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똥강아지들과 대형견 한 마리2021.11.19.
형수님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한 발언에 얼이 빠졌다.
"사제한테 형수님이라니! 말도 안 돼! 듣기 싫어!”
아이샤가 결혼을 반대하는 시어머니처럼 눈을 치켜세웠다. 그런 아이샤가 이해되지 않는지 델카인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왜? 너도 형이랑 사제랑 연애하는 것 같다며.”
"형수가 되는 건 다르지! 결혼한다는 거잖아!"
"할 만하잖아. 사제가 라크하 형도 살려줬는걸?"
"그게 뭔 상관이야!"
옳지 말 잘한다. 아이샤! 쌍둥이들의 말다툼은 꽤 흥미진진했다. 내게 달라붙어 있는 라크하를 떼어내야 한다는 것도 잊을 정도였으니까.
"형이 읽어준 책에서 목숨을 구해준 사람은 운명이라고 했어. 기억 안 나?"
"너야말로 우리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한 건 생각 안 나나 봐?”
“그러니까 운명이라고 하는 거겠지.”
“아아, 몰라. 어쨌든 듣기 싫다고. 그만 말해."
귀를 후벼파며 시큰둥하게 굴던 아이샤가 끝내 귀를 막았다. 저건 조금…… 얄미운데? 델카인이 눈가를 좁히며 귀를 막고 있는 아이샤의 손을 주시했다.
"귀 막지 마, 아이샤."
"아아아, 안 들린다. 어디서 개가 짖나.”
델카인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평정심을 되찾은 델카인은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멍청이라 개가 말하는 건지 사람이 말하는 건지 구분도 못 하지?”
“지금…… 나보고 멍청이라고 한 거야?”
귀를 막고 있어도 들렸나 보다.
“그럼 누굴 멍청이라 하겠어?”
“야!”
우당탕-! 불안불안하던 말다툼은 결국 몸싸움으로 번졌다.
‘헉. 가만히 지켜볼 때가 아니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라크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른 라크하를 떼어내야 애들을 말리든 뭐든 할 수 있을 터.
“공작님.”
“…….”
몇 번을 더 불러봤으나 라크하는 내 목에 얼굴을 파묻은 채 미동도, 대답도 없었다.
‘설마…… 잠든 건 아니지?’
그 와중에도 목청이 높은 쌍둥이들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야라고 하지 마! 내가 아이샤 너보다 더 빨리 태어났거든?"
“네가 언제부터 그걸 따졌다고! 고작 1분 차이밖에 안 나면서!”
“1분이 얼마나 큰 줄 알아? 아, 멍청이여서 모르려나?”
“야! 내가 멍청이라고 하지 말랬잖아!”
“악! 놔! 멍청아!”
깜짝이야. 델카인의 신음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아이샤가 델카인의 머리를 끄집어당기고 있었다.
“멍청이라고 했던 거 취소해!”
“나라고 못 잡을 것 같아?”
델카인도 아이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이러다가 유혈 사태가 일어나겠는데?’
나는 라크하를 뒤로하고 쌍둥이들을 불렀다.
“얘들아, 그만해!”
“꺄악! 아프잖아! 놔!”
“먼저 잡은 건 아이샤, 너야!”
“……아이샤, 델카인?”
“그럼 멍청이라고 하지 말던가!”
“넌 어디서 개가 짖는다고 했잖아!”
아, 내 말은 안 들리는구나. 정신없는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런 걸 보고 개판이라고 하는 걸까?’
서로를 보며 왈왈 짖어대는 똥강아지들. 그리고 내게 엉겨붙는 대형견 한 마리. 기막힌 삼합이었다. 이대로는 쌍둥이들 싸움을 말릴 수 없을 터. 나는 다시 가장 가까이 있는 라크하부터 공략하기 시작했다.
"저기요, 공작님. 잠드신 건 아니시죠?"
"……."
끄응. 정말 잠든 거야? 이걸 어쩌면 좋지? 워낙 덩치가 커서 힘을 준다고 밀어지지도 않고……. 고민하던 나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라크하?”
“응.”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린 라크하가 나를 주시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가 사르르 휘어졌다.
“불렀어?”
“…….”
'홀린다'라는 기분이 이런 거려나. 하마터면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치명적인 얼굴에 휩쓸릴 뻔했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다 말고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저…… 우선 멋대로 이름을 부른 건 죄송해요. 어떻게 불러도 반응이 없으셔서 어쩔 수 없었어요.”
"계속 불러도 돼. 앞으로 쭉.”
라크하가 느른하게 미소 지으며 내 어깨에 제 뺨을 비볐다. 흡사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대형견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주먹까지 말아쥐며 미인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어쨌든 애들 싸움이 더 격해지기 전에 말려야 할 것 같은데…….”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커.”
