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환심을 사서 나쁠 건 없잖아?2021.11.22.
결과적으로 우려하는 일은 없어졌으니 나쁘지는 않다만, 자못 당황스러웠다.
‘내가 해가 되지 않는다니?’
라크하와 지낸 시간은 고작 하루. 그 사이에 내가 한 짓을 생각해 보면 사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어딜 봐서 내가 해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을 내린 거야?’
진지하게 고민하던 찰나 벌컥, 문이 열리며 델카인이 들어왔다.
“형, 다녀왔어.”
“아, 생각보다 빨리 왔군.”
“음…… 뭔가 이상해서.”
“무엇이?”
“이거 봐.”
라크하의 앞으로 걸어온 델카인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쌍둥이들을 쫓아내면서 뭘 시킨 모양이네.’
나는 델카인의 손에 있는 걸 흘겨보았다. 본래 무슨 색이었는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갈색으로 시든 꽃이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있어도 얘처럼 전부 시들었고.”
“이게 뭔가요?”
“그대는 몰라도 된다.”
“샤키르의 꽃이야.”
내 질문에 라크하와 델카인이 동시에 대답했다. 전혀 정반대의 대답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기류에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델카인, 아이샤도 같이 찾았는데도 없었던 거야?”
“아니, 나 혼자 살펴보고 왔어. 아이샤는 방에 들어간 이후로 나오질 않아서.”
토라진 것 같더니 아직 풀리지 않았구나.
“그럼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을 수도 있겠군.”
“있을 만한 곳은 보고 오긴 했어. 특히 작년에 많이 발견했던 곳들을 위주로.”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직접 확인해 보고 오도록 하지.”
라크하가 시든 꽃을 다시 델카인에게 건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크하가 외출한다.’ 내게는 희소식이었다.
‘드디어 혼자 쉴 수 있으려나?’
아이샤도 방에서 나오지 않으니 라크하까지 나간다면 이제 마음 놓고 쉴 수 있을 터. 연신 숨이 막히는 상황 속에서 벗어날 생각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라크하가 나를 보며 턱짓했다.
“사제, 그대도 함께.”
제발 나 좀 내버려 두면 안 될까?
*** 나와 라크하는 외출을 함께하니 마니로 몇 분 째 다투는 중이었다.
“저는 안 나갈 거예요.”
나갔다가 신전 쪽 사람들과 만나면 끝장이었다.
‘여유롭게 꽃이나 찾으러 다닐 정신 따위 없다고!’
이리저리 주변을 살펴 가며 사제들의 눈을 피해 다녀도 모자랄 판이었다. 하지만 라크하는 내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지?”
“그런 거 없어요.”
“이유도 없이 나가지 않겠다고 하는 건가?”
“이유가 있으면 절 데리고 나가지 않을 건가요?”
“듣고 생각해 보지.”
라크하가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나를 주시했다. 그런다고 내가 순순히 말할 줄 아는가.
“알려드린다면 절 두고 나가실 건가요?”
"……알겠으니 말해."
라크하는 나와의 오랜 말다툼에 지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나는 싸우는 내내 준비했던 변명거리를 꺼냈다.
“일단 첫 번째, 옆구리가 찢어져서 나가기 민망해요.”
“팔만 들어 올리지 않으면 티가 나지 않는다만.”
“계속 신경쓰이는 걸요. 누가 찢어진 옷을 입고 밖에 나가나요?”
나도 나름 부끄러움을 아는 여자라고. 은근히 설득력이 있었는지 라크하는 별다른 반박 없이 입을 다물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두 번째, 제가 집순이거든요.”
집순이란 단어를 잘 모를 라크하를 위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다시 말해서 외출을 별로 안 좋아해요.”
“…….”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든 말든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자, 얘기해 드렸으니 이제 혼자 갔다 오셔요.”
“그런 걸 변명이랍시고 하는 건가?”
“변명이라뇨. 거짓 하나 없는 진실들이었는걸요.”
전혀 양심이 찔리지 않는걸? 당당하게 라크하와 눈을 마주하고 있던 무렵. 물끄러미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델카인이 나를 보조해 주었다.
“형,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예상치 못한 구원자의 등장이었다.
“약속은 중요한 거니까. 그렇지, 형수님?”
내 곁으로 다가온 델카인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구원자가 아니라 천사인가? 델카인의 등 뒤로 천사의 날개가 보이는 것만 같다. 형수님이라 부르면 어떠하리. 삭막한 세계에서 유일한 내 편인데!
