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어른들의 연애란2021.11.15.
도망치려고 한 건 또 어떻게 안 거람.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마냥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 진정하자, 진정해. 메이아.’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뱉어냈다.
"……도망치지 않을 테니, 조금만 물러나 주시면 안 될까요?"
긴장감에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라크하는 쉽게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짓말에 능통한 그대를 내가 어떻게 믿겠나?”
“정말이에요.”
“지금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고.”
차마 부정은 하지 못하겠다만 억울했다.
‘믿지도 못하는 사람을 왜 데려가려 하냐고!’
언제까지 구석에 몰린 사냥감처럼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믿으실까요.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하면 될까요?”
테리투스가 나를 설득할 때 쓰던 방법이었다. 물론 신의 이름에 비해 내 이름은 보잘것없긴 하다만. 마침 떠오르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다.
“이름이라……. 그러고 보니, 아직 그대의 이름도 모르는군. 이름이 뭐지?”
“메…….”
메이아예요, 라고 말하려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내 이름을 말하기엔 걸리는 점이 꽤 있었다. 주변에 신전이 위치한 숲. 사제복을 입은 신원 미상의 여자.
‘원작에서 라크하는 늘 키네스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니까…….’
어쩌면 ‘메이아’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몰라. 정체를 밝힌다고 좋을 것도 없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 나는 뒷말을 바꾸었다.
“메…… 메미르예요.”
그렇다. 나란 인간의 작명 센스는 바닥을 기었다. ‘메’라고 하니 하필 떠오르는 게 메밀밖에 없냐……. 절망도 잠시, 라크하의 질문이 이어졌다.
“성은 없나?”
“……없을 걸요?”
라크하가 슬쩍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정말 성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걸.'
다들 나를 메이아라고만 불렀으니까.
“정말 없다는 건가, 있는데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건가.”
아, 그런 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구나. 나는 얼른 말을 정정했다.
“없을 거예요. 사실 전 제 부모님이 누군지 모르거든요.”
소설 속에서도 메이아의 개인사는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올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엑스트라니까.’
그저, 키네스를 위한. 죽는다고 해도 아무도 관심이 없을 엑스트라. 차라리 지나가던 행인 1로 태어나 평범하게 살아가는 게 더 행복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나처럼 죽음이 예정되어 있지는 않을 거 아니야.’
어쩐지 입안이 씁쓸했다.
“방금 전의 말은 진심인 것 같군.”
“네?”
“부모님이 누군지 모른다고 했던 말 말이야.”
서늘하기만 했던 라크하의 음성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흑마법에 거짓말 탐지기 같은 주술도 있나?
‘흑마법이나 배워볼까?’
그런 능력이 있다면, 흥신소를 하나 차려서 나름 돈을 쏠쏠하게 벌 수 있을 터. 음험한 속내가 얼굴에 드러난 것일까.
“……그 눈은 뭐지?”
“제 눈이 어때서요?”
나는 황급히 자본주의에 찌들어 있던 눈을 감췄다. 라크하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주시했다.
“어딘가에 홀려 반쯤 나간 눈이야. 어디서 많이 본 눈인데……. 저런 음흉하기 짝이 없는 눈을 어디서 봤더라?”
그만해. 이 사람아. 이렇게 진지하게 분석할 줄은 몰랐다. 나는 반쯤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요. 원래 하던 얘기나 해요.”
“내 이름은 알고 있나?”
“라크하 아인티아 공작님이시잖아요.”
무시무시한 흑마법까지 쓸 줄 아시는 공작님. 뒷말은 삼켰다. 아직 라크하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이 아직 외부로 알려지지 않을 때였다. 레이나가 납치되고 나서야, 알려지게 되니까.
"쌍둥이들이 알려줬나 보군.”
"네, 어제 다 같이 통성명을 했었거든요."
통성명은 무슨.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만 보면 으르렁대는데, 통성명을 할 시간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라크하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오늘도 그렇고, 쌍둥이들을 대체 어떻게 다룬 거지?”
“다 방법이 있죠.”
당신이 쌍둥이들에게 한 거짓말을 이용했다고 말할 순 없잖아. 라크하는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천천히 열었다.
“그대를 쌍둥이들의 시터로 두면서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쌍둥이들을 맡던 사람이 사직서를 냈거든.”
"아…… 그럴 만하네요."
아차, 사직서를 낸 사람의 마음이 공감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뭐?"
"……제가 뭔 말을 했나요?"
"그럴 만하다고 하지 않았나?"
……귀도 참 밝네.
"제가 딴 생각을 하고 있느라…… 뭐라고 하셨었죠?"
라크하가 나를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억지로 끌어올렸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다행히 그는 내가 한 말실수를 더 따지진 않았다.
“아이샤와 델카인의 시터로 그대를 고용하고 싶다고 했다.”
“시터요……?”
“그래, 아직 수상하긴 하다만 쌍둥이들을 그렇게 잘 다루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건 흥미로움과 새로운 인재에 대한 순수한 탐구열이었다.
“그대가 시터로 일하는 동안 시롬을 붙이면 우려할 일도 없겠고…….”
수상하면 그냥 놔주라. 응?
“마침 아이샤도 그대를 고용하고 싶다고 얘기하지 않았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냥 가든, 고용인으로 가든 저는 공작가로 갈 생각이 없어요."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아인티아 공작가로 가는 순간 매일매일 마음을 졸이면서 살 게 뻔했다.
“쌍둥이들을 돌보던 시터의 봉급이 500케르크였던가?”
"……누, 누가 그런 걸로 넘어갈 줄 알아요?”
하마터면 콜! 하고 외칠 뻔했다. 다른 제국으로 귀화하고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하긴 하니까.
“흐음.”