애초에 말릴 생각이 없었던 거구나.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럼 저 좀 놔주시겠어요?”
나라도 쌍둥이들을 말려야 할 것 같으니까. 라크하의 어깨를 잡고 밀어내 보려던 때였다.
“내 머리카락…….”
오싹.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낯선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어제 낮에 봤던 검은 기운이 아이샤 주위로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라크하의 등을 두드렸다.
“고, 공작님? 저기, 저기 좀 봐요!”
애타게 부르고 흔들어 보아도 라크하는 잔뜩 풀어진 얼굴로 내게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미치겠네, 정말 왜 이러는 거야!’
검은 기운은 점점 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델카인, 너 때문에 왕창 뽑혔잖아!”
“먼저 잡아당긴 건 너야.”
“아직 흑마법도 못 쓰는 게 힘만 더럽게 세!”
“차라리 그게 낫지. 아이샤, 넌 머리에 든 것도 없으면서.”
“으으…… 가만 안 둬!”
아이샤의 외침과 함께 검은 기운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가뿐히 아이샤의 공격을 피한 델카인이 뒤돌아 소리쳤다.
“형수님! 피해!”
그 순간, 줄곧 내 허리를 두르고 있던 라크하의 팔이 풀렸다. 그리고. 콰앙! 순식간에 피어오른 라크하의 검은 오라가 아이샤의 공격을 튕겨냈다.
“…….”
한쪽 땅이 얕게 파인 자국을 보니 간담이 서늘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놀란 심장을 달래고 있을 무렵.
“아이샤, 델카인.”
주변을 꽁꽁 얼려 버릴 것 같은 차가운 음성이 고요히 울려 퍼졌다.
“오, 오빠 그게 그러니까…….”
“잘못했어, 형.”
“얍삽하게 갑자기 너 혼자 사과하기야?!”
“아이샤.”
라크하의 경고어린 부름에 아이샤는 억울해하면서도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라크하가 한숨을 짧게 내쉬며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흑마법을 쓴 일에 대해선 돌아가면 벌할 테니 그리 알고 있도록 하고.”
“하지만……!”
“침입자가 나타났을 때나 목숨을 위협받는 일이 아닌 이상, 분명히 흑마법을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건 맞긴 한데…… 델카인이 오빠랑 사제가 결혼한다고 하잖아!”
“결혼……?”
라크하가 눈가를 좁히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래, 모든 원인은 저기서부터 시작됐었지.
“둘이 언제 그런 사이가 된 건데! 정말 사제랑 결혼하기라도 할 거야?”
눈을 부릅뜬 아이샤가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잠깐, 지금 이 상황은…….’
로판 n년차. 내 경력이 말하고 있었다. 흑막에게 코가 꿰이기 직전인 상황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라크하의 앞을 막아섰다.
“잠시만요, 제가 전부 설명할게요.”
“우리 사이의 일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나? 그대가 내게 이상한 술수를 써서 일어난 일인 것을.”
“제가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밀어내도 이상하게 굴며 엉겨붙을 때는 언제고, 내 탓을 할 줄이야.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나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엉망으로 만들어 놓다니, 어감이 이상하잖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애들이 오해하잖아요!”
“사실을 얘기했을 뿐인데 애들이 뭘 오해한다는 거지?”
말문이 턱 막히던 그때.
“봐, 내 말이 맞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쌍둥이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샤, 이제 인정할 때도 됐어. 우리가 못 알아들을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잖아?”
응? 잠깐, 설마…… 정말 오해한 거야?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한 박자 늦게 깨달은 나는 말려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짜증 나!”
쿵! 귀가 쩌렁쩌렁할 정도로 크게 고함을 지른 아이샤가 문을 닫고 들어갔다. 닫힌 문을 보며 나는 탄식했다. 뭔가…… 아주 제대로 꼬이고 있었다.
*** 왜 내 인생은 노력을 해도 풀리기는커녕 더 꼬이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 눈앞에 있는 탁자에 머리라도 콩콩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마 내 앞에 앉아 있는 라크하만 없다면 이미 머리를 박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자, 이젠 애들도 없으니 솔직하게 말했으면 하는데.”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요.”
벌써 이 말도 몇 번째 했는지 모르겠다. 내 대답에 그의 정갈한 눈썹이 꿈틀했다.
“좋게 물을 때 얘기하는 게 좋을 거야.”
“정말이에요.”
“하.”
라크하가 한숨 같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돌이표 같은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한 가지 있었다.
‘라크하도 원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는 거야?’