“응, 중요하고말고.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지.”
“형도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걸 아는데 잠시 깜빡 잊은 것뿐이겠지?”
“맞아, 공작님이 모르실 리가 없잖아.”
나와 델카인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라크하는 당황한 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건 가장 기본이거든. 잘 기억해 둬야 해. 알겠지, 델카인?”
“응!”
“착하다. 대답도 잘하고.”
나는 활짝 웃으며 델카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라크하의 매서운 시선이 화살처럼 꽂혔다. 하지만 나는 ‘지금 교육을 하고 있다’며 속으로 되뇌었다. 흔들릴 순 없었다. 아직 교육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잘 봐. 공작님께서 이제 모범을 보여주실 거야.”
“정말?”
기대 가득한 델카인의 대답과 눈빛을 마지막으로 라크하는 백기를 들었다.
“……다녀오지.”
흑막도 2대 1 아니, 제 혈육의 교육 현장 앞에서는 약했다. *** 델카인의 도움으로 나는 오두막집에 있을 수 있게 됐다. 물론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운 협박을 받긴 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도망친다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겠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드는 협박이란. 무척 신박하고 아찔했다. 아직 내가 도망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 이거 마셔.”
까치발을 들어가며 주방에서 꼼지락거리던 델카인이 내 앞에 물을 내밀었다.
“고마워, 델카인.”
앞뒤 양옆으로 굴러 봐도 델카인은 천사였다.
‘어쩜 같은 핏줄끼리 성격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지?’
눈이 마주치자 델카인은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형수님.”
“응?”
“그…… 미안해.”
대체 뭐가? 델카인이 나한테 미안해할 일이…….
‘헉, 설마.’
나는 내가 마셨던 물잔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에 뭐라도 탄 거야?
‘아무도 믿어선 안 됐는데!’
특히 아인티아 핏줄은 더욱.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자, 잠시만.”
“형수님이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델카인, 아무리 그래도 이건 내가 이해해 줄 수가 없어.”
델카인이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노력해 주면 안 될까?"
"노력……?"
"응, 형이 좋은 쪽으로는 표현을 잘 못 하거든.”
응?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뭘 탄 게 아니었어?
"분명 마음으로는 형수님을 무척 좋아하고 있을 거야."
그래, 내가 썩었던 거였다. 별안간 얼굴 위로 열이 올랐다.
“흠흠, 델카인이 오해하고 있는 게 있는데 나와 공작님은 아무런 사이가 아니야.”
응?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마치 안쓰럽다는 듯이.
“나한테는 숨기지 않아도 돼. 얼굴까지 빨개질 만큼 형한테 화가 많이 났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역시 형수님도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어. 형이 조금 모질게 굴긴 하던데 그래도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야.”
그것도 아니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말문이 턱 막혔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이 안 나온다더니 사실이었다.
“내가 장담할게. 나는 지금까지 형이 여자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 처음 봤거든.”
“저기…… 델카인, 있잖아. 전부 오해야.”
“아니, 책에서 그랬어. 말로는 사람을 속일 수 있어도 눈은 못 속인다고.”
“…….”
내가 무어라 해야 확신에 가득 찬 델카인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아니, 바꿀 수 있긴 할까? 이미 오해의 소지가 있는 현장들을 모두 직접 목격한 델카인을 설득하는 건 최고의 난이도였다. 델카인이 나를 달래듯 작은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형수님이 화가 난 건 이해해. 그래도 날 봐서라도 형을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약간의 의심 하나 없는 순수한 눈빛. 저 눈빛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할까. 결국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여기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델카인일지도 몰랐다. ***
“이런.”
숲을 한 바퀴 돌아본 라크하는 눈살을 찡그렸다. 샤키르의 꽃의 부재라.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큰일이군.”
샤키르의 꽃은 온전히 황가와 신전의 소유였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몰래 구하러 나오는 게 아니라면 얻을 수 없었다.
'다시 한번만 더 돌아보자.'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신전으로 불러놓고는 꽃이나 찾으라고?"
멀리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라크하는 황급히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어깨에 걸쳐진 망토 위로 새겨진 늑대 문양의 금장. 황실 기사단이었다.
'황실 기사단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이곳에서 황실 기사단을 본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쩌겠어. 축복의 의식이 중단됐는데."
"왜 중단됐는데?"
"내가 그걸 알 만한 사람이라면 너랑 같이 꽃이나 찾으러 다녔겠냐. 폐하 곁에서 호위나 하고 있겠지."
