뺏길 순 없지.’
샤키르의 꽃이 없는 지금은 더욱. 라크하는 빈 종이와 펜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차근차근 항목을 기입했다. 봉급, 계약 위반 시 불이익 등 기본적인 내용들과 대화로 나눴던 조항들까지. 빠짐없이 모든 내용을 작성했을 때였다.
“헉헉,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라크하의 보좌관, ‘시롬 이라기’가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라크하는 시롬을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내가 없는 사이 잔뜩 풀어졌군.”
“아닙니다! 저는 언제나 초심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럼 초심을 한 번 확인해 볼까?”
“……예?”
그러려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요? 시롬은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냈다.
"최근에 황실과 관련된 소식은?"
"화, 황실 말입니까?"
"전에는 술술 읊더니 초심이 다 죽었군."
"아, 아닙니다!"
시롬은 세차게 고개를 내저으며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황실은 아니지만, 어제부터 테리투스 신전에 신의 딸이 나타났다고 주변 일대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신의 딸……?"
"이름이 메이아…… 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라크하는 문득 숲에서 들었던 기사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축복의 의식', 황제는 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 터.
"무슨 능력이 있기에 신의 딸이라 불리는 거지?"
"그 점에 대해선 더 조사를 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오늘 함께 공작가로 온 여자의 정체와 함께 조사해 오도록 해. 대신 그 누구도 알지 못 하게끔 홀로, 은밀하게 움직이도록."
라크하의 명령에 시롬은 침울해졌다. 조사, 잡다하면서 가장 귀찮은 업무였다. 이리저리 발로 뛰어다니면서 정보를 구해야 하는 거니까. 게다가 은밀하게 홀로 움직이라니. 그렇게 되면 일은 몇 배나 더 늘어나는 것과 다름없었다. 시롬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그리고 하녀를 시켜서 그 여자에게 지금 집무실로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으로 시롬이 집무실을 나간 뒤. 라크하는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아니지. 가장 중요한 걸 잊을 뻔했다. 라크하는 펜을 들어, 계약서 가장 아래 항목에 내용을 추가로 기입했다. [을은 갑과 매일 밤, 함께 잠을 잔다.] 물론 봉급을 1000케르크에서 1500케르크로 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