그럼 나한테 흑막을 다루는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약간의 희망을 엿본 것도 잠시,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엑스트라한테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그냥 황제한테 축복만 내려주는 인간 제물일 뿐이겠지. 황제의 몸 상태를 안정시켜 잠을 자게 할 수 있는 축복 말이다.
“그럼 아무 이유 없이 나 혼자 날뛰었다고?”
라크하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이해한다. 무척 수치스럽겠지. 모든 걸 내 탓으로 하고 싶었는데 아니라고 하니 당황스럽기도 할 테고.
“저…… 공작님.”
“이제야 얘기해 줄 마음이 생겼나?”
“아뇨, 그게 아니라…… 음, 제가 입이 굉장히 무겁거든요.”
“그래서?”
“못 본 척해드릴게요.”
“…….”
왜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는 거야. 아, 못 본 척하는 걸로는 부족한 건가?
“그러니까…… 저희는 오늘 아무 일도 없었던 거예요.”
이번 대답은 만족하길. 나는 은근히 기대하며 슬쩍 라크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험악하게 굳은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떤 걸 원하는 건데!’
도무지 저 남자의 속을 알 수가 없다.
“그렇게나 싫었나?”
“예?”
“싫었냐고.”
“뭐가요?”
무얼 얘기하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라크하가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하……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드디어 내가 미쳤나 보군.”
맞아, 당신 아주 제대로 미쳤지. 그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잔뜩 날이 선 눈빛이 나에게 향했다.
‘아차, 나도 모르게…….’
나는 라크하를 마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고 하지 않던가.
“웃지 마. 짜증 나니까.”
“넵.”
우리 흑막님은 다르신가 보다.
‘이러다 뭐든 트집을 잡을 기세인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예의 바르게 두 손을 곱게 모아 무릎 위로 올렸다.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라크하가 입을 열었다.
“만일 그대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저택으로 돌아가 사람을 시켜 그대의 정체에 대한 조사를 할 예정이야.”
“……그렇군요.”
무성의한 대답에 라크하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했을 뿐, 정작 내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어쩌지? 만약 조사를 해서 내가 누군지 알게 된다면, 나를 신전으로 보내려고 할 텐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끼이익. 의자에서 일어난 라크하가 천천히 내 곁으로 걸어와 탁자 위로 손을 짚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그리 답하는 건가?”
“……어차피 저에 대해서 알게 될 테니 지금이라도 제가 누군지 순순히 밝히라는 말씀이신 거 아닌가요?”
“그래, 그리고 나를 제외하고도 공작가에 그대에 대해 아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그게 무슨 상관이죠?”
나는 최대한 당황한 얼굴을 숨겼다. 여기서 동요하는 티를 보이면 약점만 잡힐 뿐이니까.
“만약 그대가 수상한 인물이라면, 개중 누구는 반발을 할 테지. 쫓아내거나 그대를 죽이라고.”
나긋하고 차분한 어조였으나 이건 협박이었다.
“……저를 죽이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주변에서 독촉하고 반대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나.”
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었다. 도망쳤던 것도. 시터로 일하겠다고 하며 미래를 꿈꾼 것도. 딱딱하게 굳은 나를 보며 라크하가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물론 나는 그대를 죽이고 싶지 않아. 그대만큼 쌍둥이들을 잘 다루는 사람도, 시터로 일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래도 방금 전 라크하가 한 말을 통해 약간의 희망을 엿보았다.
‘나를 시터로 두고 싶다는 듯이 얘기하고 있긴 해.’
저 말이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가 한 협박을 도리어 내가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아예 없던 일로 할까요?”
“무엇을?”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시터 고용 건이요.”
일순간 라크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를 시터로 고용하고 싶다는 말이 진심이었던 걸까? 무슨 연유로 그렇게까지 나를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노력이 허투루 될 바엔 내가 그를 따라갈 이유는 없었다.
“……그건 이미 끝난 얘기가 아니었나?”
“아직 계약서를 작성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공작님께서는 제가 해가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고.”
“해가 된다고?”
“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나를 협박한 거겠지. 내 정체를 다른 사람들이 알면 죽이거나 쫓아내려고 할 거라고. 라크하는 어려운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은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의 정체에 대해서만 의심했지, 그렇게는 생각을 못 해봤군. 확실히 내가 간과하고 있던 부분이야.”
“네……?”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그대를 몰아세운 점에 대해 사과하지.”
……갑자기 왜 사과를 하는 건데?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는 고민거리가 해결된 듯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그대는 내게 해가 되지 않으니 급할 필요가 없는 거였는데. 내가 인내심이 부족했군.”
“그럼…….”
“그래.”
내 말허리를 부드럽게 자른 그가 턱을 괸 채 느른하게 웃었다.
“곁에 두면서 그대에 대해 천천히 알아가려고 해 볼 테니, 시터 고용 건을 무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