'축복의 의식이 중단되었다.'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요즘 이상할 정도로 잠잠하다 했더니.'
신전과 은밀하게 일을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그나저나 정말 사제들이 말한 대로 꽃이 하나도 없네?"
"그러게 말이야. 내 눈이 이상한 건 아니지?"
"차라리 이상했으면 좋겠네. 암울할 때 좋은 소식을 들고 가면 상이라도 받을 텐데."
"꿈 깨라, 꿈 깨. 얼른 돌아가서 보고나 하자."
기사단은 투덜거리며 신전 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라크하는 방금 들은 정보를 정리했다. 첫 번째, 황제는 축복의 의식을 받으러 신전에 왔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의식이 중단됐다. 두 번째, 꽃의 행방은 황실과 관련이 없다. 세 번째, 지금 개화한 꽃은 없다. 그렇다면…….
“그 여자가 꼭 필요하게 되었군.”
메미르, 샤키르의 꽃과 비슷한 능력을 지닌 여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과까지 하며 시터를 그만두겠다는 걸 말렸는데 잘된 일이었다. 대신 조금 곤란한 점이 있긴 했다.
-왜 이렇게 좋지?
-계속 불러도 돼. 앞으로 쭉.
잔뜩 풀어진 채 엉겨 붙어 있는 저를 바라보며 당황해하던 메이아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샤키르의 꽃을 왕창 갈아 마신다면 그런 기분일까.’
쉽게 말하면,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이성의 제어를 잃은 정신과 몸은 오로지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접촉이 매개체인 것 같았지.’
‘접촉’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긴 했다. ‘레이나 아드리엔’, 접촉만으로 잠을 재울 수 있는 자. 최근에 수소문 끝에 찾은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는 레이나와 외양이 달랐다.
‘어쩌면 비슷한 능력일지도.’
뭐가 됐든 확실했다. 메미르, 그녀를 놓쳐선 안 된다는 건. 라크하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옷을 사 가야겠어.”
살벌한 눈빛에 비해 그가 생각한 건 지극히 단순했다.
'옷이 찢어져서 꽤 속상해하는 것 같았으니까.'
앞으로 신세를 질 그녀에게서 환심을 사서 나쁠 건 없었다. 그리 결론지은 라크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을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 할 말을 마친 델카인은 아이샤를 달래러 가야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혼자 남은 메이아는 쓰러지듯 스르륵 탁자 위로 엎드렸다.
“피곤해 죽겠네…….”
입술 사이로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틀 연속으로 정신없고 긴장감이 넘치는 하루였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잘까.’
긴장이 풀린 나머지 눈이 연신 감겼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끼이익. 문이 열리며 외출했던 라크하가 돌아왔다. 그는 마을에서 사 온 간소한 여성복을 내려둔 뒤 메이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거기 엎드려서 뭐 하는…….”
라크하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을 줄이야. 의자를 당겨 옆에 앉은 라크하는 물끄러미 메이아를 바라보았다.
'잘도 자는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여자가 앞으로 제게 꼭 필요한 여자라니. 그때, 살짝 열려 있는 문 사이로 델카인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형, 왔어?”
라크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제가 수상한 짓은 하지 않던가?”
“응, 전혀. 계속 잠만 자던걸.”
방에서 나온 델카인이 메이아를 흘겨보며 대답했다.
“아이샤는 아직 토라져 있나?”
“응, 고집이 워낙 세잖아.”
“아니거……!”
쿵. 불시에 닫힌 방문에 날 선 아이샤의 목소리가 잘렸다. 그 광경에 델카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라크하가 메이아를 걱정해서 문을 닫은 게 틀림없었다.
‘역시 형은 사제를 좋아하는구나.’
제 안목은 훌륭했다. 오늘 낮에 형의 입장을 대변해서 말해두길 잘했다. 의미심장한 델카인의 눈빛에 라크하가 눈가를 좁혔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응? 아니야.”
델카인을 의심스럽게 훑어보던 라크하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여하튼 내일 오전 중으로 돌아갈 예정이니 그리 알고 있도록.”
“알겠어. 나는 이만 방에 들어갈게. 이제 졸려.”
델카인은 하품을 하는 척을 하며 방문을 열었다. 얼핏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초창기 연인을 위해선 자리를 비켜주는 게 예의라고. 끼이익. 닫히는 방문 사이로 델카인이 즐겁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형, 좋은 시간 보내.”
*** 그리고 이른 새벽, 오두막에 불청객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