내 얼굴을 훑는 라크하의 시선이 느껴졌다. 혹시나 내가 동요했다는 걸 들킬까 봐,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는 눈치가 제법 빨랐다. 아니, 이미 자본주의에 찌든 내 눈을 알아챈 순간 나를 다루는 방법을 깨달은 걸지도.
“700케르크.”
“안 넘어간다니까요.”
“800.”
“……지금 사람을 뭘로 보는 거예요.”
“900.”
“…….”
경매장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 점점 커져가는 액수에 손이 바르르 떨렸다.
‘구, 구백 케르크라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라크하와 엮이면 안 되는데……. 이성과 달리 마음은 파도처럼 출렁였다.
‘자, 생각해 봐. 도망친다고 해도, 땡전 한 푼 없이 어떻게 살래?’
'나'라는 자본주의에 찌든 악마가 머릿속에서 속살거렸다. 그래도, 내가 미쳤다고 흑막을 따라갈 리가…….
“1000.”
“좋아요.”
있지. 1000케르크라면 말이 달랐다. 작중에서 6000케르크면 평생 놀고먹으면서 살 수 있다고 했었나?
‘딱 반년이야.’
반년만 쌍둥이들의 시터로 일하다가 도망치면 돼. 그리고 어쩌면…….
‘이건 기회일 수도 있어.’
라크하와 여주인공의 만남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자연스럽게 키네스는 신력을 쓸 일이 줄 테고…….
‘내가 절실히 필요할 일도 없어질 거 아니야.’
돈도 벌고 생존 가능성도 높이는 거지. 꿩도 먹고 알도 먹고!
“이봐, 사제. 넘어가지 않는다며.”
라크하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돈 때문에 시터로 일하겠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시치미를 뚝 뗐다. 엄연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른 목적도 있으니 말이다.
“큭.”
웃음을 눌러내는 듯한 소리. 잘 참는 듯하더니 라크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는 보란 듯이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그만 웃어요.”
내 경고에도 불구하고, 라크하는 한참을 더 웃은 후에야 웃음을 그쳤다.
“좋아, 그렇다고 해주지. 그럼 매달 1000케르크면 되겠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그의 입가에는 아직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 더 웃지 않는 게 어디야. 나는 겨우 마음을 달랬다. 사사로운 걸로 일일이 반응하기엔 아직 남은 게 있었다.
“그리고, 저를 죽이지 않겠다고도 약속해 주세요.”
“내가 그대를 왜 죽이나?”
뻔뻔하기도 하지. 소설 속에서 제 심기를 건드는 사람마다 족족 죽이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나도 언제 그중 한 명이 될지 몰랐다.
“제가 사실 지금도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거든요.”
“누구한테서?”
당신이랑 황제 말이야.
“……말하기 좀 곤란해요.”
“아이샤가 그대를 죽이겠다고 했나?”
음? 이건 또 무슨 전개지?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너도 죽을 줄 알아.
아직도 아이샤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목을 긋는 모습이 생생했다.
“그것도 맞긴 한데…….”
“이제야 모든 게 다 들어맞는군. 그래서 다음 날 쌍둥이들을 죽일 생각을 했고."
어쩜 이 가족들은 모든 걸 죽음과 연관 짓는지 모르겠다.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충분히 이해한다. 생존은 인간의 본능이니."
아니라니까……. 왜 다들 나를 살인자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일까. 아이샤와 델카인에 이어서 이젠 라크하까지. 흑막들에게 악역으로 찍히는 기분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뭔가 내가 여기 세계관에서 가장 못된 사람이 된 기분이잖아.'
이번만큼은 오해를 풀려고 하던 그때,
"둘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하는 거야!"
아이샤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
문에 기대고 있던 내 몸은 자연스레 앞으로 꼬꾸라졌다. 나는 나와 가까이 있던 라크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죄송해요, 문이 갑자기 열려서……."
라크하를 붙잡은 채 사과를 하는 그 순간.
"아……."
그의 몸이 휘청였다.
"어어?"
잠깐, 잠깐만. 나는 아직 그에게 기대어 있는 상태였다. 휘청이던 것도 잠시 라크하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안 돼!'
또다시 쌍둥이들의 원성을 받을 수 없었다.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그를 내 쪽으로 당겼다. 화이트 머스크 향과 함께 그의 얼굴이 내 어깨 위로 툭 떨궈졌다. 뜨거운 숨결이 목 주변에 흩어졌다.
"저기요, 공작님?"
"하아……."
금세 떨어져 나올 줄 알았던 라크하는 나에게 더 바짝 붙더니 깊게 숨을 들이켰다. 마치, 내가 산소 호흡기라도 되는 것처럼.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 나는 조심스레 그를 밀어내며 상태를 살폈다.
"괜찮으세요?"
"……밀어내지 마."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잔뜩 허기진 채, 욕망으로 들끓는 눈이 나를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라크하가 눈매를 살포시 접었다.
“왜 이렇게 좋지?”
“뭐, 뭐가…… 앗!”
“뭐긴.”
여우처럼 웃은 라크하가 커다란 손을 뻗어 내 허리를 단단히 휘어감았다.
“그대가 좋다는 말이잖아.”
그와 동시에 뒤에서 짧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헉."
고개를 슬쩍 돌려보자, 자그마한 손으로 제 입을 막고 있는 아이샤가 보였다. 마침 아이샤의 뒤로 총총, 델카인이 뛰어왔다.
"아이샤, 왜 거기서 가만히 서 있……."
델카인이 나와 라크하를 보자마자 입을 쩍 벌렸다. 그러곤 아이샤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이게 어른들의 연애야?"
"응, 어른들은 빠른가 봐."
이윽고 들려온 델카인의 말은 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럼 이제부터 사제가 아니라 형수님인 거야?”